86. 도
도가(道家)
『노자(老子)』⋅『장자(莊子)』 등을 합칭하여 도가라 한다.
도가(陶家)
진(晉) 나라 도간(陶侃)의 집을 가리킨다. 범규(范逵)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대접할 것이 없자 도간의 어미가 머리칼을 잘라 주효(酒殽)를 마련해 주었던 고사가 전해 온다.『진서(晉書)』 卷66 / 소식(蘇軾)의 시에 “杯柈慣作陶家客 絃誦嘗叨孟母鄰”이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28 潘推官母氏挽詞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말로 형상화된 도(可道)는 늘 그러한 원래의 도(常道)가 아니다. 『노자(老子)』 1장
도가명당가주(陶之茗党家酒)
송(宋) 나라 학사(學士) 도곡(陶穀)이 태위(太尉)인 당진(黨進)의 집에서 가기(歌妓)를 데려왔는데, 눈을 녹인 물로 차를 끓이면서 “당 태위의 집에서도 이런 풍류를 맛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 가기가 “조금씩 따라 마시며 나직하게 읊조리면서 양고(羊羔)의 미주(美酒)를 맛보곤 하였다.”고 대답한 일화가 전한다. 『녹창신화(綠窓新話)』 卷下 引 湘江近事
도간호(陶侃胡)
도간(陶侃)은 동진(東晋)의 유명한 장수인데 그의 집에 종으로 호노(胡奴)가 있었다. 한번은 호승(胡僧)이 그 종을 보고 놀라 예를 올리며 “이 사람은 해산(海山)의 사자(使者)다”라고 말했다. 도간이 호노를 이상히 여겼고 밤이 되어서야 호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보의 「시요노아단(示獠奴阿段)」 시에 “산의 나무는 하 푸르고 지는 해는 어둑한데, 간들간들 장대를 통해 샘물 줄기를 나눠 주네. 고을 사람들은 밤이 되면 그 물을 서로 다퉈 받는데, 어린 아단은 주인도 몰래 홀로 근원을 찾아가누나. 목마른 병든 몸 삼경에 백발을 돌려 바라보니, 한 줄기 샘물 소리가 청운을 적셔 오는 듯하네. 일찍이 도간이 호노의 괴이함에 놀랐더니, 항상 호표의 소굴을 뚫고 다니는 네가 괴이하구나.[山木蒼蒼落日曛, 竹竿裊裊細泉分. 郡人入夜爭餘瀝, 豎子尋源獨不聞. 病渴三更廻白首, 傳聲一注濕靑雲. 曾驚陶侃胡奴異, 怪爾常穿虎豹羣.]”라고 했다. / 인용: 昆侖奴(신광하)
도강(徒杠)
도보(徒步)로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를 말한다.
도강(桃康)
신(神)의 명칭이다.
도개(到漑)
양(梁) 나라 사람으로 성은 도이고 이름은 개다.
도객유혼(島客幽魂)
진말(秦末) 제(齊)의 왕 전횡(田橫)의 종자(從者)들. 전횡이 항우(項羽)와 싸워 제(齊) 땅을 회복하고 3년 동안 왕이 되었으나, 한(漢)에게 눌려 종자 5백명을 데리고 섬으로 망명해 들어가 있다가 한 고조(漢高祖)가 통일한 뒤에 항복하기를 명하매 부득이 두 객을 데리고 낙양(洛陽) 30리 밖까지 와서 자살했다. 섬에 있던 5백여 명도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자살했다. 동주 앞 바다에 ‘전횡섬’이 있다고 한다.
도건(陶巾)
도잠(陶潛)의 두건.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술을 매우 좋아하여 매양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쓰고 있던 갈건(葛巾)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도검(韜鈐)
고대 병서(兵書)인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의 병칭으로 무장(武將)을 말한다.
도검중자형(韜鈐重子荊)
문관의 몸으로도 작전 참모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도검(韜鈐)은 태공 망(太公望)의 병서(兵書)에 나오는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으로, 작전 계획을 뜻하는 말이다. 자형(子荊)은 진(晉) 나라 손초(孫楚)의 자(字)로, 일찍이 석포(石苞)의 군사(軍事)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적이 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비서는 하손이요, 작전 참모는 자형이라[記室得何遜 韜鈐延子荊].”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6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도견상부(道見桑婦)
하고 싶은 대로 일시적인 이익을 구하려다가 결국에는 기존에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잃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도경(陶徑)
도잠(陶潛)이 다니던 길.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구와 다니던 세 갈래 길 거칠게 되었어도 소나무와 국화는 제대로 있구나[三逕就荒 松菊猶存].” 하였다.
도경(道經)
『순자(荀子)』 주(註)에, “今虞書有此語而云道經 盖有道之經也”라고 보인다.
도경송균(陶逕松筠)
은자(隱者)의 호젓한 오솔길을 말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이 잡초로 무성한 중에, 그래도 솔과 국화 남아 있구나[三逕就荒 松菊猶存]”라는 표현이 있다.
도경청풍(陶徑淸風)
도연명(陶淵明)이 자기 집에다 세 길(三逕)을 내고 여름이면 북쪽 창에서 들어오는 맑은 바람에 누워 있노라는 시가 있다.
도경춘부(桃梗春符)
도경(桃梗)은 신의 형상을 그린 복숭아나무 널판. 전설에, 중국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밑에 사는 신도(神荼)와 울뢰(鬱櫑)라는 두 신이 능히 온갖 잡귀를 잡아먹는다는 설이 있으므로 민간에서 정월 초하루에 복숭아나무 널판에 두 신의 형상을 그려서 문위에 걸어놓아 잡귀를 물리쳤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도고(屠沽)
도고(屠酤)와 같이 쓰며 ‘소 잡고 술을 파는 미천한 사람’을 말한다. 사마(司馬)는 사마랑(司馬郞)을 가리키고, 도고(屠沽)는 소 잡고 술을 파는 사람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에 조조(曹操)가 허도(許都)를 새로 건설할 때 사방에서 인재가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이 예형(禰衡)을 보고 “어찌 진장지(陳長之) 사마백달(司馬伯達)을 추종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예형은 “내 어찌 도고아(屠沽兒)를 따라다니겠느냐?”라고 대답했다. / 인용: 大賈(이조원)
도곡다(陶穀茶)
송나라 도곡(陶穀)이 눈 오는 날에 미인을 데리고 눈물(雪水)에 차를 다려 마시는데 미인은 전 당태위(黨太尉)집에 있던 사람이었다. 묻기를, “당태위도 이런 운치를 알던가.” 하니, 미인은, “그는 비단 장막 안에서 고아주(羔兒酒)를 마시면서 우리들더러 나직히 노래 부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도공다(陶公茶)
도곡(陶穀)이 눈 오는 날에 눈물에 차를 다려 먹었다.
도공사(陶公梭)
도공은 도간(陶侃)을 말하고 북은 용(龍)이라는 뜻이다. 『진서(晉書)』 권16에 “도간이 젊었을 때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梭) 하나가 그물에 걸려나왔으므로 벽에 걸어 놓았더니, 조금 있다가 우레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용으로 변하여 갔다.” 하였다.
도공석(陶公石)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술에 취하면 눕곤 하여 그 흔적이 남았다는 이른바 ‘연명 취석(淵明醉石)’이 여산(廬山)에 있다고 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卷138
도공진의(陶公眞意)
도공은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의 「음주(飮酒)」 20수(首) 중 제5수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날 저물자 산 기운 더욱 좋아져, 날던 새도 서로들 어울려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된 뜻이 들어 있나니, 설명하려 하다가도 어느덧 말을 잊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라는 유명한 표현이 나온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3
도공희공(逃空喜跫)
외로운 처지에서 친지의 방문을 받거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을 말한다. 외진 곳에 사는 사람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쁘다는 뜻으로 덕장 스님이 찾아와 작자에게 인사로 한 말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빈 골짜기에 도망쳐 사는 사람이 잡초가 길을 덮은 그곳에 오래 사노라면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쁜 법이다[蜋位其空, 聞人足音跫然而喜矣].” 하였다. / 유의어: 도공희족음(逃空喜足音), 공곡족음(空谷足音), 공곡공음(空谷跫音), 공음파자위(跫音頗自慰)
도관(道觀)
도교(道敎)의 사원(寺院)을 가리키는데, 도교에서 성단(星壇)을 두고 성신을 제사 지낸다.
