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이 경계했던 세 가지
병거삼혹(秉去三惑)
『後漢』. 楊秉字叔節, 震中子也. 桓帝時爲大尉, 每朝廷有得失, 輒盡忠規諫, 多見納用. 秉性不飮酒, 又早喪夫人, 遂不復娶, 所在以淳白稱. 嘗言曰: “我有三不惑, 酒色財也.”
해석
『後漢』.
『후한서』에 실린 이야기다.
楊秉字叔節, 震中子也.
양병의 자는 숙절로 양진의 둘째 아들이다.
桓帝時爲大尉, 每朝廷有得失, 輒盡忠規諫, 多見納用.
환제 때 국방 담당 태위가 되어 매번 조정에 득실이 있으면 대번에 충성을 다해 직간을 하니 환제는 많이 받아들였다.
秉性不飮酒, 又早喪夫人, 遂不復娶, 所在以淳白稱.
성품이 술을 마시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아내를 잃었지만 끝내 다시는 장가들지 않아 있는 곳에서 순박하다 칭송되엇다.
嘗言曰: “我有三不惑, 酒色財也.”
일찍이 “내가 세 가지 미혹되지 않으려는 게 있으니, 술과 여자와 재물이다.”라고 말했다.
해설
청렴한 관리로 최고의 벼슬인 태위 자리에까지 올랐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진외사지(震畏四知)」에서 양진(54~124)이나 「병거삼혹(秉去三惑)」에서 양병(92~165)의 이야기는 어쩌면 관리가 당연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이유 없이 들어오는 금전에 대해 원칙을 고수하며 받지 않는 관리의 이야기가 왜 대서특필될까. 옛날부터 대체로 관리의 부수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지방수령을 삼년하면 손자까지 부유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양씨 부자가 살던 시대는 대대로 천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환관과 외척의 세력이 강하고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최고 벼슬인 삼공을 포함해서 모든 벼슬자리를 사고 팔 정도였으니 그들의 결벽증은 시대에 대한 저항 의식도 담겨 있다.
예전에는 사또의 횡포보다 무서운 것이 아전들의 횡포였고, 지주의 횡포보다 마름의 횡포가 더 무서웠다고 한다. 아랫자리이고 무보수이면서도 콩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자리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청렴하다고 하면 가난을 연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제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줘야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 왜 공무원, 관리에게만 보통 사람보다 철저한 도덕성을 강요하는가? 그것은 그 자리가 미치는 영향 때문이지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 앉아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어렵고도 또 어려운 일이 금전에 관한 태도인 법이다.
자식에게 모범을 보인 아버지, 그 가치관을 이어 받은 자식 모두 받을만한 인물들이다. 가족이 모든 일이 시작이라는 공자님 말씀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속이려 해도 ‘하늘과 귀신과 나와 상대방이 안다[天知神知, 我知子知]’는 구절이나 ‘술과 여자와 재물의 세 가지에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다[我有三不惑, 酒‧色‧財也]’는 구절은 오늘날의 공직자들에게도 변함없이 유효한 경구이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59~60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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