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우
우(禹)
하(夏)의 개국 군주로, 아버지를 이어 홍수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순(舜)을 잇는 천자가 되었다.
우각가(牛角歌)
빈궁한 선비가 벼슬을 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영척(甯戚)이 소의 뿔을 두드리면서(扣牛角) 노래를 불러 제 환공(齊桓公)의 상경(上卿)이 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우각간전사(牛角看前史)
당(唐) 나라 이밀(李密)이 소(牛) 등에 타고 쇠뿔에다 『한서(漢書)』를 걸어놓고 돌아다니면서도 읽었다 한다. 『당서(唐書)』 「이밀전(李密傳)」
우각상상가(牛角上相歌)
춘추(春秋) 때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제 환공(齊桓公)에게 발탁되어 정승이 된 고사이다.
우각횡경(牛角橫經)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서도 책을 틈틈이 보는 것을 말한다.
우강(禺强)
북해(北海)의 신(神)으로 현명자(玄冥子)라고도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오산(五山)의 뿌리가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리저리 옮겨다니자 선성(仙聖)이 상제(上帝)에게 하소하니 상제는 우강을 명하여 붙여 있게 하였다.” 한 말이 있다. 전하여 북쪽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강(牛岡)
장사 지내기에 좋은 땅을 말한다. 진(晉) 나라 도간(陶侃)이 어려서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선인(仙人)이 가르쳐 준 대로 소가 졸고 있는 산언덕(牛眠山)에 장사 지낸 뒤로부터 집안이 흥성했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주방전(周訪傳)」
우강해상삼(禺强海上三)
우강(禺强)이란 신(神)이 바다 위의 세 산을 옮겼다 한다.
우개(羽蓋)
깃으로 만든 일산(羽蓋)인데, 한(漢) 나라 승상(丞相) 왕상(王商)이 두 개를 세웠다.
우객(羽客)
도사(道士)의 병칭.
우거(牛車)
불교에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도(菩薩道)를 비유한 것이다.
우거(右渠)
조선(朝鮮)의 우거왕(右渠王) 때 한 무제(漢武帝)가 침입하여 항쟁하였다.
우격(羽檄)
격문(檄文)은 군사상 공문을 말함인데 그 격문에 새의 깃을 꽂으면 급한 공문이라는 표시가 되었으므로 우격(羽檄)이란 말이 생겼다.
우격(羽翮)
새의 날개인데, 전하여 ‘세자(世子)를 보좌할 우익’의 뜻으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여후(呂后)가 낳은 태자(太子)를 폐하고 척 부인(戚夫人)이 낳은 여의(如意)로 태자를 바꾸려 할 때 상산사호(商山四皓)인 동원공(東園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이 여후가 낳은 태자를 끝까지 보호하여 바꾸지 못하게 하니, 한 고조가 척 부인을 위로하여 노래하기를 “홍곡이 높이 날면 대번에 천리를 가는데, 우격이 이미 이루어져서 사해를 횡단하는지라, 사해를 횡단하니 어찌할 수 없도다[鴻鵠高飛 一擧千里 羽葆已就 橫絶四海 橫絶四海 當可奈何].”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우경(耦耕)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밭을 가는 것. 은거(隱居)하여 농사짓는 것을 말하는데,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우경했다.” 하였다.
우경(虞卿)
전국(戰國) 때 변사(辯士)로 조 효성왕(趙孝成王)에게 유세하여 상경(上卿)이 되었으나, 뒤에 친구인 위(魏)의 승상 위제(魏齊)를 돕기 위하여 정승의 지위도 버리고 양(梁)으로 도망쳐 온갖 고생을 다해가며 8편의 책을 저술하여 국가의 득실(得失)을 풍자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 책을 우씨춘추(虞氏春秋)라고 한다.
우경대협연쌍벽(虞卿大俠捐雙璧)
의협심(義俠心)이 아주 강함을 말한다. 우경(虞卿)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세객(遊說客)인데, 조왕(趙王)은 그를 한 번 만나 보고 매우 좋아하며 황금 1백 일(鎰)과 백벽(白璧) 한 쌍을 주었고, 두 번 만나자 상경(上卿)으로 삼았고, 세 번 만나자 정승으로 삼고 만호후(萬戶侯)로 봉했다. 이때 위제(魏齊)가 진(秦) 나라 범수(范睢)에게 죄를 얻고 피신하여 조(趙) 나라에 숨어 있는데, 진왕(秦王)이 범수를 위하여 조왕에게 위제를 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므로 위제가 우경에게 찾아가 구해달라고 애원하자, 우경은 백벽과 정승자리를 내던지고 위제와 함께 도망하였다. 『사기(史記)』 卷七十六 「우경전(虞卿傳)」, 卷七十九 「범수열전(范睢列傳)」
우경송위제(虞卿送魏齊)
자신의 일처럼 마음속 깊이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위(魏) 나라의 정승 위제(魏齊)가 진(秦) 나라 정승이 된 범수(范睢)와의 악연(惡緣) 때문에 궁지에 몰려 조(趙) 나라에 왔을 때, 당시 정승으로 있던 우경(虞卿)이 그의 딱한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인끈을 풀어놓고 함께 도망쳐 신릉군(信陵君)을 찾아갔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범수열전(范睢列傳)」
우경쌍벽(虞卿雙璧)
우경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유세(游說)하던 사람으로서 조 효성왕(趙孝成王)을 설득하여 대번에 황금 백일(黃金百鎰)과 백벽 일쌍(白璧一雙)을 하사받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76 「우경열전(虞卿列傳)」
우경저술위궁수(虞卿著述爲窮愁)
전국시대(戰國時代) 우경(虞卿)이 양(梁) 나라에서 곤경에 처해 실의에 빠졌을 때 국가의 득실을 논한 이른바 우씨춘추(虞氏春秋) 8편을 저술하였는데, 이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이 “우경이 만약 궁수(窮愁)에 처하지 않았다면, 글을 지어 후세에 자기를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한 말이 있다. 『사기(史記)』 卷76 「우경열전(虞卿列傳)」
우계(愚溪)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적거(謫居)했던 곳으로, 계곡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된 호남의 남부 지방을 말한다.
우계(牛溪)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혼(成渾; 1535~1598)의 호이다. 그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초기에 선조(宣祖)가 몽진(蒙塵)길에 올라 임진강을 건너는데, 그의 집이 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나와 보지 않았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좋지 않게 평하였다.
우계간우부문덕(虞階干羽敷文德)
우순씨(虞舜氏)가 문덕(文德)을 크게 발휘하여 양 섬돌 사이에서 무무(武舞)인 간무(干舞)와 문무(文舞)인 우무(羽舞)를 춤추니 70일째 되는 날 유묘(有苗)가 감화되어 귀의했다고 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우계무간우(虞階舞干羽)
우순(虞舜)이 유묘(有苗)를 토벌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돌아와서 덕을 닦으며 궁중 뜰에서 간우(干羽)의 춤을 추니 70일 만에 유묘가 와서 항복하였다.
우계우덕부(虞階禹德敷)
우 나라 뜰에 우의 덕이 퍼지다. 무력을 쓰지 않고도 문치(文治)가 잘 되어 감. 우(禹)가 순(舜)의 명을 받아 유묘(有苗)를 정벌하였으나 한 달이 되도록 그곳 백성들이 명을 거역하고 있었으므로 익(益)이 우에게 권하여 싸움을 중지하고 덕을 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는 그의 말대로 포위를 풀고 반사(班師)한 다음 두 쪽 뜰에서 춤을 추면서 문덕(文德)을 폈었음.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우곡(愚谷)
깊은 산골에 오래도록 은거할 것을 상징한 말로, 옛날 우공이란 사람이 태항산(太行山)을 향하여 깊은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앞에 큰 산이 있어 생활의 불편함을 느낀 나머지, 자손 대대에 걸쳐서라도 이 산을 꼭 파내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하자, 신(神)이 그의 집념에 감동하여 마침내 그 산을 옮겨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이때문에 그 골짜기를 우공의 골짜기라고 한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우곡(紆曲)
모퉁이 굽은 구석
우곡(愚谷)
우공곡(愚公谷)을 이른다.
