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1부, 3장 새로운 판 짜기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0:55
728x90
반응형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카데시 전투 이후 오리엔트의 쌍웅인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묘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탓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카데시 전투 이외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내부의 문제가 있었다. 이집트는 종교 사제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국가의 기틀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원래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신은 태양신인 레(또는 라)였는데, 여기에 테베를 수도로 삼은 중왕국 초기에 테베의 수호신이던 아몬을 덧붙여 아몬-레 신앙이 생겨났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4세는 수백 년간 섬겨오던 아몬-레를 버리고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또 다른 태양신인 아톤을 받아들이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아크나톤이라고 바꾸고 수도도 아마르나로 옮겼다.

 

정권은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지만 생활은 다르다. 아멘호테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의 신앙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았고, 그의 돌출 행동은 결국 당대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권좌에 복귀한 아몬-레 사제들은 예전보다 더욱 큰 권력을 휘둘렀다. 상대적으로 한때 신적인 존재로 군림한 파라오의 권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고대 세계에 왕권의 쇠퇴는 곧 국력의 쇠퇴나 다름없었다. 실패한 종교개혁이 이집트의 약화를 초래한 것이다.

 

반면 이집트보다 역사적 전통에서 훨씬 뒤질뿐더러 원래부터 정복 국가로 출범한 히타이트는 모 아니면 도의 노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즉 정복에 나선 김에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이룬다면 강력한 통일 제국으로 승격되어 장기 집권이 보장되는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지역의 패자라는 지위도 유지하기 어려운 운명이었다. 카데시에서 이집트를 격파하지 못한 것은 이미 히타이트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이런 내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실은 그보다 더 큰 바깥의 문제가 두 나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바로 해상민족이라고 알려진 동부 지중해상의 고대 해적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만한 문화적 역량은 갖추지 못했으나 병든 사자쯤은 괴롭힐 수 있는 사나운 하이에나였다. 이집트는 기원전 12세기 제20왕조 때부터 이 하이에나들의 거센 침략을 받아 그렇잖아도 쇠락해가던 국력이 한층 급속도로 추락해갔다. 히타이트의 형편은 더 나빠서 기원전 1190년경에는 해적들에게 수도를 함락당할 정도였다. 결국 히타이트는 얼마 못 가서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2세기에 당시 세계 최강국인 두 나라를 괴롭히고 에게 해와 동부 지중해를 주름잡은 이 정체불명의 해적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아직 역사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짐작은 가능하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기원 전 12세기 무렵 미케네 문명을 이룬 그리스인들은 해상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것은 당시 문명의 오지인 그리스 측에서 보면 해상 진출이지만,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오리엔트 세계 측에서 보면 해적질이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는 그 해적질 중 하나인 트로이 전쟁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여인인 헬레네를 빼앗아간 탓에 그리스의 영웅들이 응징하러 간 것으로 묘사했지만, 호메로스가 이집트나 아라비아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해석했을까기원전 5세기의 기록인 투키디데스(Thucydides, 기원전 460년경~ 기원전 400년경)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면 이 점에 관한 추측을 얻을 수 있다. “연안이나 섬에 거주하고 있던 옛 헬라스(Hellas: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를 부른 이름)인들이나 바르바로이들은 배로 서로 활발히 왕래하게 되자, 자기 이익이나 피보호자의 부양을 위해 영향력이 강한 자가 우두머리가 되어 해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들은 방벽이 없는 도시나 촌락을 침입해 약탈하고, 이것을 주된 생활의 수입원으로 삼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러한 약탈 행위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종의 명예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 해적 도자기에 그려진 오디세우스의 귀향 장면이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여 있고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호메로스의 시 오디세이아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실상 당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았던 그리스 해적들의 활약상이나 다름없다.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키클로페스나 세이렌 같은 괴물들은 그들과 싸운 다른 해적들이었을 것이다.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몰락하는 자가 있다면 흥기하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쇠퇴는 오리엔트 세계에 힘의 진공 상태를 빚었다. 특히 히타이트의 붕괴는 그들만이 보유하고 있던 제철 기술을 오리엔트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켜 본격적인 철기 문명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마침 제3세력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동부를 장악한 카시트도 기원전 13세기에 엘람과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상태였다. 상위 랭커들이 몰락하는 것은 하위 랭커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틈타 흥기한 세력은 누굴까?

