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 - 육제묘지명 병서(六弟墓誌銘 幷序)
18살에 요절한 학문적 실력도 있고 효심도 깊었던 아우에게
육제묘지명 병서(六弟墓誌銘 幷序)
김창협(金昌協)
아우의 묘지명이 늦어진 사연
吾弟昌立, 安東人, 先君子領議政諱壽恒第六男也. 年十六, 老峰閔公鼎重, 冠而字之曰: ‘卓而.’ 十七, 西河李公敏敍, 歸以女, 十八, 死. 死後七年, 而有己巳之禍, 禍之日, 先君子顧語昌協曰: “而弟之墓, 余欲誌焉久矣, 顧哀甚不能文, 今已矣, 汝宜卒誌之.”
昌協旣涕泣受命而哀益甚, 愈不能文, 蓋又七年而始克, 敍而銘之云.
문사에 힘을 쏟은 이후의 성취
君爲人美晳俊朗, 幼卽勃勃露鋒鍔. 十歲, 隨先君子南遷, 已能控一驢, 獨馳千里, 及長, 乃更折節爲舒緩. 然其意氣高厲, 常慨然有矯世拔俗之志.
少從諸兄學, 則已聞風雅源流, 古今聲律高下之辨, 知所取舍, 而其識解透悟, 所自得者多矣. 於是悉棄去平日狗馬博雜之好, 專用力於文辭. 旣壹以叔兄昌翕子益爲師, 而倡率里中同志五六人, 日夜游處, 相切劘爲事.
蓋自『三百篇』ㆍ『楚辭』ㆍ『文選』ㆍ古樂府, 以及盛唐諸家, 無不沈浸酣飫, 以放於歌詩. 尤好『太史公書』, 每讀至慶卿高漸離擊筑悲歌事, 輒歔欷慷慨泣下, 顧謂同學者曰: “吾欲與若輩日飮酒, 吟諷「離騷」, 以終吾年, 足矣.” 蓋其意, 於世俗富貴功名, 視之蔑如, 間出游庠序, 屢捷課試而亦不屑也.
친구들의 우정과, 단명의 불행과 다행
然君慈良泛愛, 居家孝謹, 與人交有信義, 尤篤於朋友, 以故從其游者, 莫不誠心愛慕. 哭其死如喪同氣, 至有加麻者.
癸亥正月, 君輒大書于壁曰: “我年十八.” 蓋自勵之辭也, 而竟以是歲十二月廿六日死, 人以爲讖.
君病時, 傍人竊聽其啽囈語, 皆文字間事, 間忽喟然曰, 至高之志, 而不能了其語. 然知其自歎矣. 又見父母焦勞, 輒嗟吁隱痛曰: “吾何貽此憂也?” 其孝心至死如此.
嗚呼! 以君之才與志, 不幸短命, 不得有所成就, 斯誠終古之恨矣. 然以其孝心之篤, 則亦幸而蚤死, 不及見己巳之禍也. 悲夫!
아우의 유고집과 우리집안에 대해
君爲詩歌, 淸婉豪宕, 格高而饒情致. 旣沒, 同志胠其篋, 得數十篇. 就子益删定, 因其所嘗講習之室而名之曰: 『澤齋稿』, 先輩諸公見者, 皆歎息以爲可傳.
墓在楊州栗北里, 距石室先壟數里, 先君子之藏, 在其東數十步.
我金肇自高麗太師諱宣平, 曾祖考諱尙憲, 左議政文正公淸陰先生, 祖考諱光燦, 同知中樞府事, 外祖, 海州牧使羅公星斗, 安定望族也. 君有一女無子, 子益以其子厚謙, 與君爲後, 今九歲矣.
銘曰: “其死也前先君之禍, 其藏也近先君之宅. 嗟爾之夭, 可樂非戚. 是頑然者, 以生爲毒. 涕漬爾銘, 唯哀是告.” 『農巖集』 卷之二十七
해석
아우의 묘지명이 늦어진 사연
吾弟昌立, 安東人, 先君子領議政諱壽恒第六男也.
아우 창립은 안동사람으로 아버지 영의정 휘 수항의 6남이다.
年十六, 老峰閔公鼎重, 冠而字之曰: ‘卓而.’
나이 16살에 노봉 민정중이 관례를 치루어주고 ‘탁이(卓而)’라 자를 지어주었고
十七, 西河李公敏敍, 歸以女, 十八, 死.
17살에 서하 이민서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18살에 죽었다.
