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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문학이 문을 열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문학이 문을 열다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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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 문을 열다

 

 

14세기 벽두에 피렌체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신곡 (La divina commedia)이라는 방대한 서사시를 지었다. 그전에도 영국의 영웅서사시 베오울프(Beowult)라든가 프랑스의 무훈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등과 같은 중세의 서사시는 간혹 있었으나, 그것들은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 여러 차례 살을 붙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신곡 처럼 지은이가 분명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곡은 분량에서도 그것들의 세 배가 넘었다.

 

또한 신곡은 중세의 서사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질적으로 달랐다. 하나는 신의 희곡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의 영역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신곡은 단테 자신이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참된 종교적 승화를 이루는 내용이다신곡에서 단테가 참된 신앙을 부르짖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대가 참된 신앙을 가능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당시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황제파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교황파로 나뉘어 격심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59쪽 참조), 피렌체의 정치인으로 황제파에 속했던 단테는 1301년 교황파가 피렌체의 정권을 차지하면서 시에서 추방된다. 이후 어려운 망명 생활에서 집필한 작품이 바로 신곡이었으므로 당연히 교황이 지배하는 현실의 종교는 부정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처럼 인간이 이성의 힘을 통해 신이 관장하는 세계를 그려낸 작품은 그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한다 해도 시도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단테에게 지옥을 안내하는 인물이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Maro Vergilius, 기원전70~기원전 19)라는 점이다. 베르길리우스라면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모험을 그린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작가이므로 말하자면 그리스 정신으로 충만한 로마의 시인이었다. 단테는 아이네아스가 저승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베르길리우스를 지옥의 안내자로 설정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염두에 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 고전을 매개로 신의 영역을 묘사한다! 신곡의 이런 구도는 이미 중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단테의 한 세대 다음 인물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

1374)와 보카치오(Giovanni Boccactio, 1313~1375)에 이르면 르네상스정신은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다. 호메로스 플라톤ㆍ세네카ㆍ키케로 등 그리스와 로마의 고문헌을 열심히 수집하여 연구했고, 고전 사상과 문학에 해박한 페트라르카는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적 형식에서도 르네상스의 특징인 인문주의(humanism)의 경향성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또 보카치오는 데카메론(Decameron)에서 현실의 종교, 즉 성직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교황에서 거지까지, 귀족에서 하인까지 이르는 사회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을 화자로 동원하고 있으므로 신곡에 빗대어 인간의 희곡’, 인곡(人曲)’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후대의 학자들은 페트라르카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말하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부른다).

 

 

단테와 신곡 희곡 작품 신곡에서는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를 각각 지옥, 연옥, 천국의 안내자로 설정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단테가 자신의 세계를 직접 안내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건물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문학을 통해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모두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시들인 피렌체와 아레초 출신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바로 북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발원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 왜 르네상스는 북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을까?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르네상스의 경제적 배경을 이루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 있다 (22쪽 참조). 그러나 그 점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르네상스의 배경일 뿐 르네상스를 유발한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측면에만 주목하면 르네상스의 원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당시 북해 무역을 독점하면서 북이탈리아에 못지않게 번영을 누리고 있던 플랑드르의 자치도시들에서는 왜 르네상스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차이는 바로 정치적 측면에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독일(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왕조로 있던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말까지 제국과 로마 교황청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제국은 교황청을 신성 로마로 여기지 않았고, 교황청은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로마의 간판을 내건 세속과 신성은 실상 세속의 지배자자리를 놓고 서로 격렬히 싸웠다. 가장 큰 피해자는 전장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북부였다. 중부는 교황청이 지배했고, 남부는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었으나,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북부는 정치적으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정치적 공백’(통일된 정치권력이 없다는 의미에서) 덕분에 북이탈리아에는 일찍부터 자치도시들이 생겨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아무래도 교황과 독일 황제의 대립 속에서 이리저리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양측의 내부에서 중요한 정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독일에서는 세습 왕조가 끝나면서 영방국가 체제가 들어섰다. 독일이 분권화의 길을 공식적으로 택함으로써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전보다 약해졌다. 교황청에서는 더 큰 변화가 있었다. 독일 황제보다 훨씬 단순무식한 방법을 구사한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 의해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간 것이다(73쪽 참조). 프랑스가 교황청을 관할하게 되면서 북이탈리아는 그전보다 한결 숨통이 트였다. 두 가지 사건 모두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일어났다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이탈리아인의 해방감을 보여주는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1347년 로마의 호민관이 된 리엔초라는 청년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부활을 꿈꾸었다. 실제로 그는 아비뇽 교황청과 독일 황제의 지지를 모두 얻어 신성과 세속의 조화에 바탕을 둔 위대한 로마를 재현하고자 했다. 이상은 좋으나 엄청난 시대착오였다. 결국 그는 권력을 잃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간신히 살아났으나 시민들의 폭동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당대의 페트라르카도 그에게 지지를 보냈을 뿐 아니라, 19세기 위대한 독일의 이념을 지지한 작곡가 바그너는 리엔초의 극적인 생애를 <리엔치>라는 오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북이탈리아에 잠복해 있던 르네상스의 물꼬가 트였다. 본래 이곳은 옛 로마 문명의 고토이므로 다른 지역보다 고전문화의 전통이 강했고, 로마 시대의 유적과 유물도 많았다. 한마디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난 곳이었던 것이다(또 하나의 뿌리인 그리스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이런 조건은 문학이 문을 연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술이 르네상스의 대표주자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르네상스의 두 영웅 최초의 근대인페트라르카(왼쪽)최초의 근대 소설가보카치오(오른쪽)의 초상이다. 물론 이들이 없었다 해도 근대는 왔겠지만, 이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첫 삽을 뜨고 기초공사를 튼튼히 다진 인문주의의 영웅들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부활인가, 개화인가

문학이 문을 열다

사실성에 눈뜨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인간 정신의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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