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고고학
고고학
이처럼 경계를 허묾으로써 푸코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배제된 타자에게 다시 ‘동일자’의 자리를 주고 복권시키려는 것일까요? 병원에 수용당하길 거부한 광인이나 차별에 고개 숙이길 거부한 흑인, 혹은 규율에 따르길 거부한 범죄자를 새로운 정상인의 모델로 승화시키려는 것일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동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영역, 비정상과 동일시되던 ‘외부’여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하던 영역을 다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동일자를 새로이 사고할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던 것이 얼마나 일관되지 못하고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동일자’ 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동일자 자체를 해체시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주로 데리다가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다른 하나는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 그리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 갇혀 버린 타자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동일자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양자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경계선이 어떤 식으로 그어졌나를 통해 타자와 동일자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푸코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반합리주의자’ ‘반계몽주의자’라는 푸코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상을 단지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의 반대물로 만들고 있을 뿐이란 점에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즉 이성과 비이성, 계몽과 몽매 사이의 경계선 자체를 허물려는 푸코의 노력은 그 경계선을 인정한 위에서 이성 아닌 비이성, 계몽 아닌 반계몽을 지지하는 반합리주의자의 태도와 전혀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후자는 이성/비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분법을 똑같이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나 계몽주의를 거울에 비춘 모습일 뿐이며, 그것들의 소박한 보충물입니다. 마치 낭만주의가 이성주의나 계몽주의의 대칭적 보충물이듯이 말입니다.
▲ 길을 행진하는 KKK단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은 영화사의 초기를 장식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영화의 내용은 노예해방으로 인해 오만해진 못된 흑인들과, 그들의 불의를 못 참아 궐기한 KKK단의 탄생과 승리를 그리고 있어서 의무감에 하품을 참으며 보던 사람을 당혹하게 만든다. ‘국가의 탄생’, 그것은 백인 국가의 탄생이고, 백인 아닌 것들을 처단하고 제거하는 폭력장치의 탄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1923년에 찍힌 저 사진에서도 KKK단은 충분히 야만적인 가면과 복장을 한 채, 검은 동물 들을 처단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백색, 그것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동일자의 권력이다. 다만 그들의 가슴에 단 표시나 바지와 구두마저 그 자랑스런 흰색으로 칠하지 않은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아니, 검고 흉한 눈동자도, 붉어서 불온해 보이는 입술도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면 더욱더 완벽하게 인종적인 순결성과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한 듯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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