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 별연사고적기鼈淵寺古迹記
鼈淵寺古迹記
해석
江陵府之南有大川 川之南有鼈淵寺 寺之後岡爲蓮花峯 故老傳周元公之母蓮花夫人居于此 故以名峯 而寺卽其故宅也 寺之前有石池 名曰養魚 강릉부(江陵府)의 남쪽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의 남쪽에 별연사(鼈淵寺)가 있으며, 그 절의 뒤쪽 언덕은 연화봉(蓮花峯)이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주원공(周元公)의 어머니 연화부인(蓮花夫人)이 여기에 살았으므로, 이것을 따서 봉우리의 이름을 삼았으며 절은 곧 그 옛집이라고 한다. 절 앞에는 석지(石池)가 있는데 이름을 양어지(養魚池)라고 한다.
故老又言溟州時 有書生游學于此 與室女有約 其父母不知而將嫁之 女以書投池中 尺鯉致于生 得諧其緣 志輿地者信之 載諸古迹
노인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 때에 한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처녀와 혼약을 했다. 그 부모는 알지 못하고 장차 시집을 보내려 하니 여자가 편지를 못 속에 던지자, 1자쯤 되는 잉어가 그것을 물어다가 서생에게 전하여, 그 인연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기록한 이가 이를 믿어 고적(古迹)조에 실어 놓았다.
箋曰 或云咸東原傳霖也 余竊疑之 峯旣以夫人名名之 則寺之爲夫人家明矣 寺構於新羅 則府尙爲東原京 安得曰溟州 而寺之中安有人率室女而居者乎 況咸公國初功臣 原係府籍人 亦安能及見麗初溟州時 而稱之曰游學到此耶 其誣罔之端不一 而訛以傳訛 恨不得博攷掌故 以破其惑也
그 전(箋)에,
“혹은 그 사람은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 1이라 한다.”
했으나, 나는 속으로 이를 의심하였다. 봉우리가 이미 부인의 이름을 취하여 명칭을 삼았으니, 절은 부인의 집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절이 신라 시절에 건축되었으니, 부(府)는 오히려 동원경(東原京)이었을 터인데, 어찌 명주(溟州)라 했을까? 절 안에 어찌 사람이 처녀를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을까? 하물며 함공(咸公)은 국초(國初)의 공신으로 원래 부(府)에 적을 둔 사람인데, 어찌 고려 초의 명주 시절까지 소급하여 그를 보았다고 하며,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한둘이 아니지만, 거짓이 거짓으로 유전하여 왔는데도 널리 장고(掌故)를 살펴 그 미혹된 것을 타파하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歲丙申春 寒岡鄭先生以方伯巡到平昌郡 郡在東原京時屬于府 故郡人至今有言府之事者 先生詢問故牒 得古記於其首吏來示 余乃知府事 李居仁所述文甚多 其中載蓮花夫人事甚詳曰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한강(寒岡) 정(鄭 정구(鄭逑))선생이 관찰사로서 순행하다 평창군(平昌郡)에 이르렀는데, 그 군이 동원경(東原京) 시절에는 부(府)에 속했으므로 군 사람 중에 지금토록 부의 일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옛 첩(牒)을 두루 물어 수리(首吏)에게서 고기(古記)를 얻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었으므로, 마침내 부사(府事) 이거인(李居仁) 2이 쓴 글이 많은데 그 중에 연화부인의 사적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적은 다음과 같다.
新羅時 溟州爲東原京 故留後官必以王子若宗戚將相大臣爲之 而凡事便宜行黜陟 所其隷郡縣有王弟無月郞者幼年來領其任 留務聽佐貳者代理 而率花郞徒 游戲於山水間
신라 때 명주는 동원경이었으므로 유후관(留後官)은 반드시 왕자 및 종척(宗戚)ㆍ장상(將相)ㆍ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맡게 하고 범사(凡事)에 그 예하 군현(郡縣)에는 편의대로 출척(黜陟)하게 하였다. 왕제(王弟) 무월랑(無月郞)이란 사람이 있어 어린 나이로 그 직을 맡았는데, 업무는 보좌관의 말을 좇아 대신 다스리게 하고, 자기는 화랑도를 이끌고 산수간에서 놀았다.