 

비옥한 초승달이 부풀기 시작하던 무렵, 지중해 동부 연안에도 문명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이지역에는 우가리트, 티로스(티레), 시돈, 비블로스, 베리토스 등 여러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인 통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일종의 도시 연맹체를 이루어 일찍부터 동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에 나섰는데, 이들을 총칭해 페니키아라고 부른다페니키아는 지역의 명칭이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페니키아인은 셈족 계열의 가나안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는 오래전부터 혼혈이 이루어졌으므로 구분이 별 의미는 없다.

 

페니키아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와 무역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오리엔트 세계의 선진 문명이 지중해의 여러 섬, 특히 크레타에 전파되었다. 원래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페니키아 상인들은 오늘날 서구 문명을 낳은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범한 산파가 아니었다. 산파라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페니키아 산파는 그 아이에게 중요한 선물까지 주었다. 바로 서구문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알파벳을 발명해 유럽에 전한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상의 필요 때문에 장부 기재용으로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본떠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리스에 전해져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쌍웅 체제가 오리엔트 일대를 지배할 때도 페니키아는 그들에 복속되지 않았다(물론 어느 하나로 통일되었더라면 그 휘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이유는 페니키아가 오리엔트의 대권 주자를 선택하거나 지지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말하자면 너무 약했기 때문에 강대국에정복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역설이지만 사실이다. 페니키아는 단일한 정치적 중심을 가진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강대국들이 적수로 삼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본연의 경제적 역할에 충실한 편이 강대국들에 더 이득이었으므로 굳이 페니키아를 제압해 지중해의 상업 활동을 위축시킬 이유는 없었다. 근대적 관점으로 보면 페니키아를 정복해 국제무역을 독점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고대에는 그런 발상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고래들이 싸우던 시절에 안전했던 새우는 막상 적들이 없어지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일단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무너진 뒤 페니키아 상인들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느슨한 결사체에 불과한 페니키아는 물리력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때 무역의 필요에 따라 용병을 고용하는 게 고작이었을 뿐, 무기는 물론 상비군 조직도 갖추지 않았다. 이런 판에 이집트와 히타이트를 괴롭히던 해상 민족들이 침략하자 페니키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기원전 12세기부터 페니키아는, 무역은 갈수록 활발해지면서도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처할 힘은 여전히 부족한 처지였다. 심지어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는 비극도 몇 차례 겪었다. 그런데 위기를 타개하는 페니키아인들의 방법은 엉뚱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그들은 오히려 지중해 서부까지 세력을 확장해 지중해 연안 곳곳에 식민시를 건설했다. 그들의 발길은 멀리 에스파냐에까지 미쳤는데, 로마 초기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도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시로 출발했다. 문자에서 통상까지,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에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뿌리는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알파벳의 어머니 그리스의 청동판(왼쪽)과 도기에 새겨진 알파벳(오른쪽)이다.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에 전해진 초기의 문자 형태에 해당하는데, 지금의 알파벳과 큰 차이가 없다. 기원전 8세기경의 물건이므로 얼추 호메로스의 시대에 해당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 알파벳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알파벳을 만들고 오리엔트 문명을 지중해 일대에 퍼뜨린 공적이 없었더라면 역사에서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아주 작게 언급되고 넘어갔을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실체 자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민족이 하나 더 있다. 헤브라이(히브리)라고 불리는 민족이다.

