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생활교육을 만나다 - 1장 한계에 부딪힌 생활지도
1장 한계에 부딪힌 생활지도
1. 길 잃은 교사
교실은 ‘ 진리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판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 규칙 아래서 아는 법과 사는 법을 배운다.
-파커 파머(Parker J. Palmer)
일상화된 학교의 폭력 문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벌어진 일이다. 바쁜 직장맘을 둔 덕에 아이는 동생을 챙겨야 하는 일이 잦았다. 그날도 아이에게 학교 마치고 동생을 유치원에서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때 딸 아이가 말했다.
“짱나!”
딸아이의 ‘짱 나’라는 표현에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에 쓰던 말이아 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짱 나가 뭐야! 그런 말쓸 거야 안 쓸거야?”
다그쳤지만 그 후에도 아이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오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저런 욕들을 어디서 태우는 건가?
중학교에 근무하다 보니 아이들 입에서 새어 나오는 욕설을 듣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다. 심지어 모범적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입에서도 욕설은 너무나 일상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업 중에 학생을 칭찬하는 일도 어렵다. 누군가를 칭찬하면 칭찬받은 아이를 향해 곱지 않는 시선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공개적으로 칭찬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교실 환경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잠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나는 두 명의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향해 휴지를 뭉쳐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여학생은 그저 휴지 뭉치를 맞고만 있었고, 두 명의 남학생은 담임선생님이 온지도 모른 채 낄낄거리며 계속 던지고 있었다. 학급 아이들 대부분은 그 모습을 그저 쳐다보거나 같이 웃거나 할 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난 너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희들 딱 걸렸어! 당장 그만두지 못해? 너희들 이리로 나와!”
두 녀석은 장난꾸러기이기는 했지만 착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고 슬펐다.
폭력은 일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 갈수록 인격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적 언행에 능숙해지고 있는 듯했다. 학교가 교육기관이 맞는가? 맞다면 학교는 본래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지금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의문을 갖지 않 을 수 없다.
드디어 터진 학교 폭력, 그리고 혼란
그날 휴지 뭉치를 맞은 가희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와서 두 남학생을 학교 폭력 가해자로 신고했다. 가희는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당 해 왔고, 그때마다 가희 어머니는 교사를 찾아갔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가희 어머니는 계속 참지만은 않겠다며 결국 신고를 했다. 이 일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는데, 휴지 뭉치를 던진 것은 잘못이지만 학교 폭력으로 신고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는 입장과 사소한 장난도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두 남학생은 학교 폭력으로 인정되어서 교내 봉사 3일이라는 징계 처분을 받았다. 두 남학생은 3일 동안 방과 후에 운동장과 복도를 청소했고, 날마다 빽빽하게 반성문을 써서 담임과 학생부장과 교감선생님을 차례대로 찾아다니며 서명과 훈계도 받았다. 그러나 두 남학생의 반성문은 진정성 있는 사과이기보다는 벌을 면하기 위한 형식적인 글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징계 처분에 대해 억울해하며 학교 폭력으로 신고를 한 가희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갔다. 가희도 갈수록 날카롭고 예민해져서 학급 친구들에게 욕설을 쏟아냈고 말버릇처럼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했다. 가희의 날카로운 반응은 학급 아이들의 냉랭 함과 따돌림으로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은 가희가 따돌림 받을 만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고, 가희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않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학교 폭력 징계는 학급의 문제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했 다.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은 갈수록 차갑게 꼭꼭 닫혔고, 학급은 불신과 두려움으로 가득해져 갔다.
폭력을 만들어 내는 구조
그동안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해 왔던 학교 폭력의 심각성은 2011년 12월 대구 권모 학생의 자살 사건으로 인해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곪아 있던 폭력 문화가 극단적인 사고로 터져 나왔고, 폭력 양상이 매우 심각하여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이윽고 교사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쏟아졌고, 학교 폭력의 원인으로 교사의 무능력과 가해 학생의 개인적인 성품에 초점이 맞추어져 갔다. 학교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가해 학생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었지만, 이는 폭력이 악순환될 뿐 적절한 대처가 되지 못했다. 정계 이후 가해 학생에 대한 낙인 효과가 커져 갔고, 피해 학생은 실질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학교의 학생부실은 여느 경찰서의 모습과 유사해져 갔으며. 교사는 마치 형사처럼 말하고 행동했고 교육자로서 정체성은 흐려지는 듯했다.