우공(寓公)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우거하는 임금을 가리킨 말이다.
우공(禹貢)
우(禹)는 자기 거처하는 집도 낮게, 음식과 의복도 박하게 하여 검소를 본분으로 하였으나 그가 「우공(禹貢)」에서 지방 조세를 정하면서 태산 골짜기의 토산물로는 명주실ㆍ모시ㆍ납ㆍ괴석을 그 지방 공물(貢物)로 정하였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우공(禹貢)
중국 국토를 아홉 주로 나누어 각 구역의 산천 분포와 교통, 물산의 상황이며 공부(貢賦)등급에 관한 것까지 기술한 상서(尙書) 하서(夏書)의 편명으로, 중국의 국토를 의미한다.
우공가도(虞公假道)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진(晉) 나라의 순식(荀息)이 진 나라의 굴(屈) 땅에서 나는 말 네 마리를 우(虞) 나라에 주고 괵(虢) 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공이 말을 탐내어 길을 빌려 주고서 진 나라의 선봉이 되어 괵 나라를 쳤는데, 괵 나라가 함락된 뒤에 우 나라도 진 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僖公 2年
우공고문(于公高門)
한(漢) 나라 우공(于公)이 지방 관리로 옥송(獄訟)을 공평하게 처리하면서 그 음덕(陰德)으로 집안을 일으킬 자손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대문을 높이 만들어[高門] 달았는데, 과연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의 지위에 올랐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
우공곡(愚公谷)
옛날 우공이라는 사람이 높은 산을 정면으로 향하여 집을 짓고 살다가 산북(山北)의 꽉 막힘과 출입하기 불편함을 싫어하여, 자신이 다 못하면 자손 대대로 이어가면서까지 이 산을 딴 곳으로 옮기기로 계획하고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니, 산신(山神)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 산을 옮겨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우공문(于公門)
‘음덕 있는 집안의 자손은 번창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우공문호(于公門戶)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음덕(陰德)을 쌓았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우공(于公)이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자손 중에 가문을 크게 일으킬 자가 나오리라고 예기(豫期)하고 고관(高官)의 수레가 통과할 수 있도록 집 대문을 크게 만들었었는데, 과연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의 지위에 올랐던 고사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 卷71
우공서(禹貢書)
우공(禹貢)은 『서경(書經)』의 편명.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다음 구주(九州)의 공부(貢賦)를 정한 내용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란 사람이 산을 옮김. 어떤 어렵고 큰 일이라도 사람이 뜻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센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우괴자(迂怪子)
신선에 대해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뇌까리는 방술사(方術士)들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봉래(蓬萊)의 선인 안기생(安期生)을 찾다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해변에 거하는 연 나라와 제 나라의 괴탄스러운 방사들이 찾아와서 신선에 대한 이야기를 뇌까리기 시작하였다.” 하였다.
우괵시감(虞虢是監)
우와 괵이 거울이다. 춘추(春秋) 때에 진후(晉侯)가 우(虞)에게 길을 빌어 괵(虢)을 멸하고 나서 군사를 돌이켜 오는 길에 또 우를 멸했다.
우교(羽郊)
우산(羽山)의 교외. 『국어(國語)』 「진어(晉語)」 八에서 “昔者鯀違帝命, 殛之于羽山.”이라 하고, 『초사(楚辭)』 천문(天問)에서 “[鯀]永遏在羽山.”이라 했다.
우국충정(憂國衷情)
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
우군(右軍)
우군 벼슬을 지낸 진(晉) 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그는 중국 역사상 제일가는 명필가이다.
우군난정(右軍蘭亭)
우군은 진(晉) 나라 명필 왕희지(王羲之)인데 그가 일찍이 우군장군(右軍將軍)이 되었기 때문에 후세에서 왕희지를 일컬어 우군이라고 하였다. 난정기는 왕희지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난정집서(蘭亭集序)』
우군서(右軍書)
진 목제(晉穆帝) 때 계축년 3월 초에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王羲之)ㆍ사안(謝安) 등 당대의 명사 수십 명이 계사(禊事)를 치르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를 하며 풍류를 만끽했는데, 이때에 왕희지가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친히 짓고 쓰고 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우군은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를 가리킨다.
우군진적(右軍眞蹟)
우군(右軍)은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그가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해(楷)ㆍ행(行)ㆍ초(草)의 체(體)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행서의 난정서(蘭亭序)와 해서(楷書)의 악의론(樂毅論)이 유명한다.
우군풍류(右軍風流)
우군(右軍)은 진(晉) 나라 때 우군장군을 지낸 명필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당시 풍류가 높던 왕희지를 비롯하여 손작(孫綽)ㆍ사안(謝安) 등 명사 40여 명이 난정(蘭亭)에 모여 수계(修禊)를 하고, 곡수에 술잔을 띄워 마시고 시를 읊으며 즐겼는데, 이때 지은 시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고 왕희지가 그 서문을 썼는 바, 그 서문에 “비록 음악까지 연주하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읊는 것도 또한 그윽한 정을 펴기에 충분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난정집서(蘭亭集序)』
우군환아(右軍換鵝)
왕희지(王羲之)의 벼슬이 우군장군(右軍將軍)이었다. 그는 거위(鵝)를 좋아하였는데, 산음(山陰)의 도사(道士)가 여러 마리를 가졌으므로, 희지가 요구하니 도사가, “황정경(黃庭經) 한 벌을 써 주면 바꾸겠소.” 하므로 가서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는 거위를 농에 넣어 돌아왔다.
우기동조(牛驥同皁)
걸음이 느린 소와 천리마와 구유는 같다.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일컬어 비유한 말이다.
우내하(虞奈何)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곤경에 빠졌을 때에 밤에 일어나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기를,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건만, 때가 불리(不利)함이여, 오추마(烏騅馬)가 가지 않누나. 우(虞)야, 우야, 너를 어찌할까.” 하니, 우미인은 화답하기를, “대장께서 의기(意氣)가 다하였으니 천첩(賤妾)이 어찌 사오리까.” 하고 먼저 칼을 받아 자살하였다.
우담(愚潭)
숙종 때의 인물인 정시한(丁時翰)의 호이다. 그의 자는 군익(君翊), 본관은 나주(羅州), 언황(彦璜)의 아들로 강원도 원주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때 진선(進善)으로 있으면서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했다가 삭직되었고, 1696년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우담발화(優曇鉢花)
세상에 흔히 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범어(梵語)의 꽃 이름인데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고 한다.
우당(虞唐)
요순(堯舜)을 뜻한 것이다.
우도(牛刀)
무성(武城) 고을을 잘 다스리던 자유(子游)에게 공자가 농담으로 “닭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온 말로,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우도재무성(牛刀宰武城)
고을을 잘 다스림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그 곳에 가서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닭 잡는 데에 어찌 소잡는 칼을 쓰리오[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우도할계(牛刀割鷄)
큰 재능이 아주 작은 데에 쓰임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가서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잡는 칼을 쓰는고.” 하였다. 이것은 작은 고을에 큰 경륜을 베푼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우돌(牛堗)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를 뜻하는 듯하다.
우동(郵僮)
역마(驛馬)를 끄는 하인.
우동(尤侗)
청 나라 시인. 호는 서당노인(西堂老人). 우리나라의 풍물을 노래한 죽지사가 있다.
우두(牛斗)
28수(宿) 가운데 견우성(牽牛星)과 북두성(北斗星)을 가리킨다.
우두(牛頭)
① 『남사(南史)』 「하윤전(何胤傳)」에 “세상에서 전하기를 ‘진(晉) 나라에서 대궐을 건립하려고 할 때 왕 승상(王丞相)이 우두산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천궐(天闕)이다.」하였다.’ 했다.” 하였다.
② 전단향(栴檀香)나무가 서식한다는 인도의 산 이름
③ 춘천(春川) 북쪽의 산 이름이다.
우두기(牛斗氣)
칼 기운이 뻗쳐가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오(吳) 땅에 붉은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그곳을 파서 보검(寶劍)인 용천검(龍泉劍)을 얻었다고 한다.
