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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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유럽의 판도가 정해지고 유럽에서 더 이상 영토 분쟁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제부터 유럽 국가들이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영토를 놓고 다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해외 식민지 개척에 분주했던 유럽 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가 잡히자 1870년대부터 곧바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에 유럽의 모든 나라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구가 없는 지리적 여건상 해외 진출이 불가능할뿐더러 전통적으로 공을 들인 곳이 동유럽이었으므로 해외 진출에 나설 의지도 약했다. 또 러시아는 유럽에서 항구를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스칸디나비아와 에스파냐 역시 해외 진출에 나설 힘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서유럽 국가들만 남게 되는데, 이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열강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곳은 아프리카였다. 대항해시대의 항로 개척으로 아프리카를 처음 알게 된 이후 유럽은 아프리카를 노예 공급처로만 이용해왔다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18세기에는 아프리카의 노예가 신대륙으로 가서 면화를 생산하면, 그 면화(원료)를 영국이 수입해 면직물(완제품)을 만든 다음, 그것을 아프리카에 수출해 다시 노예와 교환하는 방식이 성행했다. 사람을 무역 상품으로 포함시키는 이런 행위를 무역이라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그것을 삼각무역이라 부르는데, 노예무역 가운데 가장 악질인 형태다. 콜럼버스의 시대 이후 수백 년간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에 팔려간 노예의 수는 1500~4000만 명에 달한다. 편차가 큰 이유는 정확한 조사가 어려울 정도로 마구잡이였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의 거점인 앙골라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나 그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더 이상 식민지를 확대하려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영토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토의 중요성이 명백해진 19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는 무역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슬람권의 맹주로서 북아프리카를 관할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것은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좋은 조건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새 용도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9세기 초부터 아프리카의 내륙 탐험에 착수한 덕분에 이미 아프리카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는 영토적 욕심보다 그저 호기심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런 탓에 아프리카에 관한 연구도 주로 민간의 차원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 대부분이었다(아프리카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 선교사 리빙스턴이 그 예다). 오히려 아프리카에 전진기지를 먼저 구축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1830년 프랑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해 마르세유를 통한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알제리를 점령했다. 북아프리카는 8세기 이래로 이슬람 문명권이었으므로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 이북(북아프리카)과 이남(·남아프리카)으로 나뉜다. 사하라가 있어 지리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지만 북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나 인종과 문화적으로나 나머지 아프리카 지역과 크게 다르다. 북아프리카는 고대 오리엔트 시대에 페니키아인들이 여러 식민시를 세웠고(카르타고가 그 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식 영토였으며, 이후에는 이슬람 문명권이 들어섰다. 15세기부터 북아프리카 동부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이었으나 대체로 거의 독립적인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프랑스로서는 이 지역에 오랜만에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수복한 셈이다(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적이 있었지만 그 기간은 불과 3년 동안이었다.

 

 

전쟁 또는 살육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는 단순한 노예 공급지를 넘어 방대한 자본주의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그림은 남아프리카에서 자행된 제국주의 학살의 장면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이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아프리카를 영토화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무역에 대한 프랑스의 욕심은 한 가지 기발한 발상을 낳았다. 1832년 이집트에 근무하던 프랑스 외교관 레스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있는 수에즈 운하를 구상했다. 20여 년 뒤 그는 외교관을 그만둔 다음 1858년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1869년 운하를 완공하게 된다.

 

그와 비슷한 무렵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서 아프리카의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었다. 대항해시대에 발견된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가 건설한 케이프 식민지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은 종교 분쟁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들을 보어(Boer)인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이슬람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시작한 8세기 이후 최초로 아프리카에 살기 시작한 백인들인 셈이다. 비록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긴 했으나 이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본국과 지속적인 연관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세기 초 영국이 인도 무역을 위해 케이프 식민지를 접수하겠다고 나섰을 때 동포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던 보어인들은 내륙으로 더 들어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그러나 1870년대에 이곳은 갑자기 말 그대로 귀해졌다.’ 귀금속과 보석, 즉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프리카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던 영국은 즉각 케이프 식민지의 주둔 병력을 증강시켰다. 머잖아 원주민 백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리하여 발발한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은 1880년의 1차전에서는 그럭저럭 영국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1899년에 재개된 2차전에서 패배했다. 3년 뒤에는 보어인의 국가가 영국에 합병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비빌 언덕을 잃은 네덜란드는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만 주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분 수에즈 운하가 건설된 결과 서유럽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뱃길은 무려 1만 킬로미터 이상 단축되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의 대상 무역이 위축되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도상으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691117일 세계 각국의 국가 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 장면이다.

 

 

한편 영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긴장한 프랑스는 알제리 기지의 영토화를 서둘렀다. 알제리 남쪽은 사하라 사막이므로 프랑스가 아프리카 영토를 개척하려면 동서 방향밖에 없었다. 1883년 알제리 동쪽의 튀니지가 프랑스령이 되었고, 뒤이어 알제리 서남부에는 방대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들어섰다. 이에 맞서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점령하고 중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남하를 막았다. 서로의 식민지가 가까워지자 양측은 어떤 식으로든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875년 이집트 왕실이 재정난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내놓자 이를 재빨리 사들였다. 어차피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라는 영국이었으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도 별로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에서 외세 배척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리자, 이윽고 프랑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아프리카를 관통해온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출해온 영국의 종단 정책이 충돌했다. 1898년 군대를 동원한 양측은 이집트 남부의 파쇼다에서 맞섰다. 자칫하면 100여 년 전 북아메리카 대회전이 재현될 판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급박한 사태가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은 이유는 유럽 대륙에서의 마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식민지는 아직도 쌔고 쌨으니까).

 

문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두 나라는 남보다 한참 늦게 통일을 이룬 것도 문제지만 통일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기에 접어들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아직도 해외 식민지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강의 일원이라는 체면상 아프리카 진출에 참여해 동아프리카의 일부를 차지했지만, 식민지 확장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밀려 북아프리카를 포기하고 1896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가 전투에 능한 에티오피아 전사들에 무참히 패배해 열강의 체면을 구겼다. 열강의 땅따먹기 게임이 숨 막히게 진행된 결과, 1910년 무렵까지 아프리카는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세운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이 열강에 의해 분할되기에 이르렀다그 밖에 열강은 아시아에서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인도는 18세기부터 영국의 식민지였고,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네덜란드, 필리핀은 미국이 차지했다. 이에 비해 그전에 상당한 정도의 문명이 존재했던 동아시아는 외세의 침탈을 당했을지언정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열강의 침략을 받지 않은 곳은 서아시아인데, 이는 물론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의 전형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을 지낸 세실 로즈다. 그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대학에 가는 대신 남아프리카로 가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정계에 진출해 총리까지 지냈다. 여러모로 제국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폭풍 전야의 유럽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태풍의 눈이 된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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