학교 폭력의 원인을 가해 학생의 개인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방식은 학교 폭력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개인의 부족한 인성도 문제지만, 개인의 인성이 가정ㆍ경제ㆍ사회 구조적 환경과 상호 작용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학교 폭력의 원인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라고만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입시 위주의 경쟁적인 학교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협력하기보다 비교와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 속에서는 학생들 사이에 폭력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학교 폭력은 학생 개인보다는 오히려 경쟁과 폭력적 구조를 강화하고 유지 시키고 있는 기성세대와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다. 한국 교육의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학교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접근 자체가 더 큰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학교 공동체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교사, 길을 잃다
학교 폭력으로 학교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교사들은 어느 때보다 학교 폭력과 생활지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우리 사회는 교사들에게 생활지도에 대한 이율배반적 요구를 해왔다. 한편에서는 학생에 대한 인권 의식이 높아지면서 체벌 반대와 교사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생활지도 방식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커져 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의 문제 행동에 체벌과 같은 교사의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된 후에 정부가 발표한 학교 폭력 대처 방안은 더욱 교사를 어렵게 했다. 이 방안에 의하면, 문제 행동에 대한 교사의 교육적 노력들은 학교 폭력에 대한 미온적 대처나 직무유기로 해석되어 법적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사가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 학교 폭력의 당사자인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법적으로 고소되었을 때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교사의 부적절한 대처라며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과 징계를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모순된 요구는 교사가 학교 폭력 사건에 직면했을 때 더욱 심각하게 작동하여 교사의 심리적 마비와 무능을 촉발시켰다.
교사의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학교에서는 웃지 못할 많은 일들이 발생했다. 어느 초등학교 저학년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다.
“얼마 전, 117에 학교 폭력 신고가 들어왔다고 우리 반에 연락이 왔어요. 알고 보니 또 민선이었어요. 민선이는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면이 있는데, 사소한 것도 모두 학교 폭력이라는 것을 배운 뒤에 툭하면 117에 신고를 하는 거예요. 그 일로 인해서 아이들은 민선이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되었어요. 그래서 민선이에게 말했죠, 이런 방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민선이의 잘못만은 아니에요. 저조차 민선이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뾰족한 방법이 없었어요. 아이들에게 친하게 지내라고 권유하는 것 외에는 말이에요.”
어느 실업계 특성화고 선생님의 이야기다.
“요즘 애들의 유행어가 뭔지 아세요? ‘너 학교 폭력으로 신고한다’예요. 친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는데, 요즘에는 선생님한테도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선생님, 학교 폭력으로 신고할 거예요.’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녀석들은 주로 말썽꾸러기들입니다. 어이가 없어요.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교사를 언제까지 해야 되는지 고민스럽습니다.”
학교 폭력 교사 연수를 듣고 난 중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다.
“학교 폭력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수첩에 아이들 상담 내용을 누적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아요. 연수 강사도 어떻게 하면 교사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지 요령만 가르쳐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네요. 교사로서 무기력을 느껴요.”
심지어 학교 폭력 예방을 목적으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어처구니없 는 생활 규칙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어느 한 초등학교의 생활 규칙이다【‘친구랑 30초 이상 만나지 말 것-황당한 초등학교’ <경향신문>, 2012.3.8일자】.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초등학교 6학년 생활 규칙 1. 화장실 용무 외에는 복도에 나가지 않는다. 2. 교실 밖을 나가더라도 3명 이상 모이지 않고 30초 이상 만나지 않고 3문장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
학교 폭력 문제의 책임과 비난이 교사와 학생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지
면서 교사는 학교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2. “나는 올바른 지도법을 배운 적이 없다”
제도가 공동체보다는 경쟁을 만들어 낼 때.