우두황종(牛脰黃鍾)
우두는 쇠풍경. 진(晉) 나라 때 악관(樂官) 순욱(筍勖)이 조(趙) 나라 지방의 쇠풍경으로 황종(黃鍾)의 음을 고르게 조화시켰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악률 12율의 첫째를 황종이라 하는데, 모든 음의 기준음이다. 따라서 양기가 다시 발동하기 시작하는 11월을 말한다. 『진서(晉書)』 卷三十九 「순욱전(筍勖傳)」
우락(牛酪)
소의 젖.
우락능겸(憂樂能兼)
범희문(范希文)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에 높이 있을 때는 그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멀리 있을 때는 그 임금을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 즐거운가. 반드시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 後集
우렵(羽獵)
사냥할 때에 엽사(獵士)들이 날개 꽃힌 화살(羽箭)을 등에 지고 사냥하므로 우렵(羽獵)이라 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임금을 따라 장양궁(長揚宮)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우렵부(羽獵賦)를 지어 바쳤다.
우렵(羽獵)
임금의 수렵(狩獵)을 이른다. 임금의 수렵에는 우시(羽矢)를 짊어진 종자(從者)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우로은(雨露恩)
초목(草木)이 비와 이슬을 맞고 자라는 것과 같은 은혜다.
우록왕손초(又綠王孫草)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의 “왕손의 노닒이여 돌아가지 않고, 봄풀의 자람이여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에서 온 말로, 고향 땅을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말한다.
우륵(于勒)
가야금(伽倻琴)을 맨 처음 만들어 낸 신라 때의 악사(樂師)로 지금의 충주(忠州)에 살았는데, 지금 충주에 있는 탄금대(彈琴臺)와 금휴포(琴休浦)는 바로 그가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우릉불로두어척(羽陵不勞蠹魚剔)
「목천자전(穆天子傳)」에 “우릉에서 좀 먹는 책을 볕에 쬐었다.”는 말이 있다.
우린(于鱗)
명(明) 나라 문인 이반룡(李攀龍)의 자(字)이다. 반룡은 어려서 고아가 되고 집도 가난하였으나, 자라면서 시가(詩歌)를 좋아하고 훈고학(訓詁學)을 싫어하여 날마다 고문만을 읽었다 한다.
우림(羽林)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에 궁궐을 금위(禁衛)하는 군사를 우림(羽林)이라 하였다. 한(漢) 나라 때 처음 설치한 것으로 금군(禁軍)을 칭하는데, 깃처럼 빠르고 숲처럼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우림랑(羽林郞)
우림(羽林)은 관명(官名)으로 숙위(宿衛)와 시종(侍從)을 맡았던 관직이다.
우림령곡(雨淋鈴曲)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임금이 서촉(西蜀)에 행행(行幸)하여 맨 처음 사곡(斜谷)에 들어섰을 때 장마가 열흘 동안 계속되었는데 잔도(棧道) 안에서 빗방울 소리가 났다. 임금이 마침 귀비를 상념(傷念)하던 터라 그 소리를 취하여 우림령곡을 만들어 한을 나타냈다. 그때 이원 제자(梨園弟子)들 가운데 장야호(張野狐) 한 사람만이 필률(觱篥)을 다루었으므로 이 곡을 불게 하여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하였다.
우림성(羽林星)
천군(天軍)을 관장하는 장성(將星)이다.
우림천군(羽林天君)
우림(羽林)은 별 이름이다.
우마풍(牛馬風)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라는 뜻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4년 조(條)에, “그대는 북해(北海)에 있고 과인은 남해(南海)에 있으니, 이는 암내난 말과 소라서 미칠 수가 없는 것과 같네[風馬牛不相及].”하였다.
우맹(優孟)
초(楚) 나라 배우인 맹(孟)을 말한다. 손숙오(孫叔敖)는 초 장왕(楚莊王) 때의 어진 정승이었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워낙 빈곤하자, 우맹이 그를 구해줄 목적으로 손숙오의 의관(衣冠)을 차리고 초 장왕 앞에 나타나니, 초 장왕이 크게 놀라며 손숙오가 다시 살아온 것으로 여기고 그를 정승으로 삼으려 했었다는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卷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우맹의관(優孟衣冠)
우맹(優孟)은 명우(名優)인데, 초 장왕(楚莊王)을 섬겼다. 손숙오(孫叔敖)가 죽으니, 그 아들이 빈곤(貧困)하여 나무꾼이 되자, 우맹은 거짓 손숙오가 되어 그 의관을 착용하고 노래를 지어 불러 초장왕을 감동시켜서, 손숙오의 아들이 마침내 벼슬을 얻었다. 그래서 후세에 가장(假裝)을 들어 우맹의관(優孟衣冠)이라 칭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卷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우맹종비위오(優孟終非蔿敖)
가짜는 아무리해도 진짜만은 못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의 악공(樂工)인 우맹(優孟)이 해학과 기지가 대단했는데, 재상 위오(蔿敖)가 죽고 그의 아들이 매우 곤궁하게 되자 우맹이 위오의 생시 복장을 하고 일 년 이상이나 위오의 거동과 모습을 익힌 다음 장왕(莊王)을 찾아가 노래로써 왕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사기(史記)』 卷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우면(牛眠)
장사를 지낸 묘지를 말하는데, 진(晉) 나라 때 소가 누워서 잠자는 곳을 길지(吉地)라고 여겼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주방전(周訪傳)」
우면산(牛眠山)
후손에게 복이 돌아온다는 풍수(風水) 상의 길지(吉地)를 말한다.
우명(牛鳴)
오리(五里)의 가까운 지역을 이른다.
우명강추사기보(牛鳴絳樞師期報)
진 문공(晉文公)이 죽자, 곡옥(曲沃)에 초빈하기 위하여 강 땅에서 널을 운반하는데 소 우는 소리가 났다. 태복관(太卜官) 언(偃)은 대부로 하여금 절하게 하면서 “이것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서쪽에 있는 진(秦) 나라의 군대가 장차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것인데 우리가 공격하면 크게 승리할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하였다. 『좌전(左傳)』 僖公三十二年
우명앙(牛鳴盎)
소가 움 속에서 운다는 것은 곧 『관자(管子)』 「지원(地員)」에 “궁성(宮聲)을 들어보면 마치 소가 움 속에서 우는 것 같고, 각성(角聲)을 들어보면 마치 꿩이 나무에 올라가 우는 것 같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소식(蘇軾)의 청현사금시(聽賢師琴詩)에 “평생에 궁성과 각성은 알지를 못하고 소가 움 속에서 울고 꿩이 나무에서 우는 소리만 들었네[平生未識宮與角 但聞牛鳴盎中雉登木]”하였다. 『식우집(拭疣集)』 卷二ㆍ『소동파집(蘇東坡集)』 卷十二
우모봉연(牛某捧硯)
송(宋)의 석연년(石延年)은 자가 만경(曼卿)인데 주량이 대단했다. 작은 봉록(俸祿)으로 술을 실컷 마실 수 없다는 말을 자기 시우(詩友)인 중 비연(祕演)에게 말했더니, 비연은 곡식을 바치고 감부(監簿)가 된 우(牛)라는 부호를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번대사(繁臺寺) 근처 누각(樓閣)에다 술과 안주를 푸지게 차리게 하고는 석연년과 함께 그 누각에 올라 해가 지도록 마시며 즐겼다. 술에 취한 석만경은, 이러한 놀이에 기록을 남기지 아니할 수 없다 하여 큰 붓으로 쓰기를, “석연년 만경이 공문(空門)의 시우(詩友) 늙은 연(演)과 여기 올랐었다.” 했더니, 곁에 있던 그 우(牛)가, 자기도 그 속에 한몫 넣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차마 거절을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있던 만경이 한참 만에 붓을 들어 쓰기를, “우 아무가 벼루를 들고 있었다.(牛某捧硯)”하였다. 『상산야록(湘山野錄)』 卷下
우목빙(雨木冰)
뜻밖의 재변, 춘추(春秋) 성공(成公) 16년에 “봄, 왕정월(王正月)에 나무의 빗방울이 얼음으로 굳어 맺혔다[雨木冰].”하였는데,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에서 각각 “뜻밖의 재이(災異)를 기록한 것이다.” 하였다.
