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교육(敎育)

회복적 생활교육을 만나다 - 4장 교사가 변화할 때 성장하는 아이들

건방진방랑자 2024. 9. 26. 10:09
728x90
반응형

 4장 교사가 변화할 때 성장하는 아이들

 

 

1. “저희가 진정 원하는 건, 게임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이익이 되길래. 학생들에게 이것은 하도록 또는 저것은 하지 못하도록 요구하는가? 이 질문에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학생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대답이다.

- 알피 콘

 

 

아이들과의 싸움에서는 밀려서는 안 돼. 아이들과의 기 싸움에서 이 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이 아이에게 휘둘리게 될 거야.’ 내게 떠오르는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과 갈등이 분출되어 긴장하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를 지배해서 아이와 격돌하게 했다. 결국 나는 학생과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하지만,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았다. 잠시 안심은 되지만. 그 학생과의 관계에서 내가 풀어야 할 숙제는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꼬이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폭력에 대해 더 강한 폭력으로 대응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렇듯 견고한 폭력패러다임을 유지한 채 더는 학생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사의 요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알피 콘에 의하면, 교사들 대부분은 생활지도의 방점이 어떻게 학생 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교사의 말을 잘 따르게 할 것인가?”에 있다고 한다. 학생을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권리를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어른들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학생에 대한 수동적 이해는 결과적으로 통제적이고 권위적인 생활지도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알피 콘의 이야기를 빌렸지만, 우리의 학교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경우가 더 권위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동 안 협동 학습을 활용한 수업을 해 왔다. 협동 학습이란, 학생 간의 협력적 상호 작용을 이끌어 내는 훌륭한 관계적 배움의 도구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나는 훌륭한 협동 학습 기술을 통제의 도구로 많이 사용해 온 것 같다.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움직이게 했고, 보상으로 학생들을 조정해 왔다. 나의 초점은. 학생들이 나의 의도대로 효율적으로 따라오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학생들이 교사의 요구에 잘 따라와주지 않는다. 교사의 요구에 왜요? 내가 왜 해야 되요?”라고 대꾸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학생은 교사의 말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라고 믿어왔던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ㆍ지도에 대해 자신의 다른 생각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과 선택의 자율성이 존중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은 없다. 그런 그들에게 교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의가 없다거나 말대꾸한다거나 하는 교사의 반응은 오히려 학생들과 관계만 훼손하게 만든다. 알피 콘은 교사에게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1. 교사의 요구가 정당하고 합리적인가?

2. 교사의 교육 방식이 학급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3.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한 흥미롭고 도전적인 교육 과정을 구성했는가?

 

이 질문은, 이제껏 교사에게 익숙해 있던 학생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서 벗어나서 다른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질문을 토대로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1. 교사의 요구가 정당하고 합리적인가?

나는 새 학기만 되면. ‘지각하지 않기를 학급의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 강조한다. ‘지각하지 않기규칙은 학생들과 합의해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각하지 않기는 그것 자체로 교육적 의미가 있다고 여겼고, 학생들에게 당연한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규칙을 통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학급의 효율적인 통제였다.

 

2. 교사의 교육 방식이 학급의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작은 규칙, 지각하지 않기하나만 철저하게 지키도록 한 결과.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질서가 잡혔다. 지각한 학생은 조례 시간 전까지 복도에 서 있다가 교실에 들어온다. 복도에 서 있는 것은 비록 간단한 벌이지만, 그로 인해 교실은 아침부터 조용해지고 경직된다. 2년 정도 나의 학급 운영 방식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3년차가 되면서 부작용이 발생했다. 지각의 기준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 논란이 생겼고, 지각 체크를 맡았던 학생은 친구들로부터 관계가 멀어지고 잦은 분쟁이 발생했다. 분쟁 해결을 위해 담임교사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럴수록 학생들은 뻔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나는 교실에서의 잦은 분쟁이나 학생들의 거짓말을 학생들의 부족한 도덕성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합의하지 않은 규칙을 강요하고, 어겼을 때는 벌을 주는 나의 학급운영방식이 교실환경을 불안하고 경직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한 흥미롭고 도전적인 교육 과정을 구성했는가?