도관(都官)
한(漢) 나라 때 사예교위(司隷校尉)의 속관(屬官)이었다.
도관무호시(都官無好詩)
당나라 시인 정곡(鄭谷)이 눈(雪)을 두고 지은 시에, “강 위에 저녁 때 그림 그릴 만한 곳은 어옹이 한 도롱이를 입고 돌아간다[江上晩來堪畵處 漁翁披得一簑歸].”는 구(句)가 있다. 정곡의 벼슬이 도관(都官)이었다.
도구(屠狗)
옛날에 연(燕) 나라 지방에는 기절이 있는 협객(俠客)이 많았는데, 그들이때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개 잡는 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
도구(陶句)
진(晉) 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시구를 가리킨다.
도구(菟裘)
원래는 노(魯) 나라 읍명(邑名)인데, 노나라 은공(隱公)이 이곳에 은거하였으므로, 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는 곳의 뜻으로 쓰인다. 노은공(魯隱公)이 말하기를, “도구에 별장(別莊)을 경영하라. 내 장차 거기에 가서 늙으리.” 하였다 한다. 『좌전(左傳)』 隱公 十一年
도군(道君)
① 휘종인데, 휘종이 도교(道敎)를 숭상하므로 휘종의 생전에 전위(傳位)를 받은 흠종(欽宗)이 휘종에게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란 존호(尊號)를 올리었다.
② 송 나라 도군(道君)은 송 나라의 휘종(徽宗)을 가리킨다. 휘종은 도군 황제(道君皇帝)라고 자칭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③ 송(宋) 나라 휘종(徽宗)의 별칭이다. 소흥(紹興) 5년(1135)에 금(金)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오국성(五國城)에서 객사하였다.
도군지주(陶君止酒)
진(晉)의 도잠(陶潛)이 음주(飮酒)라는 제목으로 시(詩) 20수를 쓰고, 그 다음에 지주(止酒)라는 제목으로 술을 끊어야겠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三
도굴계맹(道屈季孟)
계씨와 맹씨는 노(魯) 나라를 집권한 두 대부(大夫)인데, 제경공(齊景公)이 공자(孔子)를 대접하며 말하기를, “계씨와 같이는 못하겠지만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서 대접하리라[若季氏則吾不能, 以季ㆍ孟之閒待之].” 하였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계씨는 상경(上卿), 맹씨는 하경(下卿)이니, 두 벼슬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인데, 공자는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본국을 떠났다.
도궁(途窮)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나가서 노닐다가 길이 막힌 곳에 이르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도궁곡(途窮哭)
완적(阮籍)의 고사. 완적은 가끔 느닷없이 길을 떠나 마음내키는 대로 갔다가 길이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면 곧 통곡을 하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도궁완자곡(途窮阮子哭)
완자는 진(晉) 나라 때의 완적(阮籍)을 말한다. 이 말은 완적이 수레를 타고 놀러 나갔다가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통곡하고 돌아온 고사에서 온 말인데, 전하여 곤궁함을 슬퍼하는 뜻으로 쓰인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도궁제읍지삼숙(道窮齊邑遲三宿)
맹자가 제(齊) 나라를 떠나면서 3일 동안이나 제 나라 동남쪽에 있는 주(晝)라는 고을에서 묵고 간 일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下에 “3일 동안을 묵고 주 고을을 나왔다.[三宿而出晝]” 하였다.
도규(刀圭)
약(藥)을 뜨는 숟가락. 약물(藥物)이나 의술(醫術). 늙지 않게 하는 선약(仙藥)을 말한다.
도균(陶鈞)
도(道)는 질그릇 만드는 사람, 균(鈞)은 질그릇 만드는 데 쓰는 굴림틀[轉器]. “성왕이 세상과 풍속을 제어함은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굴림틀을 굴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질그릇을 만들 때 쓰는 선반(旋盤). 녹로(轆轤). 곧 왕자(王者)가 천하를 경영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문자다. 『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 “도균(陶鈞)으로 천하를 교화한다.” 하였다.
도금무보(陶琴無譜)
도연명은 무현금(無絃琴)을 연주했다고 한다.
도기(道氣)
도(道)의 기운으로 세속을 초탈한 청정한 경지를 말한다.
도기수(盜其嫂)
『사기(史記)』 「진평세가(陳平世家)」에 “平雖美丈夫如冠玉矣……平居家時 盜其嫂”라 하였다.
도기희서진탕탕(道寄姬書陳蕩蕩)
희(姬)는 주(周) 나라 성이므로 『희서(姬書)』는 『주서(周書)』를 말하는데, 즉 『서경(書經)』 「홍범(洪範)」을 가리킨다. 홍범은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말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이 글에 “편당(偏黨)이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해진다.” 하였는데, 탕탕은 집전(集傳)에 광원(廣遠)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도남(圖南)
① 송(宋) 나라 진박(陳搏)의 자. 그가 화산(華山)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한 번 누우면 1백여 일씩이나 일어나지 않고 잤다고 한다. 『송사(宋史)』 卷457
② 송(宋)의 진단(陳摶). 도남(圖南)은 그의 자(字)이다.
③ 어느 다른 지역으로 가서 큰 사업을 시작하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도남붕익능창해(圖南鵬翼凌蒼海)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북쪽에서 단숨에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웅지를 품고 있다.” 하였다.
도년(徒年)
도형(徒刑)을 이른다. 도형의 형기(刑期)에는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의 5등급이 있다. 그 형기의 단위가 연(年)이므로 도년(徒年)이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말을 마필(馬匹), 쌀을 미석(米石), 얼음을 빙정(氷丁), 매를 응련(鷹連)이라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도능규공실(道能窺孔室)
학문의 조예가 깊은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궁궐의 담에 비유하면 나의 담은 어깨 정도의 높이로서, 궁궐 안의 방이나 집들의 아름다움은 엿볼 수 있으나, 부자(夫子)의 담은 여러 길의 높이라서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도달(挑撻)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의 “도하며 달하니[挑兮撻兮].”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왕래(往來)하며 뛰어다닌다는 뜻이다.
도당씨(陶唐氏)
고대 성군(聖君)의 하나인 요(堯) 임금을 가리킨다.
「도덕경(道德經)」
주(周) 나라 이이(李耳)가 저술한 책으로 뒷날 도교(道敎)의 바탕이 됨. 주석서에는, 한(漢) 나라 하상공(河上公)의 노자주(老子註) 2권과 위(魏) 나라 왕필(王弼)의 노자주(老子註) 2권이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도도(滔滔)
① 물이 그득 퍼져 흘러가는 모양, 광대한 모양
② 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모양
③ 감흥 따위가 북받쳐 누를 길이 없음
④ 탄식하는 모양
⑤ 사조(思潮)ㆍ유행(流行)ㆍ세력(勢力) 등이 걷잡을 수 없이 성대해지는 넓고 큰 모양 / 인용: 賣魚翁行(홍성민)
도도(叨叨)
말이 많음, 투덜거림, 참됨, 진실함
도도(淘淘)
물이 흐르는 모양
도도(慆慆)
오랜 모양, 어지러운 모양
도도(涂涂)
이슬이 많이 내리는 모양
도도독(陶都督)
도잠(陶潛)의 증조부 도간(陶侃)을 말한 것. 간은 진(晉)의 명제(明帝) 때 군공(軍功)으로 교주(交州)ㆍ광주(廣州) 등 7개 주의 도독(都督)을 역임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진서(晉書)』 卷六十六
도도자개시(滔滔者皆是)
공자(孔子)가 길을 가다가 「자로(子路)」에게 나루터를 물어 오게 하였는데 장저(長沮)가, 「자로(子路)」가 공자의 문인이란 것을 듣고는 “도도(滔滔)한 것이 천하가 다 이러하니 누구와 변역하겠는가[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도도주대화(陶陶鑄大和)
천지간의 충화(沖和)한 기운 속에 평화스러운 심리 상태가 조성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도도탄불귀(慆慆歎不歸)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에 “我徂東山 慆慆不歸”라 하였다.
도도평장(都都平丈)
옛날 삼가촌(三家村)의 무식한 몽학 선생이 아동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면서 공자(孔子)가 주(周) 나라의 예(禮)를 일컬어 ‘욱욱호문(郁郁乎文)’이라고 한 것을 잘못 도도평장으로 읽었다는 데서 온 말로, 성인의 글을 고쳐 읽는다 하여 조롱한 말이다.