우묵하전(雨墨霞箋)
좋은 먹과 종이를 가리킨다.
우문고대(于門高大)
한(漢) 나라 때 우공(于公)이 옥송(獄訟)을 공평히 처리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문려(門閭)를 높여서 사마(駟馬)의 높은 거개(車蓋)가 드나들 수 있게 해야겠다. 내가 평소 옥사를 다스리면서 음덕을 많이 베풀었으니,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크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뒤에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丞相)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자기 자손이 잘되기를 기대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한서(漢書)』 卷七十一
우문허중(宇文虛中)
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통(叔通)이다. 송휘종(宋徽宗) 때 동관(童貫) 등이 여진(女眞)과 연합하여 거란(契丹)을 협공(夾功)하자고 건의하는 것을 그가 적극 반대하였으나 결국 듣지 않고 싸우다가 패한 적이 있었고, 송 나라가 남도(南渡)한 뒤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벼슬하다가 무함을 입어 온 가족이 불타 죽었다. 『송사(宋史)』 卷三百七十一
우문현답(愚問賢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
우물(尤物)
일품(逸品), 또는 미인(美人)의 뜻으로 쓰인다.
우미인(虞美人)
우미인초(虞美人草)로 양귀비초(楊貴妃草)이다.
우미인초(虞美人草)
가냘픈 꽃이 슬픈 듯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며 흔들거리는 모습. 우미인은 항우(項羽)의 애인으로 항우가 패하자 자살한 여인인데 그 무덤에서 붉은 예쁜 꽃이 피워 흐느적거렸다고 한다.
우발화(優鉢花)
우담발라화(優曇鉢羅花)의 약칭.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피는데, 그때에는 금륜왕(金輪王)이 세상에 나온다 한다.
우배평(右北平)
한(漢) 나라의 명장인 우북평 태수 이광(李廣)이 천하 무쌍의 장수라는 찬탄을 받은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이광전(李廣傳)」
우번(虞翻)
삼국시대 오(吳) 나라 여요(餘姚) 사람으로, 역리에 정통하여 역주(易注)를 저술하였다. 조정에서 바른 말을 잘 하다가 교주(交州)로 귀양가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일찍이 한탄하기를 “나는 골격이 부드럽지 못해 윗사람에게 대들어 죄를 받았으니, 해변에 영원히 묻혀 살아 생전에는 더불어 얘기를 나눌 자가 없고 죽어서는 파리가 조문객이 될 것이다. 천하에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더이상 유감이 없겠다.”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卷五十七 「우번전(虞翻傳)」
우번기(虞翻棄)
우번(虞翻)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인데,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손권(孫權)에게 자주 직간(直諫)을 하다가 그의 비위에 거슬리어, 늙은 나이로 교주(交州)에 방기(放棄)되어 있으면서 찾아온 수많은 문도(門徒)들에게 강학(講學)을 하고, 또한 저서(著書)에 힘쓰다가 70세의 나이로 그 곳에서 죽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卷五十七
우번박상(虞翻薄相)
우번은 삼국 시대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신하로, 거침없이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남쪽 변방으로 쫓겨갔는데, “나는 원래 골상이 아첨할 수 없게 되어서, 윗사람을 범한 나머지 이렇게 죄를 받고 해변 구석으로 쫓겨나 죽게 되었다[骨體不媚 犯上獲罪 當長沒海隅].”고 말한 고사가 있다. 『삼국지(三國志)』 卷57 「오서(吳書)」 우번전(虞翻傳)
우보(羽葆)
임금의 수레를 장식하는 것으로, 새의 깃으로 만든 화개(華蓋)이다.
우보상(羽葆桑)
우보는 임금의 수레에 덮는 일산. 유비(劉備)가 탁군(𣵠郡)에서 궁하게 살았는데, 그집 문 앞에 뽕나무가 우보(羽葆)의 모양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유비가 어릴 적에 아이들과 놀면서, “내가 장래 이런 일산으로 덮는 수레를 탈 것이다.” 하더니, 뒤에 과연 촉(蜀) 나라를 점령하여 황제가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유비전(劉備傳)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호이다.
우복서정(牛腹書呈)
귀신방(鬼神方)으로 한 무제의 총애를 받던 소옹(少翁)이 방술의 효력이 점점 없어지자 남 몰래 백서(帛書)를 소에게 먹이고는 한 무제를 속여 소를 잡아 백서를 꺼내게 해 자신의 신통력을 과시하려 했던 일을 말하는데, 이 위서(僞書) 사건으로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우부우부(愚夫愚婦)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 평범한 보통 사람들
우부유흔(禹斧留痕)
삼대(三代) 때 우(禹) 임금이 9년의 홍수(洪水)를 다스리면서 용문(龍門)을 파헤쳐서 물을 텄는데, 그때에 우 임금이 신부(神斧)를 사용하였다 한다.
우불(吁咈)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도는 찬미하는 말이고, 유는 동의하는 말이고, 우는 동의하지 않는 말이고, 불은 반대하는 말이다. 본디 요, 순, 우 등이 조정에서 정사할 때에 쓰던 말인데, 임금과 신하가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하여 조정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좋은 말은 찬성하고 부당한 말은 반대하는 소리를 말한다. 후대에는 군신간에 온화한 모습으로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우불복상기불파(牛不服箱箕不簸)
실용(實用)의 효과가 없이 헛된 이름만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환한 저 견우성은 짐수레를 끌지 못하도다 …… 남쪽에는 기성이 있으나 키질을 하지 못하도다[睆彼牽牛 不以服箱 …… 維南有箕 不可以簸].” 한 데서 온 말이다.
우불출두(牛不出頭)
옛날 이안의(李安義)라는 사람이 부자(富者)인 정생(鄭生)을 찾아뵙고 나오면서 그 정생의 문 위에다 크게 오(午) 자를 쓴 데서 온 말인데, 그것은 곧 ‘소가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牛不出頭].’는 뜻으로서 정생의 오만함을 풍자한 것이었다.
우비(禹碑)
하(夏) 나라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하던 때에 그 공(功)을 형산(衡山)의 주봉인 구루봉(岣嶁峯)의 석벽(石壁)에 새기어 이를 우비(禹碑)라고 전하는 데서 온 말이다.
우사(雨師)
비를 맡은 신(神)의 이른다. 곧 필성(畢星)을 가리킨다.
우사(虞師)
옛날에 산과 늪(山澤)을 맡아서 관장하던 직책으로, 짐승을 기르는 자를 가리킨다.
우사(右史)
임금의 언행(言行)의 기록을 맡은 벼슬. 기거주(起居注)와 같다.
우사단(雩祀壇)
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壇)이다. 사방이 40척이고, 구망(句芒), 축융(祝融)ㆍ후토(后土)ㆍ욕수(蓐收)ㆍ현명(玄冥)ㆍ우직(后稷)을 모셨다. 유월 상순에 제사를 드렸다.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부근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는데 선조(宣祖)때 명(明) 장수 진인(陳寅)이 세웠다고 한다. / 인용: 嬰處稿序(박지원)
우사생풍(遇事生風)
‘시비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우산(虞山)
우산종백(虞山宗伯)으로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을 말한다.
우산(羽山)
강소성(江蘇省) 동해현(東海縣) 서북에 있는 산 이름이다. 순(舜) 임금이 곤(鯀)을 처벌한 곳으로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崇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이라고 보이고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순이 순수를 행하다가 곤의 치수가 공적이 없음을 보고 이에 곤을 우산에서 사형에 처하여 죽였는데 천하는 모두 순이 곤을 죽인 것을 옳다고 여겼다[行視鯀之治水無狀, 乃殛鯀於羽山以死, 天下皆以舜之誅爲是].”고 쓰여 있다.