지적 삶이 우리를 연결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시길 때,
우리의 마음은 활력을 잃고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교실을 향한 내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고 답답하다. 얼마 전 가희에게 휴지 뭉치를 던져 학교 폭력 징계 처분을 받은 두 남학생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들 뒤에는 우리 학교 짱인 민호가 있었는데, 그들은 민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대가로 민호의 특별한 비호를 받고 있었다. 학급 아이들은 민호를 교사보다 더 무서워해서 민호의 잘못에 대해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민호라는 존재는 무언의 폭력으로 학급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학교는 교육 공간이기는 하지만, 학교도 교사도 ‘폭력’을 교육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2013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행복교육누리,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이 전국 초중고 교사 1,26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교사의 68.6%가 ‘생활지도가 고통스럽다’고 했다【2013년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행복교육누리. 공교육살리기확부모연합이 전국의 초ㆍ중ㆍ고 교사 1,269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교육 현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학생생활지도’(35.5%)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교사 10명 중 7명(68.6%)은 “학생 생활지도 때문에 매우 또는 약간 고통받는다”고 했다. ‘별로 또는 전혀 고통 받지 않는다’라는 교사는 10명 중 1명(8.4%)에 불과했다.】. 왜 생활지도가 예전과 달리 어려워졌을까? 학생들이 문제인가? 교사의 능력 문제인가? 관료적인 학교의 문제인가? 사실, 점점 더 교사의 생활지도가 학생들에게 먹히지 않고 있다. 교사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부수적인 업무로 밀려나는 생활지도
교직 경력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버릇 하나가, 출근하자마자 그날그날 처리해야 할 공문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보고 기간을 놓치거나 좀 늦어지면 교육청이나 관리자로부터 바로 독촉이 오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급한 공문으로 간혹 수업 시간에도 행정 업무를 해야 했다. 교육청은 주로 공문을 통해 학교를 관리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부서별로 처리해야 할 공문의 양이 적지 않다【2010년 서울시교육청이 조사한 공문서 현황에 따르면. 서울 소재 초등학교가 연간 받는 공문은 한 학교당 8,296건이었다. 중학교는 학교당 7,670건이었으며 고등학교의 경우 8,982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같은 공문 건수를 1년 365일 중 공휴일(법정휴일 기준 통상 118일)을 제한 247일로 나누면 학교당 적게는 31건에서 많게는 36건의 공문을 처리하는 골이다. 2014년은 학교 폭력과 주5일제 토요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공문이 더 늘었다.】.
초임 시절에는 학급 이벤트도 많이 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아이들도 학원으로 바빠지고 나도 행정 입무로 여유가 없어지면서, 생활지도는 그저 별 사고만 없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생활지도는 수업과 행정 업무에 비해서 부수적인 영역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학교교육 활동은 교과교육 영역과 생활지도 영역으로 접근되어 왔다. 이 두 영역은 분리된 구분이라기보다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온전한 교육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두 영역이 모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교과 교육은 성적이라는 성과물이 있고 사회적으로 선발과 경쟁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수업’은 교사 역할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다. 이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가 별로 없는 생활지도는 학교 현장에서 오랫동안 부수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생활지도에 대한 교육적 고민이나 철학, 방법론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로 인한 교과교육과 생활지도의 불균형과 불일치, 단절은 교육 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종화, ‘생활지도의 새로운 패러다임 회복적 생할교육을 제안한다’ 좋은교사운동 토론 자료집 2011.10.31.)’