死後七年, 而有己巳之禍,
사후 7년에 기사년에 화【기사지화(己巳之禍): 1689년 숙종(肅宗) 15년에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서인(西人)들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해 패배당함으로 정권의 주축세력이 남인(南人)으로 바뀐 역사를 말한다.】가 있었는데
禍之日, 先君子顧語昌協曰:
화가 있던 날 선군께선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而弟之墓, 余欲誌焉久矣,
“너의 아우의 묘소에 내가 글을 지으려 한 지 오래인데,
顧哀甚不能文, 今已矣,
다만 슬픔이 극심하여 짓을 수 없었고 지금은 엄두조차 못 내고 있으니,
汝宜卒誌之.”
너는 마땅히 마침내 짓도록 하여라.”
昌協旣涕泣受命而哀益甚, 愈不能文,
나는 이미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았고 슬픔이 더욱 극심해져 더욱 지을 수가 없었지만
蓋又七年而始克, 敍而銘之云.
대체로 또한 7년이 흘러 비로소 떨쳐내었고 서술하며 묘지에 새긴다.
문사에 힘을 쏟은 이후의 성취
君爲人美晳俊朗,
아우의 사람됨은 아름답고 명석하며 뛰어나고 명랑하였으며
幼卽勃勃露鋒鍔.
어려서는 곧 왕성하게 예리한 모습을 드러내었었다.
十歲, 隨先君子南遷,
10살에 선군을 따라 남쪽으로 갈 때
已能控一驢, 獨馳千里,
자기가 한 나귀를 끌어 홀로 천리를 달리게 할 수 있었으며
及長, 乃更折節爲舒緩.
장성하여선 곧 다시 절개를 꺾어 점차 완만해졌다.
然其意氣高厲, 常慨然有矯世拔俗之志.
그러나 의기는 고매한지라 항상 서글피 세상을 교정하고 풍속을 발본(拔本)하려는 뜻이 있었다.
少從諸兄學, 則已聞風雅源流,
어려서 여러 형들을 따라 배워 이미 『시경(詩經)』 풍(風)과 아(雅)의 원류와
古今聲律高下之辨, 知所取舍,
고금 성률의 높고 낮음의 분별을 듣고 취사할 것을 알았고
而其識解透悟, 所自得者多矣.
식견과 이해력과 투철한 깨달음에 자득한 것이 많았다.
於是悉棄去平日狗馬博雜之好,
이에 평일에 개와 말과 널리 두루 좋아하던 걸 모두 다 버리고
專用力於文辭.
온전히 문사에만 힘을 쏟았다.
旣壹以叔兄昌翕子益爲師,
이미 한결같이 숙형 창흡 자익을 스승으로 삼아
而倡率里中同志五六人,
마을의 동지 5~6인을 창도하며 이끌고
日夜游處, 相切劘爲事.
낮밤으로 놀던 곳에서 서로 절차탁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蓋自『三百篇』ㆍ『楚辭』ㆍ『文選』ㆍ古樂府, 以及盛唐諸家,
대체로 『삼백편(三百篇)』과 『초사』와 『문선』과 고악부로부터 성당의 여러 작가에 이르기까지
無不沈浸酣飫, 以放於歌詩.
술취하고 배부르듯 침잠하지 않음이 없어 시와 노래로 방출했다.
더욱이 『사기(史記)』를 좋아해서 매번 형가【경경(慶卿): 형가(荊軻)로, 조상이 제(齊) 나라 사람인데, 위(衛) 나라로 오면서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경경(慶卿)이라 불렀다.】와 고점리가 축을 타며 슬픈 노래를 한 일【형가는 본디 위(衛) 나라 사람으로 연(燕) 나라에 가 노닐면서 그곳의 개백정(狗屠)으로 축(筑)을 잘 치던 고점리(高漸離)와 친하여 날마다 연시(燕市)에서 그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즐기다가, 뒤에 연 태자 단[燕太子丹]의 부탁으로 그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진왕을 죽이려고 떠날 적에는 또 형가가 슬피 노래하기를 “바람은 쌀쌀하고 역수는 차갑기도 해라, 장사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하고 떠났는데, 그는 끝내 진 나라에 가서 진왕을 죽이지 못하고 자신만 죽고 말았다.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이르러선
輒歔欷慷慨泣下, 顧謂同學者曰:
문득 흐느끼고 강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동학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吾欲與若輩日飮酒, 吟諷「離騷」,
“나는 그대들과 하루내내 술을 마시며 「이소경」을 읊조리고자 하니
以終吾年, 足矣.”
나의 생을 마치더라도 만족하네.”
蓋其意, 於世俗富貴功名, 視之蔑如,
아마도 그 뜻은 세속의 부귀공명 보기를 업신여긴 것 같은 듯하다.
間出游庠序, 屢捷課試而亦不屑也.
간간히 학교로 나가 노닐며 여러 번 과시를 급제했지만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친구들의 우정과, 단명의 불행과 다행
然君慈良泛愛, 居家孝謹,
그러나 아우는 사랑스럽고 어질며 널리 사랑했으며 집에선 효도하고 삼갔으며
與人交有信義, 尤篤於朋友,
사람과 사귐에 신의가 있었고 더욱 벗에게 독실했기 때문에
以故從其游者, 莫不誠心愛慕.