우산(牛山)
①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제 경공(齊景公)이 인생이 짧은 것을 한탄하면서 울었다는 산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 간상십칠(諫上十七)에, “제 경공(齊景公)이 우산에서 노닐다가 북쪽으로 국성(國城)을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대로 가다가 죽으면 어쩌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② 평안도 숙천(肅川) 근처에 있는 지명이다. / 인용: 軍丁歎(정민교)
우산루(牛山淚)
우산(牛山)은 중국 산동(山東) 치박시(淄博市) 동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 나라 영내에 있었다. 제 경공(齊景公)이 우산에 올라가 북쪽의 도성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내 나라여!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 죽어갔는가.” 하고, 눈물을 흘려 옷깃이 젖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구월 구일 제산(齊山)에 올라가 지은 시에 “다만 좋은 술로써 좋은 시절 즐길 뿐, 높은 곳에 올라와 지는 해를 한할 게 없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을 따름인데, 우산에서 어찌 홀로 눈물 흘릴 게 있으리[但將酩酊酬佳節 不用登臨恨落暉 古往今來只如此 牛山何必獨霑衣]”라고 하여 그 고사를 인용하였다. 『한시외전(漢詩外傳)』 卷十ㆍ『번천시집(樊川詩集)』 卷三 九日齊山登高
우산사양(牛山斜陽)
제 경공(齊景公)의 고사를 말한 것. 제 나라 경공이 우산(牛山)에 올랐다가 해가 서산에 지자 북으로 제(齊)를 바라보며 이르기를, “아름답구나, 저 나라가! 만약 옛날부터 사람이 죽지 않는 존재였다면 과인(寡人)이 무슨 수로 저 나라를 차지했으랴. 그러나 과인은 장차 저것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이란 말인가.” 하고, 엎드려서 옷깃이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한시외전(漢詩外傳)』 卷十
우산석휘비(牛山夕暉悲)
제(齊) 나라 경공(景公)이 북쪽으로 도성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 죽어갔는가.” 하자, 곁에 있던 예공(艾孔)과 양구거(梁丘據)는 따라 우는데, 안자(晏子)만은 홀로 웃고 있었다. 이에 경공이 질책하며 까닭을 묻자, 안자가 말하기를 “가령 어진 이가 항상 이곳을 지켜 왔다면 태공(太公)과 환공(桓公)이 계속 이곳을 지킬 것이고, 가령 용감한 이가 항상 이곳을 지켜왔다면 장공(莊公)과 영공(靈公)이 항상 이곳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임금들이 줄곧 이곳을 지킨다면 우리 임금께서 여기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하였다 한다.
우산성리(雨散星離)
옛날에는 서로들 만났다가 금방 헤어지곤 하여 친하게 지낼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잔치 자리 우리 의기 하늘을 찔렀는데, 빗발처럼 유성처럼 아침도 못 가서 헤어졌네[當筵意氣凌九霄 星離雨散不終朝].”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태백집(李太白集)』 卷12 憶舊遊寄譙郡元參軍
우산운비(雨散雲飛)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우상(羽觴)
새깃 모양으로 된 술잔
우상(虞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주(周) 나라 사람은 서민(庶民)의 늙은이를 우상에서 봉양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우상은 소학(小學)이다.” 하였다.
우상(虞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주인(周人)은 국로(國老)를 동교(東膠)에서 기르고, 서로(庶老)를 우상(虞庠)에서 기르는데, 우상은 주(周)의 서교(西郊)에 있다.” 하였고, 그 주에 “우상도 역시 소학(小學)이다.” 하였다.
우상수파(羽觴隨波)
옛날 술 마시는 풍속에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것이 있는데, 물굽이를 만들어 놓고 둘러앉아 잔을 물에 띄워서 잔이 물결 따라 흘러가는 대로 차례로 마시는 것인데, 잔에 깃을 다는 것을 우상(羽觴)이라 하며 새처럼 빨리 가라는 뜻이다.
우서(羽書)
아주 급한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새의 깃을 꽂은 격문(檄文).
우석(羽石)
『여씨춘추(呂氏春秋)』 「정통(精通)」에 “양 유기(養由基)가 외뿔소를 쏘다가 잘못 돌을 맞혔는데 화살의 깃까지 돌 속에 깊이 박혔다.” 하였다. 『사기(史記)』 卷四 「주본기(周本記)」,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우선(藕船)
배처럼 큰 연꽃을 이른다. 『노자(老子)』의 말에 “진인(眞人)은 각각 연꽃 위에 앉아 노는데, 그 꽃의 직경이 십 장(十丈)이나 된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고의시(古意詩)에는 “태화봉 꼭대기에 옥정의 연이 있으니 십 장이나 되는 연꽃이 마치 배와 같도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하였다.
우선(于仙)
신라(新羅) 때에 가야금(伽倻琴)을 처음 제작한 악사(樂師) 우륵(于勒)을 높여 일컬은 말인데, 우륵은 본디 대가야국(大伽倻國) 사람이었으나, 뒤에 충주(忠州)로 옮겨와서 살았다. 현재 충주에 있는 금휴포(琴休浦)와 탄금대(彈琴臺)는 모두 그가 생전에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우선(羽扇)
제갈량(諸葛亮)이 군중(軍中)에서 백우선(白羽扇)을 돌고 다녔다.
우선윤건(羽扇綸巾)
제갈량(諸葛亮)이 평소에 군중에서 항상 애용하던 흰 새털 부채(白羽扇)와 실로 짠 두건(頭巾).
우소(虞韶)
순(舜) 임금이 만든 음악이다.
우수(牛首)
강원도 춘천(春川)의 고호이다.
우수(愚叟)
어리석은 가상의 영감. 나이 90이 된 영감이 둘레가 7백 리에 달하는 산 둘을 딴 곳으로 옮기려고 공사를 시작하자, 하곡(河曲)에 사는 지수(智叟)가 그를 보고는 만류하기를, “나이 90인 당신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 산 한쪽 자락도 어림없을 것인데 왜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오?”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일이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요. 내가 하다가 죽으면 내 자식이 하고, 손자가 하고, 손자의 아들이 또 하고, 그 손자가 또 하고 이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계속하면 일은 끝까지 할 수 있고 산은 더 보태지지는 않을 것 아니요.” 했다는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우수마발(牛溲馬勃)
① 우수는 소의 오줌을 말하고, 마발은 곧 습지(濕地)나 썩은 나무 등에서 생기는 말똥버섯을 말한 것으로, 이것들은 모두 가장 사소하고 천한 약재(藥材)에 해당한 것이니, 여기서는 즉 사소한 인재에 비유한 것이다.
② 훌륭한 의원은 옥전(玉箭) 청지(靑芝) 같은 좋은 약이나, 쇠오줌[牛溲]ㆍ말오줌[馬渤]ㆍ떨어진 북가죽[敗鼓之皮] 같은 것을 모두 모아서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쓴다는 뜻이다.
우수첨의(牛峀沾衣)
우산은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제(齊) 나라 경공(景公)이 이 산에서 노닐다가 북쪽으로 국성(國城)을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대로 가다가 죽으면 어쩌겠는가.” 하였다. 『안자춘추(晏子春秋)』 諫上 17
우순(虞舜)
제순유우씨(帝舜有虞氏)이기 때문에, 순 임금을 말한다.
우슬(竽瑟)
주의 주장과 취향의 차이를 말한다. 한퇴지(韓退之)의 「답진상서(答陳商書)」에 “제 나라 임금이 피리[竽]를 좋아했으므로,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러 온 사람이 비파(瑟)를 들고서 3년 동안이나 궁궐 문에 서 있었어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승(郵丞)
찰방(察訪)의 별칭이다.
우승경(虞升卿)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7~125) 때 여러 차례 무공을 세운 우후(虞詡)의 자다. 우후의 군대가 무도(武都:감숙성의 현縣 이름)를 침입한 강족(羌族중국 서쪽의 감숙성 일대에 살던 종족)에게 쫓기게 되었을 때 우후는 군사들이 밥을 해 먹은 아궁이 수를 실제보다 더 많이 만든 다음 이동함으로써 구원병이 이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 전술을 구사한 적이 있다. 이 고사는 『후한서』 「우부개장열전虞傅蓋臧列傳」에 보인다. 이는 전국시대의 손빈(孫臏)이 병력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도록 아궁이 수를 줄이며 이동하여 적을 방심하게 만든 뒤 대승을 거둔 전술을 역이용한 것이다.