좋은교사운동 임종화 대표의 지적대로, 생활지도가 교육 활동의 핵심적인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부수적인 영역으로 취급되면서 생활지도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방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변화되고 있는 교육 환경에 맞는 적절한 생활지도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기존의 생활지도 방식만을 답습해 온 것이 오늘날 생활지도가 어려워지게 된 첫 번째 원인이다. 생활지도가 되지 않는데 수업이 잘 될 리가 없다. 생활지도의 어려움은 수업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위에 의존한 생활지도 방식은 끝났다
이전에는 학생들 대부분이 교사들 말에 순응했다. 그러나 이제는 순순히 따라오지 않는다. 교사들은 요즘 학생들이 버릇없고 이기적이기 때 문이라고 지적하지만, 정말 학생들만의 문제인가? 생활지도에 대한 철학적ㆍ방법적 연구의 부재는 교사들로 하여금 여전히 전통적 생활지도 방식을 따르도록 한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인 생활지도 방식은 변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는 작동되지 않는 패러다임이다.
우리 사회는 ‘잘못을 한 사람은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오랜 신념을 지니고 있으며, 생활지도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응보적 신념은 예 외 없이 적용되어 왔다. 사회와 학교는 전문성과 권위를 가진 소수에 의해서 잘못에 따른 처벌이 결정되는 권위적인 사회와 교육 시스템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전통적인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사회가 발전해 갈수록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존중,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인정,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학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더는 교사의 권위적인 지도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학교와 학급 환경은 학생들의 요구나 필요와 상관없이 교사로부터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급규 칙인데, 학생들에게 학급 규칙은 통보되고 당위적으로 지키도록 강요된다. 학급 규칙 자체가 도덕적이고 상식적임에도, 학생들은 규칙을 기꺼이 따르기를 거부한다. 교사들은 학급 규칙이 너무나 당연해 보여서 거부하는 학생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각자의 필요와 동의 없이 세워진 규칙이나 약속은 생기와 동력을 잃게 마련이어서 학생들에게 규칙을 준수할 만한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성을 상실한 학교 현실
우리 교육이 겪고 있는 고통은 생활지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총체적인 교육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파커 파머는 ‘교육의 고통은 단 절의 고통’【파커 파머,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IVP, 2006. 14쪽.】이라고 진단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학생에게 배움은 객관적 지식이라고 판단되는 내용이 주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배움에 있어서 학생들의 성찰을 불러오지 못하고, 성찰 없는 배움은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식은 단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존재하고, 배움은 학생들에게 고된 노동으로 변질되고 있다. 학생과 교사는 점점 이해관계 중심으로 변화되어 학생에게 교사는 성적 향상과 졸업을 위해 존재하고, 교사에게 학생은 교사라는 직업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진학을 위한 서열이 결정되는 경쟁자로, 서로가 서로의 삶의 선물이기보다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로 존재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성적에 따라 분류하고 선별하여 상급 학교로 진학시키는 행정 기관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학교에서의 배움도, 구성원 간의 관계도 교육의 목적도 본래적 존재 의미와 단절되고 기능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더욱이 서로 간의 관계성 단절은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공동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단절된 삶이 지속된다면 삶은 공허해 지고 피폐해져 본질을 왜곡하고 폭력적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학교 안의 단절된 관계는 폭력을 부르고, 교육 공간이 지닌 기본적인 안전을 파괴한다. 지금 우리가 겪는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은 바로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공동체성의 상실에 있다. 안타깝게도 발표된 학교 폭력 대책은 처벌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오히려 관계의 단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가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일차적으로 학교의 공간을 안전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훼손된 관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은 관대한 공간에서 가장 잘 배운다”라고 말한 평화운동가 박성용대표의 말에 동의한다. 안전한 공간과 정서적 평안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배움과 교육도 불가능하다.
3.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우리가 벌을 사용하면 아이들은 우리를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고,
보상을 사용하면 우리를 사탕 분배자로 보게 된다.