도두(渡頭)
‘나루터 어귀’를 말한다.
도두(刀頭)
돌아온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隱語)이다. 도두는 칼끝인데, 칼끝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온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도두(刀斗)
조두(刁斗)로, 군중(軍中)에서 낮에는 밥을 짓는 데 쓰고 밤에는 경보를 알리는 데 쓰는 솥 같이 생긴 것이다.
도두환(刀頭環)
칼 머리에 고리(環)가 달렸는데, 환(環)은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귀환(歸還)한다는 은어(隱語)로 쓴다.
도라(兜羅)
초목(草木)의 화서(花絮)를 일컫는 말이다.
도라면(兜羅綿)
목면(木綿)의 일종.
도랍(刀臘)
양면에 날이 있는 칼.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주(註)에 “도씨(桃氏)가 칼을 만드는데 납(臘)의 넓이가 2촌 반이다.” 하였고, 소(疏)에 “양면에 다 날이 있다.”이라고 하였다.
도량(道場)
모든 불(佛)ㆍ보살(菩薩)이 성도(聖道)를 얻거나 또는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보리도량(菩提道場).
도량죽마(跳踉竹馬)
아이들이 대나무 막대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말처럼 끌고 다니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놀던 친구를 말한다. 죽마고우(竹馬故友). 『진서(晉書)』 「은호전(殷浩傳)」에 “환온(桓溫)이 어릴 때에 호(浩)와 함께 대막대를 타고 놀았다고 말하였다.” 했다.
도려(陶廬)
도잠(陶潛)의 집이란 뜻으로 곧 은사의 집을 의미하는데, 도잠의 「음주시(飮酒詩)」에 “집을 인경에 지어 살지만 거마의 시끄러움 없어라 …… 동쪽 울밑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도려(道侶)
승려나 도사가 함께 수행하거나 수련하는 동료를 일컫는 말이다.
도려(盜驪)
「주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인 준마의 이름이다.
도령(陶嶺)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은거하던 도산(陶山)을 말한다.
도령(陶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도령독련향(陶令獨憐香)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초목(草木)의 꽃 가운데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지만,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다……[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 獨愛菊]” 하였다.
도령문전오(陶令門前五)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그를 도령(陶令)이라 별칭하였다. 그가 문 앞에 다섯 그루 버들을 심어 놓고 자칭 오류(五柳) 선생이라 하였다.
도령병(陶令病)
도공은 도잠(陶潛)이요, 병은 곧 각기병을 가리킨다. 도잠을 매우 존경하던 주자사(州刺史) 왕홍(王弘)이 함께 놀다가 돌아갈 적에 탈 것을 묻자, 도잠은 “나는 본래 다리병이 있어서 그 동안 남여(藍輿)를 탔으니 또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 하며 거절하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도령삼경(陶令三徑)
도령(陶令)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진(晉) 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장후(蔣詡)가 뜰에 오솔길 세 개를 내고 송(松), 국(菊), 죽(竹)을 심은 고사가 있는데,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三徑就荒 松菊猶存”이라 하였고,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 삼경(三徑)을 꾸밀 밑천을 마련하려고 팽택 영이 되었던 곡절이 소개되어 있다.
도로(都盧)
서역(西域)의 나라 이른다. 그곳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 나무를 잘 오르므로 함부로 잘 돌아다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도로무공(徒勞無功)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도록(道籙)도가(道家)에서 미래(未來)의 길흉을 예언(豫言)하여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도룡(屠龍)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편에, 주평만(朱泙漫)이 용 잡는 기술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우는데 천금의 재산을 다 없애고 3년 만에 기술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 묘법을 써볼 곳이 없었다.” 하였다. 그래서 기술만 높고 쓸 곳이 없는 것을 도룡지기(屠龍之技)라 칭한다.
도룡기(屠龍技)
세상에서 쓸모 없는 명기. 또는 높이 뛰어난 기예를 말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서 용 잡는 기술(屠龍)을 배웠는데, 집안의 천금을 다 털어 3년이 지난 뒤에야 그 기술이 이루어졌다.” 하였다.
도룡수교경무용(屠龍雖巧竟無用)
주평만(朱泙漫)이란 사람이 지리익(支離益)에게 용 잡는 기술을 배우면서 천금(千金)의 가산을 탕진하고 3년 만에 성취하였는데,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
도룡예(屠龍譽)
출중한 기예를 소유했다는 말로,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천금(千金)을 들여 삼 년 만에 용 잡는 기술(屠龍之技)을 터득한 주평만(朱泙漫)의 이야기가 나온다.
도룡지기(屠龍之技)
용을 잡는 재주가 있다. 쓸모 없는 재주를 가르키는 말이다.
도륜(陶輪)
『유마힐경(維摩詰經)에 “斷取三千大千世界 如陶家輪 着右掌中 擲過恒沙世界之外”라 하였다.
도리(闍梨)
사범(師範)이 되는 승려(僧侶)를 말하는데, 전하여 일반적인 승려의 칭호로 쓰인다.
도리(都吏)
관아에 딸린 아전 중의 우두머리. / 인용: 용재총화(성현)
도리(桃李)
① 복숭아와 오얏인데 열매가 많이 달린다 하여 선대의 음덕을 받은 자손을 가리키기도 한다.
② 훌륭한 문생이나 천거한 현재(賢才)를 말한다. 당(唐)의 적인걸(狄人傑)은 일찍이 요원숭(姚元崇)ㆍ환언범(桓彦範) 등의 많은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다.” 한 말에서 온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도리경무미(桃李競嫵媚)
소인들이 권세를 다투는 것을 말한다. 도리는 일시의 봄을 자랑하기 때문에 소인(小人)에 비유한 것이다.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
복숭아와 오얏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수한 문하생(門下生)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아 따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후배를 교육하거나 자식을 가르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도리불언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따먹으러 오게 되므로 자연히 길이 생긴다. 덕행이 있는 사람은 무언중에 남을 심복시킴을 비유한 말이다. 훌륭한 스승 아래로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모이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한(漢) 나라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의 덕을 표현하면서 “도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와 그 밑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고 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 유의어: 도리성혜(桃李成蹊), 도리혜(桃李蹊)
도리성행(桃李成行)
도리가 줄을 지었다는 말은 준수(俊秀)한 인사(人士)가 문하(門下)에 가득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천거한 사람은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소.”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도리원(桃李園)
복사꽃과 오얏꽃이 핀 아름다운 정원을 말한다.
도리월(桃李月)
복사꽃과 오얏꽃이 필 무렵에 뜨는 달을 말한다.
도리화(桃李花)
준수(俊秀)한 인재(人材)를 말한다.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천거한 사람이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소.”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도림(道林)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인 지둔(支遁)의 자(字)이다. 왕희지(王羲之) 및 허순(許詢) 등과 함께 막역하게 지냈으므로, 선비와 교유하는 승려의 대칭으로 도림이라는 말을 흔히 쓰게 되었다.
도림방우(桃林放牛)
무력(武力)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림은 지명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소를 풀어 놓았던 곳.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무력을 거두고 문덕(文德)을 닦아,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 천하에 다시 쓰지 않을 것을 보였다.” 하였다.
도림선사(道林禪師)
당(唐) 나라 고승(高僧). 그의 성은 오씨(吳氏), 이름은 원경(元卿)으로, 진정산(秦亭山)에 들어가 큰 일산처럼 생긴 소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데 까치가 그 옆에 둥지를 짓고 깃드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과선사(鳥窠禪師)라 불렀다. 『전등록(傳燈錄)』 卷四, 『연감유함(淵鑑類函)』 卷三百十七
도림전(桃林戰)
가서한(哥舒翰)이 756년 안녹산에게 패한 전쟁을 말한다. 『좌전(左傳)』에서 “도림(桃林)의 성채(城砦)를 지켰다.”고 했고 주(注)에서 “지금의 동관(潼關)이 바로 도림(桃林)이다”라고 했다. 「가서한전(哥舒翰傳)」에서 “가서한(哥舒翰)이 병사를 거느리고 동관(潼關)에 나아가 영보현(靈寶縣)에 있는 서원(西原)에 진을 쳤다가 적의 기습을 당했다. 가서한(哥舒翰)의 군대가 서로 밟고 넘어졌으며 황하(黃河)에 빠져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다.”라고 했다. / 인용: 潼關吏(두보)
도마(稻麻)
많은 신자(信者)들을 벼와 삼에 비유한다.