우식곡(憂息曲)
실성왕(實聖王) 원년에 내물왕(柰勿王)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왜국(倭國)에 볼모로 보냈고, 11년에는 또 미사흔의 형인 복호(卜好)를 고구려(高句麗)에 볼모로 보냈었다. 그러다가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서는 두 아우가 보고 싶어서 변사(辯士)를 얻어서 고구려와 왜국에 가서 두 아우를 맞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뭇 신하들이 삽량군 태수(歃良郡太守) 박제상(朴堤上)을 천거하였다. 그래서 박제상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가 이미 복호를 맞이하여 돌아온 다음, 또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러서는 왜왕(倭王)을 속이어 몰래 미사흔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육부(六部)에 명하여 멀리 나가 맞이하게 하고, 두 아우를 만남에 미쳐서는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그리고는 형제들이 다 모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극도로 즐기었다. 이때에 왕이 스스로 노래를 지어 자신의 뜻을 폈는데, 세속에서 이것을 우식곡이라 하였다.
우신행(于愼行)
명(明) 나라 학자. 자는 가원(可遠) 또는 무후(無詬).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商書)ㆍ태자소보(太子小保)에 이르렀고, 저서에는 곡성산관시문집(穀城山館詩文集)이 있다.
우심자(牛心炙)
소 염통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어릴 적에 말을 더듬거려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주의(周顗)가 제대로 알아보고 여러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소 염통을 구워 가장 먼저 그를 먹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왕희지가 어려서 아둔하여 남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13세에 주의(周顗)를 찾았을 때에 주의가 기특하게 여겨 소 심장 구이로 대접했다. 당시 이 음식을 매우 중히 여겼는데 좌중의 다른 손님은 누구도 먼저 먹은 이가 없었다.” 하였다.
우악양망(憂樂兩忘)
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박박주(薄薄酒)」에 “당장에 술 불러 한번 취하여, 시비와 우락을 둘 다 잊는 것만 못하리[不如眼前一醉 是非憂樂兩都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 卷十四
우야대상(雨夜對床)
형제가 한자리에 만나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다. 소식(蘇軾)이 비가 내릴 때 아우 소철(蘇轍)을 작별한 시에 “침상 매주 대하여 시름겨운데 밤비는 속절없이 스산하여라[對床定悠悠 夜雨空蕭瑟].” 하였다. 『분류동파시(分類東坡詩)』 卷二十二 東府雨中別子由
우양(于襄)
우양은 “빛나는 남중이여, 험윤을 제압하였도다[赫赫南仲 玁狁于襄].”에서 나온 말로, 서융(西戎), 북적(北狄), 동이(東夷) 등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출거(出車)」
우양견시(牛羊犬豕)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곤괘(坤卦)는 소이고 감괘는 돼지이고 간괘는 개이고 태괘는 양이다[坤爲牛 坎爲豕 艮爲狗 兌爲羊].” 한 데서 온 말로, 이것은 곧 동물(動物)에서 괘상(卦象)을 취한 것이다.
우양침줄(牛羊侵茁)
『맹자(孟子)』 「고자(告子)」에 “우산(牛山)의 나무가 아름다웠는데 서울의 근교가 되는 바람에 도끼와 자귀의 침해를 받게 되고, 또 시간이 흘러 비와 이슬에 젖어 곁순이 돋아나도 소와 염소가 뜯어 먹기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되었다.” 하였다.
우어(鰅漁)
표피에 무늬가 있는 고기로 낙랑(樂浪)의 동이(東暆)에서 난다고 한다. 『설문(說文)』
우어기시(偶語棄市)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백성들을 무식하게 만들기 위하여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죽였는데, 옛일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그르게 여기는 자는 멸족(滅族)하였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시서(詩書)를 말하는 자는 처형하여 저자에 버린 것을 말한다. / 인용: 朝鮮詩文變遷(정만조)
우여(雨餘)
‘비온 뒤’라는 뜻이다.
우여곡절(迂餘曲折)
길이 직선으로 쭉 바로 뻗지 못하고, 이리저리 굽고 꺾여 구불구불해진 먼 길. 일이 단순하거나 직선적이지 않고,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뒤얽혀 몇 번이고 변화한다. 즉, 여러 가지로 뒤얽힌 복잡한 사정과 변화를 말함
우연(虞淵)
① 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져서 들어가는 곳이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해가 우연에 도달하는 것을 일러 황혼(黃昏)이라고 한다.” 하였다.
② 해가 우연(虞淵)에서 떠서 저물녘에는 함지(咸池)에 목욕한다 한다.
우연취일회(虞淵取日廻)
우연(虞淵)은 해가 지면 돌아간다는 못이다.
우열난분(優劣難分)
뛰어나고 열등함을 나누기 어려움 (분간할 수 없음)
우예(虞芮)
주(周) 나라 때의 두 나라 이름인데, 일찍이 이 두 나라 임금들이 토지의 경계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 결정을 짓지 못하여, 서백(西伯)에게 찾아가 질정을 받기로 하고 서백의 경내(境內)에 들어가니, 그 곳에는 밭을 가는 자들이 서로 밭두둑을 사양하고, 길가는 자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며, 조정에는 사대부들이 서로 예양(禮讓)을 하곤 하므로, 그것을 본 두 임금은 스스로 자기들의 소인 행위를 깨닫고 토지를 서로 사양하여 끝내 그 토지를 묵히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전하여 관장(官長)의 직무를 말한다.
우오급계(愚汚及溪)
당 나라 유자후(柳子厚)가 영주(永州)에 귀양살이하면서 좋은 계곡(溪谷)을 발견하고는 그 시내를 우계(愚溪)라 이름하고, 우계시서(愚溪詩序)를 지어서, “나의 어리석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시내를 욕되게 한다.” 하였다.
우왕(禹王)
우왕(禹王)이 순(舜) 임금의 명을 받아서 천하의 물길을 터 홍수가 없어지게 하였다.
우왕마왕(牛往馬往)
소 갈 데, 말 갈 데. 갈 수 있을 만한 곳은 다 다녔다는 뜻이다.
우왕좌왕(右往左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한다. 정신없이 사방으로 왔다 갔다 한다. 갈팡질팡함
우외(隅隈)
구석. 모퉁이. 하늘에는 9999개의 외우가 있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우우(于于)
만족스러운 모양, 선잠자리
우우(懮懮)
근심하는 모양
우우(杅杅)
만족하는 모양
우우(嵎嵎)
산이 겹겹이 쌓여 높은 모양
우우(友于)
형제를 가리킨다.
우운박속(雨雲薄俗)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이 되고 손 엎으면 비가 되네[翻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세상 인정의 변화 무상한 풍속을 의미한다.
우운번(雨雲飜)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젖히면 구름 일고 뒤집으면 비 오듯 하는, 경박한 세상 사람이야 따지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飜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2 貧交行
우운초대(雨雲楚臺)
옛날 초왕(楚王)이 양대(陽臺)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는 신녀(神女)를 만나 남녀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문선(文選)』 宋玉 「고당부(高唐賦)」
우위락행(憂違樂行)
세상일이 마음에 맞으면 나가 일을 하고 마음과 어긋나면 피한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우유부단(優柔不斷)
어물어물하기만 하고 딱 잘라 결단을 하지 못한다.
우유초(牛乳草)
파초의 일종. 닭알 만큼한 씨알이 소의 젖모양으로 생겨 얻어진 이른다. 『본초(本草)』 「감초(甘蕉)」
우의(牛衣)
소가 춥지 않도록 덮어 주는 덕석을 말한다. 한(漢) 나라 왕장(王章)이 병든 몸으로 덮을 것이 없자 우의를 뒤집어쓰고 누웠다는(臥牛衣中)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왕장전(王章傳)」
우의(羽衣)
새의 깃으로 만든 옷인데, 신선이 날아다닌다는 뜻을 취하여 신선의 옷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의(寓意)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물(事物)에 비유해서 은근히 나타내는 것. 인물, 행위, 그리고 때로는 배경이 축자적(逐字的) 즉 일차적 의미층에 있어 논리 정연한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제2차적 인물, 개념, 사건도 가리키도록 고안된 이야기이다.