학급 운영 대부분은 담임교사가 기획하고 결정한 뒤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나름 즐겁고 공부 잘하는 학급을 만들겠다고 기획하지만, 그런 교사로서의 열정은 교사인 나를 위한 것이었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 나의 지나친 열정은 학생들을 부담스럽게 했고, 학생들을 더욱 대상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의 학급 운영 사례만을 가지고 세 가지 질문에 비추어 성찰해보았지만, 결과는 너무 부끄럽고 당혹스럽다. 학생들의 수업 시간은 어떤가? 왜 그들은 배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까? 학교는 어떤지, 학생들은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학생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다. 수업도 학교도 정작 교육 주체인 학생을 소외시킨 채. 어른들의 욕구만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무엇을 원할까?

 

알피 콘은 교사의 요구를 어떻게 하면 학생이 잘 따르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학생을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대신에 학생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학생들의 요구와 필요를 어떻게 건강하게 채울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를 질문하라고 말한다. 즉 이러한 질문은 지각하지 않기의 규칙을 학생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어떤 학급이 되기를 원하는지 먼저 질문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꿈꾸는 학급을 만들기 위한 대화의 장을 열고. 학생 스스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논의하고 결정하도록 하라는 의미다.

 

책임감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에서 그들에게 발언권을 허용함 으로써. 그리고 선택권이 있다고 말해주는 곳이면 어디서나 키워진다.

-수라 하트ㆍ빅토리아 킨들 호드슨, 정채현 옮김, 내 아이를 살리는 비폭력 대화. 아시아코치센터 2009, 77

 

하임 기너트의 말처럼 학생들에게 자율성은 책임의식을 증진시키지만, 통제는 학생들의 책임의식을 저하시킨다.

 

뒤돌아보면, 그동안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지시와 요구는 많이 해 왔지만, 학생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따르지 않는 학생들로 인해 화가 났고 벌을 주려고 했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요구는 대부분 공부와 상관없는 것들이라서 요구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요구를 묻거나 들어주는 것에 대해 교사에게는 몇 가지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아이들의 요구는 당연히 공부와 상관없거나 방해가 되는 게임이나 ’, ‘간식이런 것일 테다. 그러한 것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묻지 않는다.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묻게 되면,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거짓말쟁이 교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 둘째, 아이들의 요구를 묻고 들어주는 방식은 학생들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것을 한 번 들어주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주 요구한다.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몇 번 사주었더니 아이들은 당연히 교사가 사주어야 하는 것처럼 여겼다. 미하 학생들의 요구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게임이 그들의 요구인가? ‘잠자기가 그들의 요구인가? ‘간식이 그들의 요구인가? 물론 학생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게임, 잠자기, 간식을 원한다고. 교사는 학생들의 진정한 요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게임을 통해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1)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성취감과 존재감

아이들은 게임을 통해 많은 성취감을 경험하고 있고, 게임을 잘하는 학생은 존재감도 충족된다. 반면에 학교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성 취감을 경험할 수가 없다. 오히려 좌절감과 낭패감으로 수치심과 존재의 무가치함을 경험하고 있다.

 

2) 소통. 우정, 소속감, 유대

게임을 알지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 끼어주지 않는 게 요즈음이다. 게임은 친구와의 소통과 유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다.

 

3) 재미

게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다.

 

4) 여유와 휴식

 

어느 때보다 학업에 대한 심한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게 임은 잠시라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와 휴식을 제공해준다.

 

학생들의 진정한 욕구와 필요는 게임 자체라기보다는, 성취감, 존재감, 소통, 우정과 소속감, 재미와 여유, 휴식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학교의 교육 과정 속에서 경험된다면, 학생들은 굳이 게임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학생들은 우리의 교육으로 인해 수치심, 단절, 지루함, 압박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를 반성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학생들은 생기와 희망이 아니라, 수치심과 단절에 노출되어 있고 내면화되어 있다. 학생들이 무엇에 목마르고 있는지 교사가 볼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학생들이 기성세대와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도록 길들여 왔다. 그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잃고, 자신과 단절되는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과 역사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마치 정답이 있는 양 가르치거나 통제해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세상과 역사에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올라오는 필요와 요구를 교육적으로 건강하게 풀어줄 수 있는 배움의 공간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는 학생의 요구와 필요를 묻고, 교육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고민을 하자. 학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연구하자.