도망(悼亡)
상처(喪妻)를 말하는 것이다. 진(晉)나라 반악(潘岳)이 상처(喪妻)를 보고 도망시(悼亡詩) 세 수를 지었는데 그 시가 전송되어 뒷사람이 상처를 당한 용어로 쓰고 있다. 도망시(悼亡詩)라고도 한다. / 인용: 김정희, 이달, 신위, 최성대
도명(逃名)
‘이름을 숨긴다’는 뜻이다.
도모(道謀)
큰 길 가에 집을 짓는 경우, 길가는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이래라 저래라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도목(都目)
일을 한데 몰아서 행하거나 적는 것. 그러한 행사ㆍ문서를 뜻하기도 한다. 도목안(都目案)ㆍ도목단자(都目單子) 등 문서에도 쓰이고 행사에도 쓰이는 말이며, 도목정사는 경우에 따라 한 해에 한 번 내지 여섯 번 있었다.
도목정사(都目政事)
해마다 유월과 섣달에 벼슬아치의 성적에 다라 벼슬을 떼어버리거나 좋은 데로 올리거나 하던 일.
도무(兜鍪)
투구란 말로, 장수(將帥)를 말한다.
도문대작(屠門大嚼)
정육점 앞을 지나면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시늉을 하며 ‘잠시 마음을 쾌하게 갖는다’는 뜻으로,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 “푸줏간을 지나면서 크게 씹으면 비록 고기를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귀하고 유쾌한 일이다.” 하였다.
도문오류(陶門五柳)
도잠(陶潛)의 문 앞에 있는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말한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며 음주와 독서로 즐겼다 한다. 『도정절집(陶靖節集)』 卷六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 유의어: 도문오주류(陶門五株柳)
도문유대작(屠門猶大嚼)
사람들이 장안이 즐겁다는 말을 들으면 문에 나가서 서쪽을 향해 웃고, 고기 맛이 좋다 하면 고깃집 문간을 대하여 씹는다. 『환담신론(桓潭新論)』
도미(酴醾)
꽃 이름으로 다화(茶花)의 별명인 동백꽃을 가리킨다. 만생(蔓生)하는 관목(灌木)으로 꽃은 초여름 경에 핀다. 도미(酴醾)는 원래 술 이름인데 꽃이 그 술빛처럼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으로 향기가 매우 강렬한데, 특히 이 꽃은 음력으로 2~3월 사이에 핀다고 한다. 『세시기(歲時記)』
도미방지(蹈尾方知)
범의 꼬리를 밟다가 위태로움을 당하였다는 말이다.
도미찬(陶眉攢)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편지로 도연명(陶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이 ‘술을 마시게 한다면 가겠다.’고 답하자, 혜원법사가 그러겠다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연명이 연사(蓮社)에 도착하자, 혜원법사가 연명에게 연사에 들어오라고 강요하니 연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갔다.” 하였다.
도미화(酴醾花)
꽃나무. 이 꽃가루를 술에 타면 술맛이 좋다고 한다.
도방(都房)
큰 북당(北堂)의 뜻으로서 옛사람들이 그곳에 화초를 심곤 하였으므로 귀인(貴人)의 화원(花苑)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도방고리(道傍苦李)
길가의 쓰디쓴 자두라는 말로 아무도 따는 사람이 없이 버림받는다는 뜻이다.
도방리고오투육(道傍吏苦烏偸肉)
정사(政事)의 치밀함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 나라 때 황패(黃覇)가 영천태수(潁川太守)로 있을 적에 민정을 사찰할 일이 있어 나이 많은 청렴한 한 아전을 골라 내보냈는데, 그 아전이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길가에서 밥을 먹을 때 까마귀가 고기를 훔쳐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황패는 이 일을 다른 백성으로부터 이미 전해 듣고 있다가 그 아전이 사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황패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대단히 고통스러웠겠다. 길가에서 밥을 먹다가 까마귀에게 고기까지 빼앗겼구나.” 하니, 그 아전이 크게 놀라 한 가지 일도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보고함으로써 일을 잘 조처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八十九
도변고리(道邊苦李)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왕융(王戎)이 어렸을 적에 길가의 오얏나무를 보고는 따 먹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필시 맛이 쓸 것이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도변고리는 용렬한 인간, 혹은 무용지물의 뜻으로 곧잘 쓰이게 되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雅量)」
도보(道甫)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자. 이광사는 영조 시절 손꼽히던 서예가로서 자기 호(號)를 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書體)를 남겼음. 『동국문헌(東國文獻)』 「필원편(筆苑編)」
도복여면과(陶復如綿瓜)
『시경(詩經)』 대아 「면(綿)」의 “외가 달려 저만큼 컸네. ……흙을 구워 흙집 짓고.[綿綿瓜瓞…… 陶復陶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周) 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처음 나라를 창업할 때는 저렇게 한미하게 살았지만, 뒤에 후손인 문왕(文王)이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뜻으로, 지금은 비록 한미하게 살지만 후손이 현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도본준(屠本畯)
명 나라 문신. 자는 전숙(田叔), 자호를 감선생(憨先生). 저서에 태상전록(太常典錄)ㆍ전숙시초(田叔詩草)가 있다.
도부(到付)
관찰사가 수령의 장보(狀報)에 답하는 문서를 말한다.
도부(桃符)
옛날 새해 아침에 두 개의 복숭아나무 판에다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의 두 귀신 이름을 써서 문 옆에 걸어 둠으로써 사기(邪氣)를 막았던 풍속을 말한다. 이후 춘첩(春帖)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본초(本草)』 「도부(桃符)」
도불습유(道不拾遺)
길에 떨어진 것도 줍지 않는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믿음이 차 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르는 말이다. 법이 엄격하게 시행되어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을 만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뜻이다.
도비(掉臂)
팔을 내저어 돌아본 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누구에게도 응수하거나 돌아본 체하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는 뜻이다.
도사(陶舍)
도연명(陶淵明)의 집이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이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진서(晉書)』 卷 94 「도잠전(陶潛傳)」
도사(陶謝)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과 남조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각각 전원시(田園詩)와 산수시(山水詩)에 능하여, 자연의 경물 묘사에 최고의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도삭(度索)
동해 바다 속에 있다는 전설상의 섬 이른다. 한(漢) 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난룡(亂龍)」에 “상고 시대에 귀신을 잘 잡는 신도(神荼)와 울루(鬱壘) 형제가 이 산 위의 복숭아나무 아래에 서서 귀신들을 검열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도삭반도(度索蟠桃)
창해(滄海) 속에 도색산(度索山)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어 반도가 열린다고 한다. 반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삼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
도산(嵞山)
도산(塗山)과 같다. 도산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다. 첫째는 사천파현(四川巴縣)에 있다는 설인데 촉전(蜀典) 권2, 도산씨강주 조(塗山氏江州條)에 보인다. 둘째는 안휘성(安徽省) 회원현(懷遠縣)에 있다는 것으로 『노사(路史)』, 『후기십이(後紀十二)』 주(注)와 청(淸) 『일통지(一統志)』에 보인다. 신화적 관점에서 논하자면 월(越)의 회계(會稽) 월절서(越絶書) 외전기지(外傳記地)에 있다는 설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에게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주었던 구미호(九尾狐)가 바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道山)
신선이 사는 선경(仙境)을 말한다.
도산(陶山)
① 송(宋) 육전(陸佃)의 호이다.
② 퇴계 이황을 말한다.
도산(塗山)
① 수춘현(壽春縣)의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하우(夏禹)가 이곳에다 제후들을 집합시키자 옥과 비단을 폐백으로 가지고 온 자가 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② 하우씨(夏禹氏)의 후비이다. 그가 도산씨(塗山氏)의 딸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도산로(陶山老)
퇴계 이황을 말한다.
도산사일침루경(塗山四日寢屢驚)
장가들어 아내를 맞아온 기간.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내 도산으로 장가들어 신ㆍ임ㆍ계ㆍ갑(辛壬癸甲)을 지냈으며” 운운했는데, 이는 우(禹)가 치수(治水)에 바빠 신일(辛日)에 도산으로 장가갔다가 그로부터 사흘 후인 갑일(甲日)에 서둘러 돌아와 다시 치수의 일에 나섰음을 말한 것이다.