 

지금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헤브라이인들 역시 페니키아인들처럼 당대에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세력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페니키아의 알파벳에 못지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유산을 서구 문명에 전달했다. 바로 그들의 독특한 유일 신앙인 유대교다. 유대교의 신앙과 헤브라이인의 역사를 서술한 경전은 구약성서이고,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종교는 그리스도교다. 종교가 아니었더라면 후대의 역사에서 헤브라이라는 이름은 아예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약성서를 통해 후대에 강력한 정신적 영향력을 미친 덕분에 헤브라이인의 역사는 당대에 그들이 가졌던 세력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것도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라비아를 고향으로 하는 셈족의 한 갈래인 헤브라이인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으로 이주해왔다.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이집트의 영향권에서 나라를 이루어 살면서 특별히 인상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히타이트가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라 이집트와 팽팽한 긴장 상태를 조성하면서 대치하던 기원전 13세기 무렵(카데시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이미 그 이전부터 상당수 헤브라이인들은 상국인 이집트에서 노예나 하층계급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람세스 2세의 치세에 그들은 람세스의 친구인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에서 대규모로 탈출한다. 이 내용은 구약성서출애굽기에 전해진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랬듯이, 당시는 정치적 지도자가 곧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정교일치의 시대였다. 모세는 자신이 신에게서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을 내보이기 위해 십계명을 만들고 정치적 지도자를 겸했다. 그들이 오리엔트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후대에 생겨나는 또 다른 일신교인 이슬람교의 경우 지금까지도 정교일치의 성격이 남아 있다). 이후 모세는 민족을 이끌고 40년간 유랑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들어가 120세의 나이로 죽는다(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둔 채 죽었다는 설도 있다).

 

 

모세와 십계명 원래 양치기였던 모세(왼쪽)는 바다(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힘으로 이집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나이 산(오른쪽)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이 산 꼭대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종교적인 설명은 이렇지만, 실은 그가 바로 십계명의 작자였던 게 아닐까?

 

 

그러나 약소민족으로서 가나안에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헤브라이인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이웃의 팔레스타인이었다구약성서의 블레셋과 페리시테, 영어의 필리스틴(Philistine) 등은 모두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데, 다 부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심지어 Philistine이라는 말은 잔인한 놈, 속물이라는 뜻의 일반 단어로도 쓰인다. 그리스도교의 자기중심주의와 배타성을 보여주는 예다. 이국에서의 오랜 노예 생활과 40년간의 유랑 생활을 겪고서 새 터전을 찾은 헤브라이인들에게는 혹독한 이웃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고 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견디다 못한 헤브라이인들은 그 지역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라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11세기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사울을 초대왕으로 추대했다.

 

사울이 팔레스타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뒤이어 즉위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은 비로소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영토를 확장하고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한 것이 다 다윗의 공로였다(그가 거인 골리앗을 팔매질로 죽인 것은 그 공로를 상징하는 동시에,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약소민족 유대인의 처지를 상징한다). 3대 왕인 솔로몬의 시대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해 새 나라의 기틀이 확고해졌다.

 

구약성서에는 이런 내용이 아주 상세하고 거창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당시 팔레스타인 일대가 그렇듯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오리엔트의 중심권에서 먼 변방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 단적인 예가 다윗과 솔로몬의 즉위 과정이다. 이들은 왕위를 세습한 게 아니라 추대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지금은 추대가 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사에서는 왕권이 강한 국가가 선진국이므로 왕위 세습이 추대보다 더 발달한 왕위 계승 제도다. 기원전 10세기라면 오리엔트는 물론 중국(주나라)에서도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취약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던 이스라엘 왕국에 다시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을 탓할 이유가 없다. 이웃의 괴롭힘이나 침략이 아니라 내분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통치 말기인 기원전 933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려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 남쪽에는 유다 왕국으로 분립한다헤브라이 민족은 신의 명에 따라 12개 지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10개 지파가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에 참여했고, 유다파와 베냐민파는 유다 왕국을 세웠다.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10개 지파는 뿔뿔이 흩어져 역사에서 사라졌는데, 이 사라진 10지파에 관한 전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네스토리우스교도나 모르몬교도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근대까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를 이룬 에티오피아인들이 그들이라는 설도 있다. 심지어 그들이 아메리카와 일본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여기까지는 고통과 수난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조상들처럼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처럼 살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오리엔트 세계가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격변기였다.

 

 

골리앗을 눕힌 다윗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윗)이다. 돌팔매로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을 쓰러뜨린 직후의 모습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이야기가 무슨 커다란 사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실상 다윗은 지역의 우두머리에 불과했고, 당시 이스라엘 왕국도 아주 미미한 존재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