우의(羽儀)
『주역(周易)』 「점괘(漸卦)」 상구효(上九爻)에서 나온 말로, 지위도 높고 재덕(才德)도 겸비하여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의경허이(牛蟻驚虛耳)
노환으로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 사(師)가 일찍이 귀를 앓아, 와상 밑에서 개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소가 싸우는 소리로 잘못 알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八十四
우이(嵎夷)
고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동부 바닷가 지역으로 해가 뜨는 곳이라 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嵎夷)에 머물게 하니 양곡(暘谷)이란 곳인데, 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였다.” 하였다. / 유의어: 우이(隅夷)
우이(牛李)
당(唐)의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 이 두 사람이 붕당(朋黨)을 꾸미는 데 주축이 되어 당 목종(唐穆宗)때부터 시작하여 무종(武宗)대까지 전후 40년 가까이 당시 재상이었던 이길보(李吉甫)와 이덕유(李德裕)부자(父子)와 맞서 헐뜯고 배격하는 등 당쟁(黨爭)을 꾸몄음. 『당서(唐書)』 「이덕유전(李德裕傳)」
우이경(耦而耕)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은사(隱士)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았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우이독경(牛耳讀經)
쇠 귀에 경 읽기.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여 효과가 없음. / 유의어: 우이송경(牛耳誦經)
우이수운출림학(偶尒隨雲出林壑)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히 산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서 돌아온다[雲無心而出岫 鳥倦飛而知還].” 하였는데, 자기가 구름처럼 무심히 나갔다가 지친 새처럼 돌아온 데 비유한 것이라 한다.
우이쟁(牛李爭)
우가 이가는 당 나라 때 권력을 잡고서 각기 사적인 당을 결성하여 서로 공격을 일삼았던 우승유(牛僧儒)와 이종민(李宗閔)을 가리킨다. 곧 당파 싸움을 벌이는 권력계층을 비유한다.
우이회수조곤륜(嵎夷回首眺崑崙)
중국의 동쪽과 서쪽의 끝을 말한다. 우이(嵎夷)는 산동성(山東省) 동쪽 해변을 가리키고, 곤륜산은 신강성(新疆省) 서장(西藏)에 있다.
우익(羽翼)
날개.
우익이성(羽翼已成)
깃과 날개가 이미 자랐다는 말로 성숙해졌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우익저황(羽翼儲皇)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太子)를 바꿔 세우려 하니,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에게 계책을 물어서 상산(商山)의 사호(四皓)를 청해 와서 태자를 보호하였다. 고조가 사호가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보고, “우익(羽翼)이 벌써 생겼으니 변동하기 어렵구나.” 하고,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우인(羽人)
비선(飛仙). 우인지국(羽人之國)이 있는데 죽지 않는 사람이 산다 한다.
우인(虞人)
산림(山林)ㆍ소택(沼澤) 등을 맡아 관리하는 벼슬아치.
우인지단구(羽人之丹丘)
우인(羽人)은 날개 난 신선이요, 단구(丹丘)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우일차(又一次)
회시(會試) 초장(初場)의 강경(講經)에서 떨어진 자가 임금의 특명으로 전강(殿講)하여 그 점수를 따져서 회시의 중장ㆍ종장에 응시하도록 허락을 받고 중장에 응시하는 자를 비웃던 말이다. 즉 김 안로(金安老)의 아들 김 기(金祺)를 지칭한 말이다.
우입포정인(牛入庖丁刃)
학문을 많이 쌓아 진리가 쉽게 알아짐을 말한 것이다. 포정(庖丁)은 푸줏간의 백정.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어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칼을 매우 능란하게 놀렸다. 문혜군은 감탄하며 기술을 칭찬하자, 그는 ‘제가 소를 잡기 시작한 지 이미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부러뜨리곤 하였지만 이제는 칼에서 바람소리가 일면서 쉽게 잡습니다.’ 했다.” 하였다.
우자모전계(愚字冒前溪)
우 자로 시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곧 당(唐) 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 지방으로 유배되었을 적에 그곳에 있는, 본디 염계(冉溪)라고 불리던 시내를 우계(愚溪)로 개명(改名)하여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묘사한 데서 온 말이다.
우잠(虞箴)
① 양웅(揚雄)이 우잠(虞箴)을 지어 사냥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사냥을 맡은 관원을 우인(虞人)이라 한다.
② 우인(虞人)의 경계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의 태사(太史) 신갑(辛甲)이 백관에게 각자 경계 말을 만들라고 명하니 우인이 임금은 사냥을 삼가야 한다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함『춘추좌전(春秋左傳)』 襄公 四年
③ 춘추(春秋) 시대에 진(晉) 나라 임금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위강(魏絳)이 말하기를, “옛날 주(周) 나라 신갑(辛甲)이 태사(太史)가 되었을 때에, 백관(百官)을 시켜 관잠(官箴)을 지었는데, 산야(山野)의 짐승을 맡은 벼슬인 우인(虞人)의 잠(箴)에 사냥을 경계하는 말이 있었다.” 하였다.
우잠(牛涔)
협소한 것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에, “소발굽 자국에 고인 빗물에는 미꾸라지조차 살 수가 없다.” 하였다.
우잠의질(牛涔蟻垤)
우잠(牛涔)은 소 발자국에 괸 물을 말한 것으로, 우잠과 개미둑을 가장 하찮은 산수의 뜻으로 전용(轉用)한 것이다.
우장(羽仗)
깃으로 만든 의장(儀仗)이다.
우재유허비(尤齋遺墟碑)
우재(尤齋)는 송시열(宋時烈)의 호이다. 송시열이 숙종 15년(1689)에 제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에 세워진 비에 대한 시이다.
우저(牛渚)
남경에 있는 못(淵) 이른다.
우저봉기(牛渚鳳機)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전설을 말함이다. 견우를 소 먹이는 물가라 하였고, 직녀를 봉베틀(鳳機)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저연서(牛渚燃犀)
진(晉) 나라 온교(溫嶠)가 일찍이 우저라는 연못에 이르렀는데 그 연못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에서 그 연못 속에는 괴물(怪物)이 많다고 하므로, 온교가 드디어 서각(犀角)에 불을 붙여가지고 그 물 속을 비춰 보았다 한다.
우저희노(愚狙喜怒)
어리석고 소견이 아주 좁은 것을 말한다. 우저는 어리석은 원숭이라는 뜻인데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밤(栗)을 주면서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더니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아주 좋아하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우적(禹績)
우(禹) 임금이 이룩한 치수(治水)의 공적을 말한다.
우적지동지(禹跡之東至)
우(禹)가 치산치수(治山治水)할 적에 북으로 의무려 산에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다.
우전(于闐)
한 나라 때 서역(西域) 나라이다.
우전아(雨前芽)
곡우(穀雨) 때에 채취하여 제조한 차를 이른다.
우정(郵亭)
관원들이 묵는 역관(驛館)을 말한다.
우정(虞廷)
순(舜)의 조정이란 뜻이다.
우정경재접(虞廷賡載接)
예전 순(舜) 임금 때에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권면하는 노래를 주고 받은 것을 말한 것이다.
우정국(于定國)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정위(廷尉)가 되어 옥사를 처결함에 매우 공평하였다 한다.
우정서(虞庭瑞)
우순(虞舜), 즉 순(舜) 임금의 조정에 있었다는 상서(祥瑞)로,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소소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새가 날아와 법도에 맞춰 춤을 추었다[韶簫九成 鳳凰來儀].”는 구절이 나온다.
우정희기시(虞廷喜起詩)
임금과 신하의 뜻이 서로 잘 어우러져 훌륭한 정치를 구가하게 되는 노래를 말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乃歌曰 股肱喜哉 元首起哉”에서 나온 말이다.
우제(雨祭)
‘기우제(祈雨祭)’를 말한다.
우제선기(虞帝璿璣)
순(舜) 임금 때 천문 관측용으로 만들었다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우제자주목(虞帝咨州牧)
우순(虞舜)이 12주목(州牧) 22인에게 훈계한 내용이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기재되어 있다.
우좨주(禹祭酒)
우 좨주는 고려 중기의 학자인 우탁(禹倬)을 이른다. 그는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하였고, 벼슬은 충숙왕 때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우주(禹疇)
구주(九疇)와 같다. 홍범구주(洪範九疇)로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전해 주었다. 『서경(書經)』 「홍범(洪範)」
우주타청(紆朱拖靑)
우청타자(紆靑拖紫)와 같은 말인데 몸에 인수(印綬)를 찬 것을 이른다.