도산서당(陶山書堂)
경상도 안동에 있는 퇴계 이황(李滉)의 서재이다. 다음의 암서헌에서 부용봉까지는 모두 그 부 속 건물이나 혹은 부근 산천(山川)들이다.
도산씨(塗山氏)
우(禹) 임금이 일찍이 도산씨(塗山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도산지회(嵞山之會)
도산은 회계산(會稽山)으로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에 있다. 옛날 우(禹) 임금은 제후들을 도산에서 모으니, 폐백을 갖고 온 나라가 만(萬)이나 되었으며, 회계산에서 여러 신에게 제사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 哀公七年, 『국어(國語)』 「노어(魯語)」
도상림(禱桑林)
은(殷)나라의 탕(湯)이 7년 대한(大旱)에 큰 가뭄 때에 상림에서 기우제 지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상문우(道上問牛)
정승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승상(丞相) 병길(丙吉)이 되어 길을 갈 때 사람 죽은 것을 보고는 아무 말을 않더니, 어떤 사람이 소를 쫓아가는데 소가 헐떡이며 혀를 내뽑는 것을 보고 하인을 시켜, “소를 몇 리나 쫓아왔느냐.” 물어보았다. 옆의 사람이 그까짓 것은 왜 묻느냐고 하자 “사람이 죽은 것은 경조윤(京兆尹)이 걱정할 일이요, 삼공(三公)은 음양(陰陽)의 조화(調和)함을 맡았으니 지금 보니까 소가 헐떡이니 혹시 음양이 고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여 물었노라.” 하였다 한다. 『한서(漢書)』 「병길전(丙吉傳)」
도색반도(度索蟠桃)
반도(蟠桃)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바다 속에 있는 도색산(度索山) 꼭대기에서 자라며, 3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
도생(桃笙)
도죽(桃竹)으로 만든 돗자리이다.
도서(圖署)
① 서화(書畵)에 찍는 온갖 도장.
②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합칭한 말이다.
도서조박비심전(圖書糟粕匪心傳)
제 환공(齊桓公)이 당(堂) 위에서 책을 읽는 것을 윤편(輪扁)이 보고는, 그것은 이미 죽은 옛사람이 먹다가 남긴 술지게미(古人之糟粕)일 뿐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나온다.
도선(逃禪)
속세(俗世)를 떠나 절에 들어가서 참선(參禪)을 한다는 뜻이다.
도세(度世)
티끌 세상에서 초탈하여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도소부(搗素賦)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인 반첩여(班倢伃)의 작으로 내용은 흰 비단을 다듬이질하는 것을 읊은 것이다.
도소주(屠穌酒)
약을 넣어 담갔다가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온 식구가 이 술을 마시어 온역(瘟疫)을 물리쳤다고 한다. 육계(肉桂)ㆍ산초(山椒)ㆍ백출(白朮)ㆍ길경(桔梗)ㆍ방풍(防風) 등의 한약재를 넣어 담그는데, 이 술을 마실 때는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어린이가 어른께 절을 올린 다음 함께 앉아 서로 축하하면서 가장 어린이부터 이 술을 먼저 마신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도소지양(屠所之羊)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즉 죽으러 갈 때.
도솔천(兜率天) = 도솔(兜率)
① 도가(道家)에 도솔천(兜率天)이 있는데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사는 곳이니, 곧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도리천(忉利天)이다. 욕계제천(欲界諸天)의 하나이다.
②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여섯 천(天)의 하나. 수미산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거리에 있는 천계(天界)로서 원(院)이 둘 있는데, 그 내원(內院)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라고 한다. 『대장법수(大藏法數)』
③ 불교에서 말하는 천계(天界) 중의 하나. 미륵보살이 이곳에 살고 있으며, 생전에 불경의 수행(修行)을 잘한 사람이 죽어서 이곳으로 가게 된다 하였다. 『법화경(法華經)』 「근발품(勸發品)」 / 인용: 懊惱曲(신국빈)
④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하늘의 하나.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을 말하기도 한다.
도수(島瘦)
가도의 시가 여위고 딱딱한 것을 숭상하므로 이런 일컬음이 나오게 된 것이다. 소식(蘇軾)의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라는 글에, “가도는 여위고, 맹교(孟郊)는 차고, 원결(元結)은 가볍고, 백거이(白居易)는 탁하다.” 하였다.
도수(塗脩)
주 소왕(周昭王) 때의 도수국(塗脩國)을 말한다.
도수교한(島瘦郊寒)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 가도(賈島)와 맹교(孟郊)의 시풍(詩風)을 평하는 말로, 수(瘦)는 바싹 말라 파리하다는 뜻이고, 한(寒)은 옷이 남루한 비렁뱅이라는 뜻이다.
도수자(盜嫂者)
형수를 훔친 자란 한 고조(漢高祖)의 공신(功臣)인 진평(陳平)을 이른다. 관영(灌嬰) 등이 일찍이 진평을 참소하여 말하기를 “들으니 진평은 집에 있을 때에 자기 형수를 훔쳐 살았다고 한다.” 하였다.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도습(蹈襲)
옛 것을 좇아서 그대로 한다. 초습(勦襲). 『금사(金史)』 「이경전(李經傳)」에 “시를 짓되 각고(刻苦)를 다하며 감히 전 사람을 도습하지 않았다.” 하였다.
도시(倒屎)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말로, 대단히 반가워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도식(桃植)
복숭아는 곧 준수(俊秀)한 선비를 도리(桃李)에 비유한 데서 온 말로, 즉 인재 양성을 의미한 말이다.
도신(到申)
옛날에 관리들이 진시(辰時)에 출사하여 신시(申時)에 퇴근을 하였다.
도신단단(刀身段段)
칼이 여러 번 꺾어지는 일.
도심녕상마우호(道心寧爽馬牛呼)
소라고 부르면 소라고 대답하고, 말이라고 부르면 말이라고 대답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남과 이름을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도씨경(陶氏徑)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갈래 오솔길은 묵혀졌으나 솔과 국화는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도안(道安)
동진(東晋) 때의 고승(高僧)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양양(襄陽) 단계사(檀溪寺)를 세우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양양(襄陽)을 취하고 안(安)을 얻고 기뻐하여 말하되, “내가 10만 군사로 양양을 취하여 한 사람 반을 얻었으니, 안공(安公)이 한 사람이요, 습착치(習鑿齒)가 반 사람이다.” 하였다.
도안(道安)
진(晉) 나라 때 고승(高僧)이니,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석가(釋迦)보다 존귀한 자가 없다 하여 석(釋)으로서 씨(氏)를 삼았으니, 후세의 불도(佛徒)들이 석씨(釋氏)라고 칭호한 것이 도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양고승전(梁高僧傳)」 卷五
도안공(陶安公)
선인(仙人)의 이른다. 원래는 대장장이였는데 뒤에 적룡(赤龍)을 타고 승천했다 한다.
도야(陶冶)
도(道)는 기와를 굽는 사람이요 야(冶)는 풀무장이인데 이는 화육(化育) 재성(裁成)의 뜻을 빌어서 표현한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천지를 포괄하고 만물을 도야한다.” 하였다.
도어(徒御)
도보(徒步)로 가면서 연(輦)을 끄는 자와 수레 위에서 말을 모는 자를 합해 일컫는 말이다.
도어사(都御史)
대헌과 같은 말로 대사헌을 말한다.
도연(道緣)
도가(道家)와의 인연, 즉 선경(仙境) 속에서 양생(養生)을 할 수 있게 된 특별한 인연이라는 뜻이다.
도열(桃茢)
복숭아나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비. 옛날에 이 비로 집안의 사기(邪氣)를 쓸어내었다고 한다.
도열강서파(圖列江西派)
북송(北宋)의 황정견(黃庭堅)이 새로운 시풍(詩風)을 개창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라 불렸는데, 여본중(呂本中)이 이들 법사(法嗣) 25인에 대한 강서시사종파도(江西試社宗派圖)를 그렸다.
도엽(桃葉)
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의 애첩(愛妾) 이름인데, 왕헌지는 도엽을 몹시 사랑하여 일찍이 그를 위해 도엽가(桃葉歌)를 지어 부르기까지 하였다.
도엽가(桃葉歌)
악부(樂府)의 오성곡사(吳聲曲辭) 이름으로, 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가 그의 애첩(愛妾)인 도엽(桃葉)을 보내면서 지어 불렀던 노래이다.
도오(堵敖)
두오. 초나라의 현인.