-알피 콘(Alfie Kohn)
기 씨움
중학교 2학년 준모와의 갈등은 학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학기 초에 학급 분위기를 잡지 못하면 1년을 고생한다는 나름의 교사 집단 안에서 내려오는 신념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내게 ‘학급 분위기를 잡는다’는 것은, 교실 안에서 질서가 지켜지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업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저것 많은 규칙을 나열하기보다는 몇 개의 규칙만 철저하게 지켜서 자연스럽게 질서 있는 학급이 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규칙이 ‘모든 학생이 8시 30분까지 등교하기’였다. 제 시간에 등교하지 못하면 조례가 시작되는 8시 50분까지 복도에 서 있는 것이다. 학기 초 아이들은 규칙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서 시간에 맞게 등교하려고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2주 정도는 한두 명이 1~ 2분 늦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문제 없었다. 준모가 도전적인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준모의 도전적인 행동은 정해진 등교 시간보다 1~2분 늦거나 10분이 늦거나 똑같이 복도에서 있다가 8시 50분이면 교실에 들어온다는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준모는 2주 동안은 나름 땀 빼면서 시간을 지키려고 뛰어오기도 했지만, 어느 날 5분이 늦고 다음날은 10분이 늦더니 드디어 아예 8시 50분에 맞추어서 학교에 오기 시작했다. 담임으로서 잘못한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벌을 주어야 공평하다는 생각을 한 나는 20분 늦은 준모에게 방과 후에 남아서 교실 청소를 하도록 명령했다. 더불어 교실 청소 당번이었던 아이들에게는 청소를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일은 내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준모는 교실 청소를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빗자루와 쓰레기가 교실 바닥에 뒹굴고 있고, 책상과 의자는 무질서하게 흡어져 있는 텅빈 교실을 보았을 때 나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준모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고, “당장 학교로 돌아와!”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준모는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준모와 나의 기 싸움은 1년 동안 이어졌다.
문제 행동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방법
준모의 도전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모든 학급 아이들이 8시 30분까지 등교하여 조용히 아침 자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던 나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준모의 일탈로 학급의 모든 규칙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아이들 앞에서 나의 지도력도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준모의 행동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아이들을 향해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따지면서 단호하게 대응했다. 거칠고 엄격해진 나의 태도로 인해 아이들은 떠들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입을 닫아버렸다.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과 얼굴은 늘 불편해보이거나 무표정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의 관계는 점차 사무적으로 변해갔고, 학급 분위기는 싸늘해져 갔다. 아, 이런 모습이 내가 원했던 모습인가? 시간이 갈수록 내가 바라던 교사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제는 강압이나 벌, 또는 보상이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알피 콘은 강압과 벌, 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알피 콘. 김달효 옮김. 『훈육의 새로운 이해』. 시그마프레스, 2005.】.
-‘강압’이란,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 대로부터 얻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사는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학생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
-‘벌’이란, 학생이 싫어하는 것을 하도록 시키거나 하고자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벌은 불쾌한 것을 선택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다.
-‘보상’은, 긍정적인 행동을 한 학생에게 별표 또는 스티커를 주거나 행동을 잘한 학생을 선출해서 칠판에 적거나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인데, 보상은 결과적으로는 법과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방식이다.
강압과 벌, 보상 외에 ‘논리적 결과’와 ‘거짓된 선택’이 있다. 논리적 결과는 “네가 벌 청소를 하게 된 것은, 네 행동의 결과야.”와 같은 경우인데, 결국 벌과 동일하다. 거짓된 선택은 “조용히 공부할래, 벌 받을래?”와 같이, 마치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강압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학생들의 문제 행동에 대한 교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대응은 강압과 벌, 보상이다. 그런데 과연 강압과 벌, 보상은 효과가 있을까?
단기적으로 볼 때, 분명 효과가 있다. 단호하고 엄격한 교사의 지도력은 아이들을 잠깐 동안 순응하게 한다. 하지만, 강압과 벌을 주던 교사가 자리에 없으면 바로 효과가 사라지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약해져서 강도를 높여야만 한다. 수업 중에 사탕 하나만으로도 고마워하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더 많은 대가가 주어져야만 행동한다. 교사와의 관계성도 깨지기 시작하여, 학생들은 교사를 벌을 주거나 사탕을 주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공평하고 일관되게 상벌을 주려는 교사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감시ㆍ감독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게 만든다. 학생들을 감시ㆍ감독하면 할수록 학생들이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못 미더운 존재로 여겨지게 되어 더욱 통제를 강화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와 학생에 대한 이해는 결과적으로 학생과 교사 간의 친밀감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수동성을 더욱 강화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처럼 강압과 벌, 보상은 학생들로 하여금 내면의 동기보다는 외적 평가나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게 함으로써 도덕성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강압과 벌, 보상은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하게 하는’ 것으로 ‘힘’에 의한 질서를 배우게 한다.
