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갖춘 군사독재③
그래도 정방은 무신들이 완전 독점한 교정도감과 달리 문신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지배기관이란 점에서 나름대로 정치기구로서의 면모는 더 분명하다고 하겠다(그 덕분에 훗날 무신정권이 끝났을 때 교정도감은 폐지됐으나 정방은 계속 남게 된다). 이제 최우(崔瑀)는 문무 양측을 다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정방보다 문신 참여율이 더 높은 서방까지 창설한 것은 그런 자부심의 발로다. 정방이 집행기관이라면 서방은 국정 자문기관이므로 문신과 유학자들을 대거 참여시킬 수 있는 데다 무신정권기에 소외됐던 문신 세력을 회유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으니 최우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다.
이렇게 해서 바깥에는 별채(교정도감), 집안에는 방 세 개(도방, 정방, 서방)를 갖추고 수많은 사랑방 손님과 식객들(문신, 유학자)까지 거느리는 것으로 ‘무신의 집’은 완공되었다. 이렇게 지배기구를 완비하고 나서 최우(崔瑀)는 미뤄두었던 군제 개편에 나선다. 장기집권은 물론 권력 세습까지 보장된 판에 사병 조직이란 어울리지 않을 터, 그래서 그는 새로 마별초(馬別抄)라는 군대를 창설한다【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앞서 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 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최초의 상비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무신 권력을 수호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것은 보기에 영 좋지 않지만). 이는 잠시 뒤에 나오겠지만 몽골이 성장하고 있는 대륙의 정세 변화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 역시 도방처럼 최우의 친위대였으므로 사병 조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도방이 보병들로 이루어진 데 비해 마별초는 기병대였으므로 일종의 의장대와 같은 역할도 맡았다. 마별초에서 재미를 본 최우(崔瑀)는 이후 도성 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도 편성했는데, 나중에 인원이 많아지면서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여기에 신의군(神義軍,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만든 군대)이 더해지면서 후대에 삼별초라 알려진 군대를 이루게 된다.
최충헌(崔忠獻)과 최우 부자의 2대에 걸친 노력으로 그간 혼란스러웠던 중앙 권력은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왕국이었던 그 전과는 너무도 다른 체제다. 나라의 대표자라는 상징적 존재로만 강등된 국왕, 그리고 실권을 지닌 최씨 무신정권, 왕위와 실권자가 모두 세습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만큼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지배 체제는 그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려는 나라의 이름만 변하지 않았을 뿐 이 무렵에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무신정권기부터 고려 사회는 지배권력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밖의 여러 가지 면에서도 전과는 다른 측면을 보이게 된다. 별일만 없었다면 아마 이후부터는 그런 변화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지연시킨 ‘별일’이 고려 바깥에서 터진다. 최씨 집권 이후에도 간간이 터져나오던 민란들마저 중단시키고 전국을 폭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그 사건은 바로 몽골의 침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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