도옥대(賭玉帶)
소동파(蘇東坡)가 불인선사(佛印禪師)를 찾아가서, “선사(禪師)의 사대(四大)를 빌려서 상(床)을 만들어 봅시다.” 하니, 불인(佛印)이 말하기를, “내가 한 마디 말을 할터이니, 그 말에 답하지 못하면 띠고 계신 옥대(玉帶)를 내기로 합시다.” 하였다. 소동파가 허락하니, 불인(佛印)이, “사대(四大)가 본시 없는 것인데, 어디에 앉으시렵니까.” 하므로 소동파가 곧 답하지 못하니, 불인(佛印)이 시자(侍者)를 불러서, “이 옥대(玉帶)를 받아서 절(寺)에 두라.” 하였다.
도온(道韞)
재능이 출중한 여성. 진(晉) 나라 사안(謝安)의 질녀(姪女)인 사도온(謝道韞)을 말한다. 사안이 눈 내리는 모습을 표현해 보라고 하였을 때, 조카인 사랑(謝郞)이 “공중에 소금을 흩뿌린 것과 조금 흡사하다[撤鹽空中差可擬]”고 하자, 도온이 말을 받아서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린다는 것이 낫지 않을까[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극찬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도온고풍(道蘊高風)
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이 눈 내리는 날에 자질(子姪)들을 모아 놓고 분분한 백설(白雪)을 형용해 보라고 하자, 형의 아들인 호아(胡兒)가 “소금을 공중에 뿌려 놓은 듯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형의 딸인 도온(道蘊)이 “그것보다는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未若柳絮因風起].”고 하자, 사안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도옹(陶翁)
이황(李滉)의 또 다른 호이다.
도와(陶瓦)
오지기와
도외시(度外視)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한다.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이다.
도요(桃夭)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이다. 그 시에 “싱싱한 복숭아나무, 꽃이 활짝 피었도다. 그녀 시집감이여, 집안 살림 잘 하리라[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라고 하였는데, 보통 원만하게 이루어진 혼례(婚禮)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도요저(都要渚)
김해(金海)ㆍ밀양(密陽)의 경상(境上)에 있다. 이곳 주민 수백여 호는 대대로 생선 장사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 음란한 짓을 한 부녀자가 있어 그의 집을 파서 방죽을 만들고, 그녀는 배에 실어 강에 띄워서 내쫓았다.
도원(道員)
관명(官名). 청(淸) 나라 때 절강성(浙江省)ㆍ복건성(福建省)에 전운사(轉運使) 한 명씩을 두었었는데 뒤에 도원(道員)이라 개칭(改稱)하였다.
도원(道源)
김세렴(金世濂)의 자(字)이다. 광해군 9년(1617) 사간원 정언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자들을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반정(反正) 뒤에 다시 기용되고 나서 인조 11년(1633)에 공신(功臣) 이귀(李貴)가 이조 판서로 방자하게 자천(自薦)하는 것을 상소하였다가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정경세(鄭經世)는 그를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 하였고, 김류(金瑬)는 ‘진학사(眞學士)’라고 칭송하였다.
도원(桃源)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하는데, 그 도화원기에 의하면 어부(漁父)가 뜻밖에 가게 된 별경(別境), 즉 도화원에는 옛날 진(秦) 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六
도원(陶園)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전원(田園)을 가리킨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전원에 장차 풀이 우거지리니 어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빌려온 말이다.
도원가(桃源歌)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의 어부(漁父)가 길을 잃고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올라가니, 산에 구멍이 뚫려져 있어 들어간즉 전부가 복숭아꽃이요, 촌락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진(秦)나라 때에 모진 정치를 피하여 들어온 사람들로 6백 년이 되도록 바깥 세상과 교통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하였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중국 촉(蜀)나라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일찍이 도원(桃園)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어 의형제를 맺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도원경(桃源境)
무릉도원처럼 속세를 떠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도원국(陶園菊)
진(晉) 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이 뜻이 고상하여, 전원(田園)에 돌아가 유유자적할 생각으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는데, 거기에 “내 전원이 묵어가는데 왜 돌아가지 않으랴……삼경(三徑)이 다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그대로 있구나.”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연명집(陶淵明集)』
도원도(桃源圖)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 용(溶)이 꿈에 무릉(武陵)도원(桃源)에 놀아본 경치를 명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명화(1447).
도원량(陶元亮)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또 다른 자가 원량(元亮)이다.
도원송죽황삼경(陶園松竹荒三逕)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逕)은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남아 있도다.” 하였다. 삼경이란,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문정(門庭)에 세 길을 내고 송(松)ㆍ국(菊)ㆍ죽(竹)을 심었다 한다.
도원자(桃源子)
진(晉)의 도잠(陶潛)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썼는데, 그 내용이 무릉(武陵)의 어부가 진(秦)나라 난리를 피하여 도원(桃源)을 찾아 들어간 것을 기록하였다.
도위(都尉)
관직명.
도위(陶衛)
도읍(陶邑)에 봉지(封地)를 받고 왕실에 버금가는 부(富)를 차지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 나라 대신 위염(魏冉)과, 진 나라를 부강케 했던 위앙(衛鞅) 즉 상앙(商鞅)으로, 풍부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도위(都尉)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진 박미(朴瀰), 즉 중연(仲淵)을 말한다.
도위방미(都尉厖眉)
도위는 안사(顔駟)로, 한 나라 때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한 무제가 연(輦)을 타고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안사의 머리가 희고 눈썹이 희끗희끗한 것을 보고는 “노인네는 어느 때에 낭관(郞官)이 되었으며, 어찌 그리 늙었는가?”하자, 답하기를, “신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되었는데, 문제는 문(文)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무(武)를 좋아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서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얼굴이 못생겼으며, 폐하께서 즉위하여서는 나이 어린 자를 좋아하였는데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때문에 3대토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낭관으로 늙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감동해서 회계 도위(會稽都尉)로 발탁하였다. 『문선(文選)』 張衡 思賢賦
도유(陶劉)
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으로, 둘 다 술을 즐겼다.
도유(都兪)
‘아름답게 여기는 찬사’를 말한다.
도유비(道猶肥)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선왕(先王)의 도의(道義)와 부귀의 영예(榮譽)가 가슴속에서 싸우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수척하였는데, 지금은 선왕의 도의가 이겼기 때문에 이렇듯 통통하게 살이 찌게 된 것이다[先王之義則榮之, 出見富貴之樂又榮之, 兩者戰於胸中, 未知勝負, 故臞 . 今先王之義勝, 故肥].”는 말이 나온다.
도유우불(都兪吁咈)
도는 찬미하는 말이고, 유는 동의하는 말이고, 우는 동의하지 않는 말이고, 불은 반대하는 말이다. 본디 요, 순, 우 등이 조정에서 정사할 때에 쓰던 말인데, 후대에는 군신간에 온화한 모습으로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도유우불제(都兪吁咈際)
모두 대답하는 말인데, 도는 감탄사로 ‘아아’의 뜻이며, 유(兪)는 승낙하는 말이며, 우(吁)는 부정하는 말로 ‘아니아니’의 뜻이며, 불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말이다. 이것은 모두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원만한 의견 교환을 말한 것이다.
도유유취향(陶劉遊醉鄕)
술을 즐기는 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을 말하는데, 당 나라 왕적(王績)이 지은 취향기(醉鄕記)에 이 사람들이 취향에 놀았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이다. 자(字)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星州).
도은거(陶隱居)
도홍경(陶弘景)을 말한다. 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도의비(道義肥)
옛날 자하(子夏)가 선왕(先王)의 의리와 세속의 부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의리의 마음이 승리를 거두면서 살이 찌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
도의산(陶猗産)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재산. 도주공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여(范蠡)의 변명(變名)으로, 화식(貨殖)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세 번이나 천금(千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으며, 의돈은 도주공에게 상술(商術)을 배운 뒤 목축업으로 거부(巨富)가 되었다. 『사기(史記)』 「화식전(貨殖傳)」
도이부인사(悼李夫人辭)
이 부인을 슬퍼한 노래. 이 부인은 이연년(李延年)의 동생으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해 한 무제의 사랑을 받더니, 얼마 안가서 요절하게 되자, 무제가 그녀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 놓고 잊지 못해 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
도입천요(道入天寥)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전환에 자연스러워 조화가 함께 돌아가므로, 적정한 데 들어 하늘과 더불어 일체가 된다.”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도자왜(屠子倭)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이다.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도잠(陶潛)
진(晉)의 처사(處士)로 41세 때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윗사람의 제재가 싫고 전원(田園)이 그리워 재직한 지 80일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연명집(陶淵明集)』 文 「귀거래사 자서(歸去來兮辭 自序)」
도잠건(陶潛巾)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뜻이 매우 고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와 야인(野人) 옷차림에 갈건(葛巾)을 쓰고 다녔는데, 술자리를 만나면 문득 갈건을 벗어 가지고 술을 걸러 마시고 술이 다하면 다시 쓰곤 했다 한다. 『송서(宋書)』 「은일전(隱逸傳)」
도잠녹주(陶潛漉酒)
도잠(陶潛)이 머리에 갈건(葛巾)을 썼다가 술이 익으면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서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머리에 썼다.