우중(虞仲)
주 문왕(周文王)의 형. 그는 문왕이 임금이 되자 형산(荊山)으로 도피하였다.
우중사(藕中絲)
연뿌리를 절단하여도 그 속에 있는 실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즉 ‘남녀(男女)의 외면적인 관계는 끊어졌으나 서로 그리워하는 정은 남아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우직(寓直)
다른 관아에 가서 기숙(寄宿)하며 당직하는 것을 말한다.
우집(虞集)
원(元) 나라 사람. 자는 백생(伯生), 호는 도원(道園). 원 문종(元文宗) 때 규장각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가 되어 경세대전(經世大典)을 수찬하였고, 저서에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ㆍ『도원류고(道園類稿)』ㆍ『평요기(平猺記)』가 있으며, 두시(杜詩)도 주해하였다.
우차(旴嗟)
탄식하는 소리
우천(牛喘)
한(漢)나라 병길이 정승이 되었을 때에 길에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길에 가로놓여 잇는 것을 보고는 묻지 않고 지나가더니, 어느 사람이 몰고 가는 소가 허덕이는 것을 보고는, “소가 몇 리나 걸어 왔나.” 하고 물었다. 관속이, “어찌하여 죽은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가시고, 소의 허덕임을 묻습니까.” 하니, 그는, “길에 사람이 죽은 것은 담당하는 관리가 물을 일이고, 재상(宰相)은 음양(陰陽)을 조화(調和)시키는 것인데, 지금 더울 때가 아닌 봄에 소가 허덕이는 것은, 음양이 혹시 조화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여 물었노라.” 하였다. 『한서(漢書)』 「병길전(丙吉傳)」
우천봉(雨千峯)
조선 초기의 승려인 둔우(屯雨)를 가리키는데 혹 만우(卍雨) 또는 만우(萬雨)라고도 한다. 천봉은 그의 호이다. 『목은고(牧隱藁)』 文藁 卷 10 「천봉설(千峯說)」
우천순연(雨天順延)
모임을 정한 날에 비가 오면, 다음날로 연기하는 것.
우천화(雨天花)
석가가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여 삼매(三昧)에 들 때 하늘에서 네 가지의 꽃이 내린 일을 말한다.
우촌(雨村)
이조원(李調元)의 호이다.
우치현(盱眙縣)
지금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 동쪽에 있다. 초나라의 의제(義帝)가 도읍했던 곳이다.
우탁(牛鐸)
진(晉) 나라 순욱(荀勗)이 길을 가다가 소방울 소리(牛鐸)를 듣고는 나중에 악기의 음률을 조정할 때 그 소방울 소리를 수소문해 찾아서 맞추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순욱전(荀勗傳)」
우통(郵筒)
우역(郵驛)을 통해 문서를 전달하는 죽통(竹筒)을 말한다.
우투성(牛鬪聲)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귀가 이상하게 잘 들리는 병을 앓았는데, 침상 아래에서 개미가 기어다니자 소가 싸운다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은중감전(殷仲堪傳)」
우판(虞坂)
지명(地名)으로 어떤 준마(駿馬)가 소금 수레를 끌고 우판에 오르다가 자신을 알아줄 백락(伯樂)을 만나자 슬피 울었다는 고사이다.
우하(虞夏)
순(舜) 임금과 탕왕(湯王)이 다스리던 왕도정치 시대를 말한다.
우한(羽翰)
서신이나 문장을 말한다.
우혈(禹穴)
우(禹) 임금이 서책을 보관해 두었다는 곳으로, 회계산(會稽山)에 있다고 한다.
우혜(禹蹊)
하(夏) 나라 우(禹) 임금이 처음으로 행정 구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다스리고 공물(貢物)을 책정하였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우호(憂瓠)
혜시(惠施)가 장자(莊子)의 주장이 멋없이 크기만 하고 쓸모 없음을, 펑퍼짐하니 크기만 하고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박에 비유하자, 장자(莊子)는 혜시가 마음이 막혀 큰 것을 쓸 줄 모름을 지적하고 큰 박을 줄로 엮어 물에 띄워 타고 놀 수 있음을 일러 주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우화(雨花)
불조(佛祖)가 설법(說法)할 적에 제천(諸天)에서 뭇 꽃들을 내려 공중에 가득히 내려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우화단(雨花壇)
승려가 『불경(佛經)』를 강설하는 곳을 이른다. 양 무제(梁武帝) 때에 한 법사(法師)가 어느 대(臺)에서 불경을 강설하는데, 강설이 하늘을 감동시켜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으므로 그 대를 우화대(雨花臺)라고 명명했던 데서 온 말이다.
우화등선(羽化登仙)
날개 돋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 소식(蘇軾), 「전적벽부(前赤壁賦)」
우화서피(虞翻舒被)
우화(虞翻)는 진(陳)나라 여요(餘姚)사람인데,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비에 지붕이 새자 이불을 펴 책을 덮어 책이 젖지 않게 하였다 한다. 『남사(南史)』 卷七十二 「우번전(虞翻傳)」
우환필연역(憂患必衍易)
① 우환 속에 반드시 『주역(周易)』이 생김. 사람이 근심 걱정이 없으면 그 자체로 만족하여 달리 무엇을 하려고 하거나 또 그럴 이유도 없지만,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것을 타개하고 예방할 방도를 탐구하기 마련이다. 신농(神農)과 황제(黃帝)가 역효(易爻)와 괘상(卦象)을 만든 뒤에 문왕(文王)이 주역을 또 만든 것은 문왕(文王)이 상주(商紂)에 의해 유리(羑里)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후세에 법을 남겨 근심 걱정을 예방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한다. 곧 주역은 근심 걱정을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② 『주역(周易)』 「계사(繫辭)」 下에 “『역(易)』이 생긴 것은 중고시대일 것이다. 역을 지은이는 반드시 근심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우회(禹會)
하우(夏禹)가 제후를 회합하였던 유적으로, 오늘날 안휘(安徽) 회원현(懷遠縣) 동남쪽에 있다.
우회촌(禹會村)
중국 안휘성 회현(安徽省懷縣)에 있는 마을인데 하우씨(夏禹氏)의 유적이 있다 한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우 임금이 제후를 도산(塗山)에 모이게 하니, 옥백(玉帛)을 잡은 자가 만국(萬國)이었다.” 하였다.
우후(牛後)
‘소의 꽁무니’란 뜻으로 큰 것의 종속(從屬)이 되는 것을 이르는데, 즉 타인(他人)에게 빌붙어 복종하는 것을 조롱한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한책(韓策)」에 “차라리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꽁무니는 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우후죽순(雨後竹筍)
비온 뒤에 죽순이 나듯 어떤 일이 한 때 많이 일어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후치(牛後耻)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에 “寧爲鷄口 勿爲牛後”라는 말이 있다.
우희가내(虞姬可奈)
우(虞)는 항우(項羽)의 애희(愛姬) 우희(虞姬)인데, 항우가 애희와 마지막으로 이별하며 부른 노래이다.
우희사여삼(憂喜四與三)
주견(主見)도 없이 함께 휩쓸려 농락을 당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송(宋) 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도토리를 3개 주고 저녁에 4개 주겠다고 하자(朝三暮四) 원숭이들이 모두 성내더니, 아침에 4개 주고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자 모두 기뻐하더라는 우언(寓言)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우희청저공(憂喜聽狙公)
옛날 어떤 원숭이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를 주되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성을 내므로 말을 바꾸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고 하니 좋아하더라는 우화에서 나온 말로, 세상의 명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아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우희초(虞姬草)
우희(虞姬)는 항우(項羽)의 애첩 우 미인(虞美人)을 가리킨다. 항우가 유방(劉邦)에게 패하여 오강(烏江)에서 죽을 때, 우 미인은 전날 밤 자결하였는데, 그 무덤 위에 풀꽃이 피어났다 하여 그 꽃 이름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 한다. 이를 소재로 지은 송(宋) 나라 증공(曾鞏)의 ‘우미인초(虞美人草)’라는 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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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30. 욱 (0) | 2020.0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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