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영국은 일인자의 고유한 장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이합집산, 합종연횡 따위는 남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에 있는 나라에나 필요한 것이지 영국으로서는 필요가 없었다. 영국의 그런 도도한 위치를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국은 유럽 어느 나라와도 맺지 않은 동맹을 1902년 아시아의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맺었다. 일본과의 동맹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일본을 파트너로 정해 유럽의 이해관계에서 먼 동아시아를 맡긴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유일한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전통의 프랑스가 공화국이라는 것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논리실증주의라는 철학 사조를 이룬 철학자들은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문장을 예문으로 삼아 논리를 따지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왕이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전제부터 잘못이므로 틀린 문장이라는 이야기다. 프랑스가 전통의 강국이 아니었다면, 혹은 공화국이 아니었다면, 혹은 프랑스 외에 공화정을 택한 나라가 또 있었다면 이런 예문은 생기지 않았을 터이다】. 대륙 전통의 대명사인 프랑스가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보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유럽 문명의 중심이라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런 결과가 생겨났을 것이다(그만큼 외국의 간섭을 많이 받았고, 또 그만큼 변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프랑스는 20세기 초까지 공화정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로 계속 몸살을 앓아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부터 가장 진보적인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념의 홍수 속에서 좀처럼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20세기 들어 유럽 여러 나라가 공화정을 택하는 전례가 된다.
▲ 박람회의 계절 산업혁명의 성과는 박람회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위쪽은 1851년 세계 최초로 열린 런던 박람회의 모습이고, 아래쪽은 그에 뒤질세라 4년 뒤에 프랑스가 개최한 파리 박람회의 모습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공업 제품들, 오늘날 자동차 전시회에 비견되는 각종 마차, 심지어 카누까지 전시된 것이 보인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유럽 문명의 심장이었으면서도 뒤늦게 통일 국가를 이룸으로써 장차 커다란 문제로 자라날 씨앗을 품게 되었다. 곧이어 보겠지만,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와 신흥국인 미국까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이 부문의 경쟁에 뛰어든 독일과 이탈리아는 자연히 판을 깨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20세기 들어 대규모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게다가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시민사회의 전통과 역사가 짧기 때문에 쉽게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는 20세기에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스칸디나비아 3국(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은 어떤 의미에서 유럽의 오지이기 때문에 행복했던 나라들이다. 17세기 이후 이 나라들은 서유럽 역사에서 한몫을 담당하기 위해 애써왔으나 힘이 부쳐 계속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의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그들에게서 선진 문명을 수입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18세기부터 러시아에 발트 해의 제해권을 빼앗기고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에 점령당하는 등 약소국의 아픔은 있었으나, 서유럽이 시민혁명의 몸살을 앓던 19세기에 스칸디나비아 3국은 착실히 국력을 키워 장차 20세기에 복지국가의 모델로 떠오를 준비를 갖추었다. 다만 노르웨이는 그중에서도 더 약소국이어서 18세기까지는 덴마크, 19세기에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905년에야 독립을 이루게 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영토의 규모에 비해 세계사적인 족적을 많이 남긴 나라들이다. 강대국들의 틈에 끼어 있어 유럽 무대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이 나리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경쟁을 주도했다. 네덜란드야 원래 해외 진출에서 영국보다도 선배였으나,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뒤늦게 독립을 이룬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나누어가진 플랑드르 전통의 저력에다 중립국의 신분을 십분 활용해 단기간에 식민지 개척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오늘날 두 나라와 함께 베네룩스 3국을 이루는 룩셈부르크는 빈 회의에서 대공국으로 격상되었으나 독일 연방에 속하다가 19세기 중반에 독립을 이루었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완충지대인 탓으로 중립을 보장받았다.