도잠오류문(陶潛五柳門)
도잠(陶潛)은 진(晉)의 고사로 자는 원량(元亮). 일찍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어 자신을 말하였는데 여기에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집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는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했다[先生不知何許人,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하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ㆍ『도정절집(陶靖節集)』
도잠오작비(陶潛悟昨非)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오늘이 옳았고 어제까지가 글렀음을 깨달았다[覺今是而昨非].” 하며 자신의 용퇴(勇退)를 자축했다.
도잠취(陶潛趣)
거문고는 없어도 취미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인 도잠(陶潛)은 거문고의 음절을 본디 모르는데 항시 줄 없는 거문고를 하나 두고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면 그 줄 없는 거문고를 만지며 노래하기를 “거문고의 취미만 알면 되는 것인데 어찌 수고롭게 줄을 타랴.”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九十四 「도잠전(陶潛傳)」
도장(道漿)
도가(道家)에서 먹는 장물이란 뜻으로 술에 대한 은어.
도장경(屠長卿)
장경은 명(明) 나라 문인 도륭(屠隆)의 자(字)이다. 그는 희곡(戱曲)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고반여사(考槃餘事)ㆍ유구잡편(游具雜編) 등이 있다.
도장벽지전(叨將璧至前)
밤에 야광주(夜光珠)가 창졸히 앞에 닥치면 사람들이 놀랜다. 『사기(史記)』 「노중연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도재귀(倒載歸)
술에 크게 취하여 곤드레만드레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이 술을 매우 즐겨 항상 주식(酒食)을 싣고 못 위(池上)에 떠서 진탕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돌아오므로, 그때 아이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느뇨, 고양지로 나가는구나. 해 저물면 거꾸로 실려와서, 잔뜩 취해 정신이 없다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茗艼無所知].” 하였다. 『진서(晉書)』 卷四十三 「산간전(山簡傳)」
도재산공(倒載山公)
산공은 진(晉)의 산간(山簡)을 이른다.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그 곳 토호(土豪)인 습씨(習氏)의 아름다운 원지(園池)에 가 허다히 취해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밤낮 거꾸로 실려 돌아가면서, 푹 취해 아무 물정 모르네.” 하였다. 『몽구(蒙求)』
도재제패(道在稊稗)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도는 어디에도 있어서, 돌피와 가라지에도 있다.” 하였다.
도저(道樗)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크기만 했지 옹이투성이라서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절(陶節)
도잠(陶潛)의 정절. 진(晉)의 도잠(陶潛)은 뜻이 고결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팽택령(彭澤令)으로 부임한 지 80여일 만에 차고 있던 인끈을 풀어 던지고 전리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 자기 뜻을 나타냈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음. 『진서(晉書)』 卷九十四
도정몰와부(跳井沒蛙跗)
『장자(莊子)』 「추수(秋水)」, 「소요유(逍遙遊)」에 “메워진 우물의 개구리는 발등이 겨우 덮일 만한 물을 갖고도 자신의 즐거움으로 여긴다[且夫擅一壑之水, 而跨跱埳井之樂].” 하였다.
도정절(陶靖節)
정절(靖節)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시호(諡號). 그는 팽택 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왔는데,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 하후자(夏侯孜)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는 호학(好學).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있었는데, 당사(堂史)가 서명(署名)을 하다가 하후자의 품안에 넘어져 죽었으므로 이때문에 파직을 당하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ㆍ『신당서(新唐書)』
도제(荼薺)
씀바귀와 냉이
도조(刀俎)
단두대와 칼
도조(屠釣)
우양(牛羊)을 도살(屠殺)하는 일이나 물고기를 낚는 일을 말한 것으로, 즉 비천(卑賤)한 사람의 일을 이른 말이다.
도종의(陶宗儀)
자는 구성(九成), 호는 남촌(南村).
도주(陶鑄)
도주의 도(道)는 범토(笵土)를 이름이요, 주(鑄)는 주금(鑄金)을 이름이니, 다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재를 만들어내는 뜻으로 쓰여졌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요순(堯舜)을 도주(陶鑄)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 질그릇의 형상을 만들 듯이, 무쇠 그릇 만드는 사람이 무쇠를 녹여 부어서 무쇠 그릇을 만들 듯, 그 사람을 교양하여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도주(盜酒)
『진서(晉書)』 「필탁전(畢卓傳)」에 “필탁이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으면서 늘 술에 젖어 직사(職事)를 폐기하였었는데, 하루는 이웃집 동료 낭(郞)의 집에 술이 익자 탁이 취한 김에 가서 술을 훔쳐 마시다가 관리자에게 붙잡혔다. 주인이 아침에 보니 필 이부(畢吏部)였으므로 포박을 풀어 주고 같이 술을 마셨다.” 하였다.
도주(道州)
청도(淸道)의 고호이다.
도주(陶朱)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월(越)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던 것을 범려(范蠡)라는 사람이 힘과 충성을 다하여 강국을 만들고, 원수인 오(吳) 나라를 정복한 뒤에 자기는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 강과 호수로 떠나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이름을 고치고 목축업에 전심하여 다시 큰 부호가 되었다.
도주공(陶朱公)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 나라 사람인 범려(范蠡)의 변명(變名)이다. 범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서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구천의 사람됨이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안락은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배를 타고 제(齊) 나라로 가서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 금이나 모았다. 제 나라에서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정승을 삼고자 하자, 그는 다시 모았던 재물을 다 흩어 나누어 준 다음 도(道)로 가서 도주공이라고 자호하고는 또다시 수천만 금의 재물을 모았다. 『사기(史記)』 卷一百二十九 「화식열전(貨殖列傳)」
도주공(圖周公)
무제가 늙어서 어린 아들 불릉(弗陵)을 장차 후계자(後繼者)로 삼으려 하여 신하 중에 가장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곽광(霍光)에게 불릉을 부탁하려고 화공(畵公)을 시켜 옛날 주공(周公)이 어린 임금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조회 받는 그림을 그려서 곽광에게 주었다.
도주노도(陶朱老饕)
도주(陶朱)는 도주공(陶朱公)의 준말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 나라 대부 범려(范蠡)의 별칭이다. 월왕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道)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巨金)을 벌어 번번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卷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도주몽(刀州夢)
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집의 대들보 위에 칼 세 자루가 매달려 있는 데다 다시 칼 한 자루가 더 매달리는 꿈을 꾸고는 흉조(凶兆)라고 여기었다. 이의(李毅)가 이를 해몽하기를, “삼도(三刀)는 주(州) 자가 되고, 거기다 또 칼 한 자루가 더해졌으니, 당신께서는 익주(益州)를 맡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왕준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다. 『진서(晉書)』 卷42 「왕준열전(王濬列傳)」
도주민(道州民)
도주(道州)의 백성들에 대해 읊은 시의 제목. 백장경집(白長慶集) 풍유(諷諭)에 보인다.
도주시구(道州詩句)
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양성(陽城)이 직간(直諫)을 했던 관계로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좌천되었을 적에 매우 선정을 베풀어 큰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백거이(白居易)가 도주민(道州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양성의 선정을 크게 격찬한 것을 가리킨다. 『당서(唐書)』 一百九十四,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 卷三
도주의돈부(陶朱依頓富)
도주공과 의돈의 부유함이라는 말로, 단한 부자를 뜻하는 고사성어다.
도주지부(陶朱之富)
도주공(陶朱公)의 부(富)란 뜻으로 큰 부를 일컫는 고사성어다.
도죽(桃竹)
대(竹)의 일종인데, 일명 도생(桃笙)이라고도 한다.