 

 

 

 

 

2. 교사는 공간을 창조하는 자

 

 

내면적인 변화에 관련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당신의 동료나 다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은총과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변화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뿐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공간이 주는 힘

 

공간이 주는 힘 우리 반에는 다양한 체크리스트가 있다. 지각하지 않기, 급식 잔반 남기지 않기, 수업 시종 지키기, 수업 중 지적받지 않기, 과제 미제출자 등등. 아이들의 일상생활을 꼼꼼하게 나누어 체크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 면 통계를 내서 상벌을 주거나 생활 지도에 활용하였다 체크 리스트 관리는 학생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담당했고, 체크 리스트 누계는 교실 한쪽 벽면에 붙여놓아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체크 리스트 방식이 나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급식 시간, 두 학생 사이에 실랑이가 붙었다. 우리 반은 음식을 남기는 사람을 체크하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급식 잔반을 검사하는 과정에 티격태격하더니 결국에는 서로 욕설을 주고받다가 멱살까지 잡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그 후에도 자주 발생했다. 체크하는 학생과 체크 당하는 학생 사이에 갈등이 빈번해졌을 뿐 아니라, 평소 친한 친구는 규칙을 어겨도 봐주고 관계가 좋지 않은 친구에게는 과잉 규제를 하기로 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학생이 체크 리스트 담당자가 되면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일도 발생했고, 자신이 규칙을 위반했을 때는 아예 기록하지 않는 일도 생겼다. 힘센 학생의 규칙 위반에는 침묵하고. 힘이 없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학생은 책임 전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학급 대부분의 분쟁 씨앗은 체크 리스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체크 리스트 중심으로 학급 운영을 할수록 학생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분위기가 늘어났고. 그로 인해 학생 사이의 관계성이 깨지고 서로에 대한 미움과 비난으로 가득해져 갔다. 그 이후로 나는 몇 년 동안 학급 운영에 적용해 왔던, 일명 체크 리스트 학급운영를 그만두게 되었다.

 

교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교사의 학급 운영 방식은 학생들의 관계 패턴과 학급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교사는 학생들의 행동을 문제 삼기 전에 자신이 만들고 있는 교실 공간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침은 공간을 창조하는 것

 

왜 나는 학생들을 변화시키지 못할까?’의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절망스럽게 했다. 왜냐하면 교사는 학생을 변화시켜야만 하고, 그렇지 못하면 교사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느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만 교사로서 변화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커 파머가 가르침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가르침은 배움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고, 교사는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공간일까?

 

첫째. 안전한 공간이다.

배움은 학생이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배움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안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안전해야 한다. 안전한 공간에서 학생들은 거짓 자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참된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참된 자아는 공동체에서 수용되고 지지 받으면서 건강하게 확장되고 성장하게 된다.

 

파머가 “‘e-ducate(교육한다)’라는 본래 의미는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불러낸다는 것이다1회 삼선배움과나눔재단 심포지엄 흔들리는 터전에서 고요한 중심 잡기자료집, 2010, 93라고 말한 것처럼, 교사는 학생들 내면의 참된 자아를 밖으로 불러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안전하고 신뢰가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한 공간을 지키는 교사는 학생들의 내면을 살피는 공감자이다.

 

둘째, 소통과 대화의 공간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가르침이 아니다. 지성, 감성, 영성이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온전한 배움과 성장이 일어난다. 교사는 이를 위해서 지식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교사-학생-사물(세상)’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학급 안에서는 각기 다양한 목소리가 수용되고 소통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의 경험과 지혜가 존중받고 소통되는 과정은 개인의 주관성을 객관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리고 공동체는 문제 해결의 새로운 가능성과 공동의 지혜를 발현시킨다.

 

소통과 대화의 공간을 지키는 교사는 권위적인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생과 함께 배움의 세계를 탐험하는 공동의 탐구자이자 소통을 돕는 대화 진행자다.

 

셋째, 사랑과 평화의 공간이다.