따라 노던 사람들이 성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음이 없었다.
哭其死如喪同氣, 至有加麻者.
죽음에 곡하길 형제에 초상하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는 상복을 입는【가마(加麻): 소렴(小殮) 때 상제가 짚에 삼 껍질을 두른 둥근테인 수질(首絰)을 머리에 쓰는 걸 말한다.】 사람도 있었다.
癸亥正月, 君輒大書于壁曰: “我年十八.”
계해(1683)년 정월에 아우는 갑자기 벽에 “내 나이 18살이다.”라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으니,
蓋自勵之辭也,
아마도 스스로 격려한 말일 테지만,
而竟以是歲十二月廿六日死, 人以爲讖.
마침내 이 해 12월 26일에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언이라 생각했다.
君病時, 傍人竊聽其啽囈語,
아우가 병들었을 적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몰래 앓는 말을 들어보니,
皆文字間事, 間忽喟然曰,
모두 문자 사이의 일이었고 간간히 문득 탄식하듯 말하긴 했는데
至高之志, 而不能了其語.
지극히 고상한 뜻이었지만 그 말을 헤아릴 순 없었다.
然知其自歎矣.
그러나 스스로 탄식한 것만을 알 수 있다.
又見父母焦勞, 輒嗟吁隱痛曰: “吾何貽此憂也?”
또한 부모님이 애쓰는 걸 보고 문득 탄식하고 은근히 통곡하며 “내가 어째서 이런 근심을 끼치는 건가?”라고 말했으니
其孝心至死如此.
효심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았다.
嗚呼! 以君之才與志, 不幸短命,
아! 아우의 재주와 뜻으로도 불행히 단명하여
不得有所成就, 斯誠終古之恨矣.
성취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예로부터의 한이다.
然以其孝心之篤, 則亦幸而蚤死,
그러나 효심의 돈독함으로 또한 다행히 일찍 죽어
不及見己巳之禍也. 悲夫!
기사의 화를 보는 데 미치지 않았다. 슬프구나!
아우의 유고집과 우리 집안에 대해
君爲詩歌, 淸婉豪宕,
아우가 시가를 지음이 맑고 완미하며 호탕하여
格高而饒情致.
격조는 높고 정이 있는 운치는 넉넉하였다.
旣沒, 同志胠其篋, 得數十篇.
이미 죽자 동지들이 상자를 열어 수십편의 글을 얻었다.
就子益删定, 因其所嘗講習之室而名之曰: 『澤齋稿』,
자익이 나아와 산정하고 일찍이 강습한 집을 따라 그걸 『택재고』라고 명명했고
先輩諸公見者, 皆歎息以爲可傳.
선배들의 여러 보는 사람마다 모두 탄식하며 전할 만하다고 여겼다.
墓在楊州栗北里, 距石室先壟數里,
묘소는 양주 율북리에 있는데 석실 선영과 수십 리 떨어져 있고
先君子之藏, 在其東數十步.
선군의 장지는 동쪽 수십 보에 있다.
我金肇自高麗太師諱宣平,
우리 김씨는 고려태조 휘 선평으로부터 시작됐고
曾祖考諱尙憲, 左議政文正公淸陰先生,
증조의 휘는 상헌으로 좌의정 문정공인 청음선생이며,
祖考諱光燦, 同知中樞府事,
조부의 휘는 광찬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外祖, 海州牧使羅公星斗, 安定望族也.
외조부는 해주목사 나성두로 나씨 관향인 안정(安定)의 명망있는 집안 출신【망족(望族): 명망가의 집안을 말한다.】이다.
君有一女無子, 子益以其子厚謙,
아우는 딸 한 명에 아들은 없어 자익은 아들 후겸을
與君爲後, 今九歲矣.
아우에게 주어 후사를 짓게 했으니 이제 9살이다.
銘曰: “其死也前先君之禍, 其藏也近先君之宅. 嗟爾之夭, 可樂非戚. 是頑然者, 以生爲毒. 涕漬爾銘, 唯哀是告.” 『農巖集』 卷之二十七
其死也前先君之禍 | 죽을 적엔 선군의 화가 있기 전이고 |
其藏也近先君之宅 | 묻힌 곳은 선군의 유택에 가깝네. |
嗟爾之夭 可樂非戚 | 아! 그대 요절은 즐거워할 만하지 슬퍼할 건 아니라네. |
是頑然者 以生爲毒 | 완고하게 살아가니 살아도 괴롭기만 하다네. |
涕漬爾銘 唯哀是告 | 너의 명에 눈물 흘리니 오직 애달픔만을 고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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