도증주인(盜憎主人)
도둑은 주인이 밉게 마련이다. 즉 자기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다.
도지신서(桃枝神荼)
신서는 악귀(惡鬼)를 물리치는 신(神). 『산해경(山海經)』에 “창해(滄海)의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뻗은 가지를 귀문(鬼門)이라 하여 모든 귀신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며, 이 위에 신서(神荼)ㆍ울률(鬱壘)이라 하는 두 신이 있어 나쁜 귀신을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하였다.
도진(島鎭)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의 철산(鐵山) 가도(椵島)에 개설했던 군진(軍鎭)을 말한다.
도진(道眞)
무릉도원을 처음 찾아 들어갔다는 어부 이름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도처사(陶處士)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은 국화를 아주 좋아하였다.
도처선화당(到處宣化堂)
가는 곳마다 대접을 잘 받음을 이르는 말이다.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가 사무를 보는 정당(政堂)을 말한다.
도척(刀尺)
‘포목을 마르고 잰다’는 뜻으로, ‘의복의 재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 인용: 白紵行(체제공)
도척(盜跖)
춘추시대(春秋時代),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도척포인간(盜跖飽人肝)
“옛날 도척이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간(肝)을 꺼내어 회(膾)를 쳐서 먹으며 천하를 횡행했다[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는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도천지수(盜泉之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자(盜字)가 들어있는 이름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는 말로,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도철(饕餮)
탐욕스럽고 잔인하다는 전설상의 악수(惡獸)를 말한다. ‘탐욕’에 대한 비유어로 쓰인다. / 인용: 放璚閣外傳 自序(박지원)
도첩(度牒)
고려와 조선 시대, 관청에서 발행하여 중의 신분을 공인해 주던 증명서로 이것을 받으면 모든 조세와 부역을 면제 받게 된다. / 인용: 表忠觀碑(소식)
도청도설(道聽塗說)
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말한다. 말을 들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말해 버림. 또는 근거 없이 나도는 소문.
도총부산행(都摠府山行)
도총부에서 번(番)드는 군사들의 군장(軍裝)을 점검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군사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것.
도출신구부(圖出神龜負)
복희씨(伏羲氏)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 황하(黃河)에선 용마(龍馬)가 도(道)를 지고 나타나고, 낙수(洛水)에선 신구(神龜)가 서(書)를 지고 나왔다 한다.
도출천하언(圖出天何言)
하늘이 직접 말하지 않고 하도(河圖)를 나오게 하여 역학(易學)을 알려 주었다.
도탄(塗炭)
진흙과 숯불. 전하여 몹시 더러운 곳을 말한다.
도탄지고(塗炭之苦)
진구렁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듯한 고통. 가혹한 정치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당하는 심한 고통.
도퇴교(桃椎屩)
당 나라 주도퇴(朱桃椎)가 산 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신당서(新唐書)』 卷一百九十六 「주도추전(朱桃椎傳)」
도투(挑鬪)
도발하여 싸우다.
도팽택(陶彭澤)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로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던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포석(陶匏席)
도포는 뚝배기와 바가지로, 조촐하고 검소한 술자리를 말한다.
도필(刀筆)
① 문서(文書)나 기록하는 하급 역리(役吏)를 가리킨 말이다.
② 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 대쪽에 문자를 기록하던 붓과 그 틀린 것을 깎아내던 칼. / 인용: 題深院(조신)
도필리(刀筆吏)
칼이나 붓을 다루는 낮은 관리.
도하상(渡河象)
하수를 건너는 향상(香象)을 이른다. 열반경(涅槃經)에 “저 급히 흘러가는 하수에 능히 코끼리가 떠가는 것 같다[如彼駃河 能漂香象].”하였고, 전등록(傳燈錄)에는 “부처 곁에 함께 있어 듣고 이야기한 똑같은 법에도 증(證)한 바가 천심이 있어 비하자면 토끼ㆍ말ㆍ코끼리 세 짐승이 하수를 건너는데 토끼는 건너면 뜨고 말은 절반이 빠지고 코끼리는 철저히 흐름을 끊고 가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문자를 철저히 평하는 데 인용하여 쓴다.
도해(蹈海)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는 뜻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그가 조(趙) 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 나라 군대가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 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 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 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 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사기(史記)』 卷十八
도해(倒薤)
서법(書法)의 일종이다.
도해고절(蹈海高節)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蹈東海而死].”고 말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도해지(渡海枳)
남쪽에서 자라는 귤을 청수(淸水)와 회수(淮水)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도행(跳行)
글을 쓸 때에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구절(句節)은 평두(平頭)보다 한 자 또는 두어 자쯤 높이 올려서 쓰는 것을 말한다.
도행역시(倒行逆施)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한다. 곧 도리(道理)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말한다.
도헌(都憲)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의 별칭이다.
도현(道玄)
당(唐) 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가리키는데, 불화(佛畫)와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화성(畫聖)으로 알려졌다.
도협(倒峽)
두보(杜甫)의 시에, “시의 수원(水源)은 삼협물을 거꾸로 한 듯”이란 글귀가 있는데, 삼협은 양자강(揚子江) 상류(上流)의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이다.
도형인(禱衡人)
당 나라의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한유의 알형악묘시(謁衡嶽廟詩)에 “내가 정히 가을 비 내리는 계절을 만나 음기만 깜깜하고 맑은 바람 없기에 조용히 맘속으로 기도해 응험이 있었으니 어찌 정직으로 감동시킴이 아니리오. 잠시 후엔 음기 걷히고 뭇 봉우리 나와서 우뚝히 하늘 괴는 높은 산을 우러러보네[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黙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掃盡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한 데서 온 말로, 즉 한유는 성심으로써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했다는 것이다.
도혜(桃蹊)
복사꽃 길은 “복사꽃과 오얏꽃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下自成蹊].”는 도리성혜(桃李成蹊)의 고사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사기(史記)』 卷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贊
도호극시(桃弧棘矢)
도호(桃弧)와 극시(棘矢)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 극시는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 옛날에 피사(避邪)의 도구로 쓰였음. 『좌전(左傳)』 소공(昭公) 4년 조(條)에, “唯是桃弧棘矢以除其災”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 ‘桃弓棘箭所以禳除凶邪 將御至尊故也’라 하였다.
도홍(陶泓)
벼루를 가리킨다. 한유(韓愈)가 붓ㆍ먹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쓴 「모영전(毛穎傳)」에 보인다.
도홍경(陶弘景)
① 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1만권의 서적을 독파하였고 금기(琴棋)ㆍ도술ㆍ음양ㆍ오행 등에 밝았다.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본초(本草)에 주를 달고 혼천상(渾天象)을 만들었으며 제대연력(帝代年歷)등의 저술이 있다. 특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하여 뜨락 가득 소나무를 심고는 매번 그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였다. 『남사(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② 양(梁) 나라 사람. 자는 통명(通明). 호는 화양은거(華陽隱居), 또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시호는 정백선생(貞白先生). 젊었을 때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의 뜻을 품음.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한다.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였다. 또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지리(地理)ㆍ의술(醫術)ㆍ본초(本草)에 정통하였다.
도화랑(桃花浪)
복숭아꽃이 필 때 시냇물이 불어나서 위로 오르는 물결이다. 도화랑이 일 때면 용문(龍門)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데 넘으면 용이 되며 용이 될 때에는 우레가 고기의 꼬리를 불태워 없앤다고 한다.
도화미(桃花米)
오래 묵어서 붉게 변질된 쌀을 이른다.
도화부인(桃花夫人)
식후(息侯)의 부인인 식위(息嬀)를 말한다. 식위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채 애후(蔡哀侯)의 충동에 의하여 초왕(楚王)이 식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위를 빼앗았다. 식위는 초왕과 살면서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말을 않고 살므로 초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전(左傳)』 莊公 十四年
도화수(桃花水)
3월 경 복숭아꽃이 필 무렵에 얼음이 풀려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말한다.
도화수(桃花水)
북제(北齊) 때에 노사심(盧士深)의 처 최씨(崔氏)가 복숭아꽃으로 아이의 낯을 씻으면서 빌기를, “붉은 꽃과 흰 눈(白雪)으로 아이 낯을 씻어 곱고 빛나게 한다.” 하였다.
도화수창(桃花水漲)
복사꽃 필 무렵 불어난 봄 강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화원수(桃花源水)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부가 복사꽃 떠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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