교실에는 많은 긴장과 갈등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특별히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학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고 수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답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교사의 뜻대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갈등과 긴장의 순간에 교사가 섣불리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개입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배움과 성장을 위해 기다려주고 잘 견뎌주어야 한다.

 

또 한 번 언급하게 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처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은총과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변화를 위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위해 교사는 감정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평화의 공간을 지키는 교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평화의 중재자이다.

 

왜 나는 학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고민 밑에는 나는 교사로서 학생을 변화시켜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 밑에는 억압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깔려 있었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힘에 의한 변화는 일시적으로 가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성장하도록 돕지 못한다. 삶에 있어서 우리의 본성과 단절된 수동적인 객체로 사는 학생들이 많아지면 결과적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해치게 된다.

 

교사는 학생의 변화와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이때 변화와 성장은 교사가 학생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배움의 공간을 만들어주었을 때 오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학생을 배움의 공간으로 초대하라. 그곳에서 교사가 공감자로. 공동 탐구자로, 대화 진행자로, 평화의 중재자로 존재하라. 그럴 때 비로소 학생들은 초대에 기꺼이 응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학생은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교사와 함께 즐겁게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3.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기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의 수단이다.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답을 전달하는 교사, 질문하지 않는 학생

 

이제껏 교사들은 답을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암기하도록 했다. 모든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교사가 훈련을 시키면 학생은 훈련을 받고, 교사가 말하면 학생은 듣기만 하면 된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질문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더는 인식의 주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도덕 교사로서 오래도록 학생들에게 수많은 도덕 덕목들을 가르쳐 왔다. 절제와 아량. 믿음과 의리, 예의와 염치, 청렴과 검소, 효도 와 어른 공경. 이러한 덕목들을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왔지만, 현재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도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학생문화는 갈수록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

 

왜 학생들은 많이 배울수록 인격적으로 성숙해지지 않는 것일까?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대화 방식(praxis)에는 성찰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praxis는 이 양자가 상호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 이론적 실천, 성찰적 이론. 성찰적 실천을 의미한다.의 교육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했다. , 학생들은 삶의 경험과 동떨어진 이론만 암기하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은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세상과 삶으로 연결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하고 도전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지식은 단지 시험 볼 때 필요할 뿐이다.

 

실재(reality)는 관계적으로 존재한다. 관계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상호작용, 또는 관계적 배움을 통해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학생들도 사물에 대해 탐구하고 배울 때, 관계적 방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 사물에 질문하고, 서로 다른 생각들을 소통하고 대화할 때, 그 사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학생들의 삶과 관계하면서, 학생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수많은 도덕 덕목들은 학생들의 삶과 단절된 채 의미 없는 단어로만 학습되어 왔던 것 같다. 가령 청렴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청렴은 내 삼 속에서 어떻게 경험되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청렴은 어떤 모습인지, ‘청렴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꼭 필요한 것인지. 다양한 각도로 질문하고 대화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영혼 없이 당위적인 잣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일장 연설하듯 전달되었던 도덕적 가치들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당위적인 덕목으로 인해 고리타분하거나 압박의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화하지 않는 위험한 사회

 

2014416,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던 6,825톤급 청해진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해상에서 침몰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 길에 오른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 325, 교사 15, 일반 승객과 승무원 등 모두 476명이 탔으며 차량 150여 대도 싣고 있었다. 세월호는 빠른 속도로 기울기를 시작하여 완전히 뒤집힌 채 2시간여 만에 침몰했다. 구조자 174명을 제외하고는 300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생명보다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가만히 있어라로 상징되는 지배 구조적 교육 메커니즘이 위기의 상황 때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교과부에서는 학교를 단속시키는 많은 공문을 내려 보냈다. 학생들 사이에서나 교사들 사이에서나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인한 아픔과 공분이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도록 하였다. 세월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대화되지 않았고 억압되었다. 학교마다 그로 인한 부작용들이 발생되었다. 1 남학생이 카톡에 나라면 밖으로 나갔을 텐데, 바보같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페이스북에까지 올려졌다. 그로 인해 그 학교의 여러 명이 그 학생에게 몰려가서 욕설과 비난을 하였고, 그 충격으로 그 남학생은 중간고사 시험을 마치자마자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충격을 경 험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은 통제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일임에도 대화되지 않고 억압된다면, 오히려 교육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다. 대화하지 않는 사회는 우리를 더욱 큰 위험으로 몰아간다.