준모는 학급 아이들에게도 무서운 존재였다. 아이들은 준모에게 복종했고, 반항적인 남학생들은 준모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준모 앞에서 모든 규칙은 멈추어 섰다. 갈수록 준모의 일탈 행위는 무단 조퇴, 담임교사 지도 거부, 흡연, 수업 중 여교사에게 욕설하기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엔 몇 번의 선도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하지만, 준모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준모의 눈매는 더 날카롭고 무서워졌다.
잘못한 행동을 하는 학생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학생이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학생에 대한 상과 벌은 학생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많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4. 폭력을 부르는 감정, 수치심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한테 떠넘겨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혹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수치심을 아예 처음부터 피하려고 폭력을 휘두른다.
사람들이 남을 해치는 이유는, 더 약하고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임을 증명하려는 마음에서다.
- 제임스 길리건(James Giligan)
수치심이 지닌 위력
학교의 선도 조치에도 준모는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반성하거나 돌이키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준모가 한 남학생을 주먹으로 때린 일이 발생했는데, 자신을 보고 비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작 상대 학생은 준모가 무서워서 눈도 쳐다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준모의 피해 의식은 커져 갔고, 자주 분노를 표현했다.
강압과 벌과 보상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아마도 준모는 지금쯤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압이나 벌은 오히려 준모의 폭력적 행동과 분노를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준모가 순종하는 사람은 준모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다. 반면에, 자신보다 힘이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대로 갚아주었다. 보상 역시 준모에게는 별 의미 없는 것이었다. 사탕이나 가산점을 받기 위해 수업에 잠시 집중하는 척했을 뿐이다.
상벌에 의해 행동을 수정했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대부분 두려움, 죄 책감, 수치심이다. 두려움이나 수치심은 학생들로 하여금 저항이나 복종, 도피를 불러온다. 결과적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협력. 자발적 책임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제임스 길리건은 수치심은 폭력 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폭력을 저지르는데, 결국 수치심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와 친사회적 행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주 이용되는 심리적 기제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다소 차이가 있다.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여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자신의 결점으로 인해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브레네 브라운, 서현정 옮김,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북하이브, 2012, 36쪽】으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보다는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간단히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죄책감 = 내가 한 행동이 나쁘다
수치심 = 나는 나쁘다.
죄책감 = 주인의 허락 없이 물건을 가져간 나의 행동은 나쁘다.
수치심 = 나는 뻔뻔스런 범죄자다.
수치심은 ‘누가 날 사랑하겠어. 누가 내 곁에 있으려 하겠어.’라는 생 각처럼,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받을 자격을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문제는 학생들 대부분은 훈육의 과정에서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학교 문화
교육과 사회, 문화, 종교로부터 수치심은 내면화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학교 문화는 이미 수치심을 자극하는 많은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완벽주의적 문화 : “무언가 부족해…”
학교에서는 100점이 기준이다. 점수가 안 좋으면 실패자가 된다. “공부도 못하는 것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늘 ‘부족해’를 경험하게 한다. 시 험 점수가 좋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서부터 수치심을 느낀다. 무한 경쟁의 학교 구조로 인해 성적이 좋은 학생조차 항상 ‘난 부족해’에 시달려서, 학생들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한 것 그 이상의 것, 완벽함을 추구하게 된다. 누구도 ‘이만 하면 됐어’를 외치지 못하고 늘 결핍감에 시달린다. 문제는 아이들의 수치심은 학교 제도의 결합에 따른 것이라는 데 있다. 학교에서 실패한 아이는 깊은 곳에 수치심을 묻어 두고 또 다른 치명적인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당위적 문화 :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학교는 당연한 것들 투성이다. 이미 정해진 절대적인 것들로 인해 소 통해볼 여지가 없다. ‘당위적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이나 ‘당위적 규칙에 의한 생활지도’는 권위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당위 문화에서는 ‘합의 소통’보다는 ‘순응ㆍ복종’이 최고의 가치다. 그래서 얌전하게 교사의 말에 순응하는 학생들이 주로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말대꾸하는 버릇없는 학생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율성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자신의 필요가 억압당하고 자율성이 박탈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삶의 통제력과 주도권이 부정되는 것과 같다.