▲ 자유주의와 그 적들 문예사조로 볼 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자유주의와 밀접한 진보적인 사조였다. 그림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 〈화가의 아틀리에>다. 한가운데 화폭 앞에 앉아 있는 쿠르베 자신을 기준으로 오른쪽의 인물들은 그의 사상적 친구들이고, 왼쪽은 그의 적이자 시대의 적 들이다. 오른쪽 끝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시인 보들레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소설가 샹플뢰리이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자 프루동이 있다. 왼쪽 끝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세기 중반 자유주의의 물결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에스파나도 뒤흔들었다.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 2세(1830~1904, 재위 1833~1868)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1868년에 혁명으로 쫓겨났다(앞에서 본 것처럼 이 왕위 계승 문제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듬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에스파냐에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군대가 실력자로 대두되면서 1874년에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이후 정정 불안으로 에스파냐는 내내 유럽의 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1866년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즉각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오스트리아에 복속되어 있던 헝가리에서 거센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유럽 각국이 국민국가 체제를 갖춘 마당에서 다민족 국가의 엉성한 체제를 유지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급해진 오스트리아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헝가리의 독립을 인정하되 서로 헤어질 게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제국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 결과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했는데, 이 기묘한 제국은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유럽 지역에서 해외 진출의 창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러시아는 유럽의 정정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원래 러시아는 18세기 말부터 이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다각도로 모색해왔는데(일본의 개항을 처음 시도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다), 이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 무렵 중국과 한반도의 근대사에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차르 정부가 해외 사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러시아 내에서는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서유럽에 비해 동유럽 발칸 지역의 정세는 대단히 복잡했다.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계속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발칸에는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원래부터 발칸 지역에는 민족적 구성이 다양했는데(로마 제국 후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발흥하던 무렵부터니까 무척 오랜 역사다), 수백 년간 힘의 중심이던 오스만이 소아시아로 물러가면서 저마다 제 몫 찾기에 나선 것이다. 1875년 이들은 힘을 합쳐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오스만을 쫓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보스로 추대된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은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고 유럽에서 아예 짐을 싸게 되었으며, 발칸의 여러 민족은 오랜 이교도 지배를 끝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 애국적 만화 1870년 무렵 프랑스의 어느 만화가가 그린 시사만평이다. 유럽의 지도를 이용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하고 있다.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향해 탐욕스럽게 돌진하는데, 영국과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못 본 체 외면하고 있다. 그 밖에 전통적인 곰으로 묘사되어 있는 러시아, 클레오파트라로 그려진 이집트, 이교도의 티가 물씬 풍기는 오스만 제국 등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래도 좁은 지역에 여러 나라가 들어선 만큼 발칸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19세기 후반 서유럽 세계에서 독립국으로 승인한 나라는 그리스·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였으나 그 밖에도 발칸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등이 사실상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지역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늘 ‘동쪽’에 관심이 컸는데, 독일제국이 성립한 뒤부터는 더욱 이곳에 매달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개입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한 이 지역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고, 결국에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무대가 된다.
미국은 서유럽 문명권이면서도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큰 혜택을 누렸다. 영국이 섬이라는 조건을 이용하여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면, 미국은 그런 조건에다 영국이라는 문명의 ‘창문’도 있었으므로 더욱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기가 수월했다. 남북전쟁으로 내실을 다지기 이전부터 미국은 태평양 쪽으로 해외 진출을 서둘렀는데, 그 성과가 바로 1854년 일본의 개항이다(하지만 미국보다 일본에 득이 되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하와이를 포함해 태평양 지역의 조그만 섬들을 하나씩 접수했고, 한반도에도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에스파냐다. 19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를 몽땅 잃은 데다 유럽에서도 강국들에 밀려나면서 몰락해가던 에스파냐는 1895년과 1896년 쿠바와 필리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가 독립을 지원하고 나선 미국에 참패했다【쿠바와 필리핀은 독립전쟁에서 큰 대조를 보였다. 쿠바군은 미군과 함께 열심히 싸워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린 데 반해, 필리핀군은 전쟁에 별로 공헌한 게 없었다. 그 탓일까? 쿠바는 미국의 텃밭에 있으면서도 전후 독립국이 되었고,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바뀌었다. 식민지인들의 주체적 독립 투쟁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미국-에스파냐 전쟁은 유럽 문명의 신세대가 구세대와 힘겨루기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시대가 바뀌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좋았던 옛날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15세기에 오스만튀르크는 세계 최강이었다. 그러나 고인물이 썩듯이 제국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동유럽을 잃고 그 뒤에는 아프리카마저 잃어 20세기 초에 이르면 지금의 터키와 비슷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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