 

좋은교사운동에서 배포한 애도 수업안을 바탕으로 고2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마음과 떠올랐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도록 했다.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에 대한 분노,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미안해라는 말만 수십 년째 하는 어른들, 안전보다 돈을 더 중요시했던 선박회사, 지도력 없는 정치인들, 거짓된 언론 무능력한 해경, 자신이 세월호에 갇힌 꿈을 꾼 일, 사건이 있던 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즐겁게 보낸 일로 미안한 마음. 대부분의 학생들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은 특별한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염려했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감정이 다를 수 있고, 다른 느낌과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하고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애도 수업이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수업이 된다면, 또다른 억압하는 시스템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번 사고로 인해 잃어버린 가치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고, 잃어버린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과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제안했다. 그리고 쪽지에 편지나 느낌, 생각들을 기록하여 소망나무를 만드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하였다.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안전한 대화의 장을 열어놓고 서로 다른 의견일지라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건강하고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을 억압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위험하기 때문에, 안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돕는 일이다.

 

 

객체가 주체로 변화하기

 

명백한 답을 제시하는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답과 의문 간의 단절에 있다. 교사의 답은 무수히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교사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교사가 먼저 지식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질문하며 대화해야 한다. 질문하는 교사가 질문하는 학생을, 대화하는 교사가 대화하는 학생을 기른다.

 

노예는 질문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학생들이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질문하게 함으로써,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너무 도 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질문하고 탐구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역사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이다.”파울로 프레이리,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아침이슬, 2003, 22.의 파울로 프레이리의 말처럼.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혁의 과정 속에 있다. 측정으로 하여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화를 주도해 가는 주체로 살아갈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지 않을까.

 

 

 

 

 

4. 협력을 이끌어내는 교사의 리더십

 

 

느낌과 기쁨은 가르치고 설교하려 하거나

자기가 원하는걸 남에게 시키려고 할 때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조셉 칠튼 피어스(Jozeph Chimon Poorco)

 

 

당근과 채찍 사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우리 학교로 발령난 지 2년째 되는 분이셨다. 그 선생님은 존재 자체만으로 무서웠다. 단정적이고 명령조의 말투와 야간 자율학습 감독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긴 막대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사소한 말소리도 허락하지 않고 떠든 사람을 색출해냈다. 그래서인지 우리 반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학창 시절에 범생이었던 나는 다행히 그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적은 없었지만, 선생님만 보면 화가 났다. 이유 없이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존재감으로 인해 짜증이 났던 것이다.

 

막상 내가 교사가 돼 보니 교사로서 적절한 리더십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서 편안하게 대해주었더니 학급이 시끄럽고 질서가 없었다. 강압적으로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필요에 따라 엄격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그렇게 싫어하던 명령조의 말투와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협박을 하는 것이다. 강압적으로 대하면 학생들과 관계가 멀어지고, 친밀하게 대해주면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에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당근과 채찍을 오가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교사로서 엄격합과 친밀함 사이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최근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 친밀함도 중요하지만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경계를 세운다는 말이 무엇일까? 그것이 단절이나 거리감이 아니길 바란다.

 

 

지배 vs 나눔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질서와 통제를 강조할수록 교사의 리더십은 처벌적이고 권위적이다. ‘처벌적 리더십은 교사의 억압하는 힘이 커서 학생들은 교사에게 순종적이고, 학급은 외형적으로 질서 정연하고 일사분란하게 보인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 간의 친밀도가 낮고, 학생들이 교사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반면에 통제와 질서가 부족하고 지원과 격려에만 집중할 경우의 허용적 리더십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휘둘려서 어떠한 지도력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학교와 학급 구조는 억압적인 지배 구조의 형태다. 주로 교사 중심의 지배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최근에는 교사보다 힘이 있는 소수의 학생들 압력에 의해 학급 전체가 휘둘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힘(권력)이 교사에서 학생으로 옮겨졌을 뿐, 교실이 여전히 억압 논리에 따른 지배 구조인 것은 변함없다. 지배 구조의 교실은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따돌림과 같은 힘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 구조의 작동 원리는 억압하는 힘복종이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순응하는 인간형을 양성하게 되고 권위적이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유지ㆍ재생산하게 된다.