一日獨登於所謂蓮花峯 有處子貌甚殊 浣衣於石池 郞悅而挑之 處子曰 妾 士族也 不可以奔 郞若未婚 可行婚約 而六禮迎之未晩矣 妾已許身於郞 誓不他從也 郞許之 自是問遺不絶 瓜滿 郞歸鷄林 半載無耗 其父將嫁諸北坪家人子 已卜日矣 夫人不敢白父母而心竊憂 以死自定
하루는 혼자 소위 연화봉에 올랐더니 한 처녀가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뛰어났으며 석지(石池)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낭(郞)은 기뻐하여 그 여자를 유혹하였더니, 처녀는,
“저는 사족(士族) 출신이라,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낭께서 만약 미혼이시라면 혼약을 행할 수 있으니,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낭께 몸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데로 시집가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
했다. 낭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에 안부를 묻고 선물 보내기를 끊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서 낭이 계림(鷄林)으로 돌아가 반 년 동안 소식이 없자 그 아버지는 여자를 장차 북평(北坪) 집안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여 이미 날까지 받아놓았다. 여자는 감히 부모에게 사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몰래 걱정하다가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一日 臨池想舊誓 語池中所養金鯉曰 古有雙鯉傳書之言 你受吾養多矣 不可致吾意郞所否 忽有尺半金鯉 跳出池側 口呀呷似有諾者 夫人異之 裂衫袖書曰 妾不敢背約 而父母之命 將不得違 郞若不棄盟好 趁某日至 則猶可及已 不然則妾當自盡以從郞也 納之魚口中 持以投大川 鯉悠然而逝
하루는 연못에 가서 옛날의 맹서를 생각하고, 기르던 연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옛날에 잉어 한쌍이 서신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내게서 양육을 받은 적이 많았으니 낭이 계신 곳에 나의 뜻을 전할 수는 없겠니?”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1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와 입을 딱 벌리는데, 승낙한다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를 이상스럽게 여기고, 옷소매를 찢어 글을 쓰기를,
“저는 감히 혼약을 위배하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령을 장차 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낭께서 만약 맹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달려서 아무날까지 도착하시면 그래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저는 마땅히 자살하여 낭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잉어의 입 속에 넣어 가지고 큰 내에 던졌더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其翌曉 無月郞送吏於閼川捉魚 官索膾魚 有金尺鯉在葦間 官以似郞 鯉挑擲振 迅若有訴者 俄吐沫涎升許 中有素書 異而讀之乃夫人手迹 郞卽携書及鯉 告于王
그 다음날 새벽에 무월랑은 관리를 알천(閼川)에 보내어 고기를 잡아오게 했는데, 관리가 횟거리 생선을 찾다보니 금빛 나는 1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었다. 관리가 낭에게 갖다 보였더니, 잉어는 펄쩍 뛰면서 재빨리 움직여 마치 호소하는 것이 있는 듯했으며 잠시 후 거품을 한 되쯤 토했는데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어, 이상히 여기고 읽어 보니 여자가 손수 쓴 것이었다. 낭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에게 아뢰었다.
王大異之 放鯉于宮池 亟命一員大臣具彩帛 偕郞馳往東京 卽倍日幷行 僅及其期 至則留後以下諸官州父老皆會 帟幕盤筵甚盛 守門吏怪郞來 傳叫曰 無月郞至矣 留後官出迓 則大臣從焉 遂告以具主人 北坪郞已至 大昌急人止之 夫人先一日稱疾不梳洗 母抑之不聽 譴誨方至 聞郞之來 倏起理粧 改服以出 克諧秦晉之好 一府人皆驚以爲神也
왕은 크게 놀라워 하면서 잉어를 궁중의 연못에 놓아주고 빨리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채색 비단을 갖추게 하고 낭과 함께 동원경으로 말을 달려가게 하므로, 즉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겨우 기약한 날짜에 대었다. 도착해 보니 유후(留後) 이하 여러 관리와 고을 노인들이 모두 장막에 모였는데 잔치가 무척이나 성대하였다. 문을 지키는 관리가 낭이 오는 것을 괴상히 여기고,
“무월랑이 옵니다.”
고 소리쳐 전하였다. 유후관(留後官)이 나와 맞이해 본즉 대신이 따라왔다. 드디어 사연을 갖추어 주인에게 알리었다. 북평의 신랑은 이미 도착하였으나, 대신이 사람을 시켜 멈추게 했다. 여자는 하루 앞서부터 병을 핑계대고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강요해도 듣지 않아 꾸지람과 가르침이 한창 더해지는데, 낭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 양가의 혼인을 잘 이루었으므로 온 부중 사람이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었다.
夫人生二男 長卽周元公 季卽敬信王也 方羅王之殂 無嗣 國人皆屬望周元 其日大雨水 閼川卒漲 周元在川北 不得渡三日 國相曰天也 遂立敬信 以周元之當立不立 封于江陵 環六邑以奉之 爲溟原郡 王夫人就養于周元 以其家爲招提 王一年一來省焉 四代國除爲溟州 而新羅已焉
부인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곧 주원공이고 차남은 경신왕 3(敬信王)이다. 바야흐로 신라의 왕이 죽으매 후사가 없자 나라 사람이 모두 주원을 촉망했으나, 그날 크게 비가 내려 알천에 갑자기 물이 불었다. 주원이 알천의 북쪽에 있으면서 건너지 못한 지가 3일이나 되자, 국상(國相)은,
“이것은 천명이다.”
하고, 마침내 경신을 들어세웠다. 이로써 주원은 마땅히 즉위해야 했음에도 즉위를 못하고, 강릉 땅에 봉(封)해져서 주변의 여섯 읍을 받아 명원군(溟原郡)의 왕이 되었다. 부인은 주원에게 가서 봉양을 받았는데, 그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은 1년에 한 번씩 와서 뵈었다. 사대(四代)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고 명주가 되면서 신라도 망했다.
余覩此 始悉養魚池故事 若披雲見日 益知府故老之簡而撰輿地者之陋也 余先妣乃周元之裔 則夫人亦余之祖先也 其敢久加以他人名而溷辱吾所自出乎 因備記 以爲府之掌故云 -『惺所覆瓿稿』 卷之七
나는 이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양어지(養魚池)의 고사를 남김 없이 알게 되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듯했다. 더욱이 부(府)의 노인들이 한 이야기가 간략한 것과 《여지승람》에 편찬된 것이 조잡함을 알게 되었다. 나의 돌아가신 어머님은 주원의 후예이시니, 곧 부인은 또한 나의 조상이 된다. 어찌 감히 오래도록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써 내가 나온 근원을 더럽히고 욕되게 할 것인가? 인하여 갖추어 기록해서 부(府)의 장고(掌故)로 삼는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