자기 필요에 대해 표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모두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교 문화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필요에 따라 미래를 탐색할 수 있는 능동적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사회적 기대에 맞춰서 순응하는 수동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
적개심을 부추기는 문화 : “너는 그것도 모르니?”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학교는 존중과 배려와는 거리가 먼 적개심을 부추기는 문화로 가득하다. 비난, 꼬리표 붙이기, 조롱, 멸시, 남 탓, 편 가르기, 따돌림 등은 최근 학생 관계 속에서 가혹하게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고, 학생들은 이와 같은 태도를 평범하게 받아들여서 폭력이라는 인식조차 흐려지고 있다.
교사의 생활지도 방식에도 적개심을 부추기는 의사소통 패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너는 그것도 모르니?” “네가 그런 줄 알았다.” “당장 ~해!” “또 너야?”와 같은 비난이나 선입견, 평가와 강요와 같은 반응들 이 학생들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학업 경쟁 구조를 포함하여 과정보다는 결과 중심의 평가 구조와 상벌점제와 같은 처벌 중심의 기계적 대응은 학생들을 대상화하여 역시 수치심을 자극하게 된다.
수치심의 결과
단절 =공감 스위치 꺼 버리기
수치심은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과 소속감으로부터 단절을 가져온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개인’으로보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로 먼저 존재하게 된다. 부모의 안전한 돌봄과 사랑, 신뢰와 같은 유대감이 있기에 아이는 세상 밖으로 한발 내딛을 용기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신체적ㆍ정서적 유대감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절된다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하고 자율적인 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대감과 소속감의 단절은 인간의 공감 스위치를 꺼버리고 인간을 대상화하게 한다. 그래서 교실에서 따돌림이나 폭력이 발생해도 자 기 일이 아니면 방관하게 되고. 가해 학생의 경우에는 피해에 대해서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사과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여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절’은 수치심으로 인한 가장 치명적인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자아 = ~인 척 살기
수치심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다. 수치심에 뮤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게 되는데, 주로 부모와 교사나 사회가 요구하는 사 람으로 ‘~인 척’ 살아가게 된다. 센 척, 아는 척, 잘난 척, 아닌 척 등등의 수많은 거짓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 척 살기’는 자기 자신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므로 ‘자신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자기 주관보다는 또래의 유행이나 외모를 따르려는 행동, 기계적으로 공부하는 것, 진로 결정에 있어서 자신의 욕구보다 부모나 사회적 기대를 쫓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자신과의 단절된 삶이 지속된다면 삶은 공허해지고 피폐해진다.
반사회적 행동 = 수치심 전가하기
수치심은 친사회적 행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2014년 3월 교육부에서 발표한 학교 폭력 실태 조사【‘현장 중심 학교 폭력 대책 14년 추진 계획 발표’, 교과부, 2014. 3. 4.】에 따르면, 가해자 중 24.4%가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수치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수치를 전가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수치심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을 향하기도 하는데, 자기 비난, 자기 분열, 완벽주의, 중독, 자살 등 자신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수치심과 안녕하기
수치심은 무엇보다 자기성찰을 불러 오지 못한다. 학생들의 잘못에 대해 처벌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기성찰을 이끌어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공감은 수치 심의 강력한 해독제다”라고 말한다. 수치심으로 인해 인간은 두려움과 비난과 단절감을 겪는 반면에, 공감은 용기와 자비, 유대감과 자기성찰을 이끌어 낸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는 수치심과 공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다룰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수치심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학생들로 하여금 공감을 통해 자기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