 

우리는 프랑스 작가이며 언론인인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의 다음 의견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 왔다. 만약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다. 하물며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난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도처에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셜 B. 로젠버그, 캐서린 한 옮김, 비폭력 대화, 한국NVC센터, 2011, 46.

 

교사로서 요구되는 리더십은 힘을 공유하는 리더십이다. 교사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학생들과 동등한 한 표를 사용할 수 있으며. 리더십의 작동 원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협력이다.

 

지배하는 리더십과 공유하는 리더십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배하는 리더십 힘을 공유하는 리더십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어.
지금 당장 해라.
두 번 말하지 않게 해라!
잔소리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말대꾸하지 마라.
안 하면 안 돼. 해야만 해.
~하지 않으면 벌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들려?
너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
~해줄 수 있겠니?
이 말을 들었을 때, 네 마음은 어땠어?
너의 생각이 궁금해.
제안이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니?
모두를 존중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해주어서 고맙다.
너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니?

 

 

협력과 존중의 원리

 

협력과 존중의 원리 힘을 공유하는 리더십은 N분의1 영역을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 뒤 학생들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해진 답을 전달한다. 교사가 질문했다면, 답은 학생들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교사 혼자서 학 급 환경 미화를 하면 빨리 끝낼 수 있다. 하지만 학급의 일을 교사가 혼자 다 장악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 학급을 꾸려가는 것은 교사 혼자가 아니라, 학급 구성원 모두가 협력하여 함께할 때 즐겁고 행복하다. 학생들의 영역까지 교사가 장악한 뒤 학생들에게는 참여의 기회를 주지 않고, 복종만을 요구한다.

 

교사가 모든 것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려 하지 말고, 학생들의 정당한 영역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학생들의 책임을 허락하자.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하자.

 

힘을 공유하는 리더십의 핵심 원리는 학생들로부터 협력과 존중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협력과 존중의 방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 교사가 학생들을 존중하고 학생들과 잘 협력할수록 학생들도 교사를 존중하고 잘 협력한다. 교사의 철학과 삶이 일치되는 모습은 학생들로 하여금 더 많이 배우게 하고 더 많이 성장하게 한다. 교사의 의도대로 학생들이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억압하는 힘을 사용하지 말고, 학생들에게 협력과 책임을 요구하고 함께하자.

 

 

 

 

 

5. 가해자-피해자 구도에서 벗어나기

 

 

비폭력이란 궁극적으로 상대물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ㆍ적대자 안에 있는 선함의 가능성을 끌어와 선율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박성용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너 있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 아픈 애라고 했어. 정상인이 아니라고.”

우리 때문에 네가 힘든 게 아니라. 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가 힘든 거야. 네가 그냥 없었으면 좋겠어. 전학을 가든지!”

 

아이들은 교사가 옆에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은미를 향해 독설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가 이상한 거예요. 어디나 왕따는 있어요. 왕따가 없는 곳은 없어요. 그런데 왜 우리 학교만 이렇게 왕따에 예민해요? 왜 이 난리냐고요!”

 

따돌림을 주도했던 수진이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었다. 수진이는 내내 다리를 꼬고 흔들거리다가 목소리를 높일 때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다시 앉았다. 말하기 순서를 지키지도 않았고, 상대가 말할 때면 거울을 보며 딴짓을 했다. 수진이가 은미의 잘못을들추면서 중언하듯 말하면, 아이들은 수진이의 말이 옳다는 듯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은미를 1, 2학기 내내 따돌렸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학폭위에 넘기기보다는 다시 기회를 주자는 의미로 아이들을 대화 모임에 초대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교사와 학교, 그리고 피해자의 선의에 대해 감사해하기보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교사가 있음에도 가해 학생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만 하고 그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중간에 대화모임 중지를 선언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궁시렁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대화의 자리를 건의하고 준비했던 나로서는 난감하고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일화가 치밀었다.

 

교사라면, 피해를 받은 학생은 물론이고 잘못을 한 학생도 품어야한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따돌림을 주도하고도 미안해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아이들까지 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그것이 교육적인가? 그런 아이들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 맞지 않나? 정말 변변스러운 학생들을 어디까지 품어야 할까?

 

 

인간의 선함에 집중하기

 

뻔뻔스러운 수진이를 난 혼낼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괘씸했지만. 수진이가 한 행동과 똑같이 갚아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다는 건. 수진이의 패턴에 휘말리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 교사들 간에 회의를 했다. 학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는 학생을 포용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고민스런 회의 결과, 피해 학생의 요구와 필요를 다시 들어보는 시간을 갖고 피해 학생 중심으로 문제를 다시 풀어보자고 했다. 피해자인 은미를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 은 미의 요구는 다른 아이들과는 몰라도 수진이하고는 꼭 오해를 풀고 싶어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수진이를 다시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수진이는 대화를 거부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다시 와야 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싫어하는 사람과 왜 억지로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에요. 싫은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는 건데. 왜 다들 나한테 개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왜 어른들이 참견을 해요! 왜들 그러는 거예요!”

 

수진이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화가 울컥울컥 올라왔다.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한지 따져 묻고 싶었다. 매 순간 나는 분노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려는 자신을 보았다. 다행히 그 소용돌이에서 나를 지켰고, 수진 이의 마음을 읽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사람 사이가 항상 좋을 수도 없고 나쁠 수도 없는데, 항상 좋아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싶지 않다는 거구나. 친구를 사귀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는 거지? 마음이 맞는 친구를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싶다는 거 구나이 일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수진이에게 귀를 기울일수록, 수진이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수진 이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수진이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서서히 내 안에 수진이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아이가 진심으로 내 마음에 품어진 것이다. 이제 그 아이가 부족한 인성을 지닌, 개념 없는 이기적인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수진이 의 답답함과 억울함, 호소들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려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어린 작은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한참을 호소하던 수진이는 한숨을 쉬더니, 은미에게 사실 미안한 마음이 많다고 말했다. ‘, 얼마나 아름다운가.’ 수진이는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었다. 은미의 행동으로 불쾌한 것도 있었고. 선생님들이 은미만 감싸는 것 같아서 억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더는 쳇 바퀴처럼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은미와 이야기해서 품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수진이와 은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은미는 막상 대화 모임이 시작하려 한 때는 망설였지만, 고맙게도 다시 용기를 내주었다. 둘 사이에 1시간 동안 진심 어린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진이와 은미의 얼굴과 눈에 빛이 나고 있는 것이다! 수진이는 은미가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고, 자신이 학급 안에서 은미가 다른 친구들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했다. 두 아이들은 대화 모임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교실로 뛰어갔다. 그 뒷 모습은 무척 가볍고 밝아 보였다.

 

교사로서 나는, 수진이에 대한 적 이미지를 해소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 순간은 매우 중요한 고비였다. 아이에 대해 나쁜 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때는 잘못한 만큼 갚아주리라는 생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 내면에 있는 선함의 가능성에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이의 외적으로 표현된 이기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했을 것이고, 합당한 벌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

 

평화의 중재가가 된다는 것은, 학생들 안에 있는 선함의 가능성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악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악한 면과 동시에 선한 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아이들 안에 있는 선함의 가능성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분노로 인해 아이들을 비인간화하고 결과적으로 선함의 가능성을 파손시키게 될 것이다. 아이를 포용하기 위해. 그리고 분노의 회오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인간의 선함에 집중하는 것은 중요하며, 그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평화롭게 전환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대를 역할이나 외모ㆍ성적ㆍ선입견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로 본다는 것이다.

 

남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그들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그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때 수동적으로 방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운이 좋다 면. 우리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도박으로 월급을 다 날리기 시작할 때 친구와 가족이 뛰어들어 말릴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그들의 감정을 다치게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운이 더 좋다면. 그들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며, 우리가 해로운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하는 것의 이면에 있는 인간적 혼란은 수용할 것이다.

-타라 브랙, 김선주ㆍ김정호 옮김, 받아들임, 불광출판사, 2012, 410.

 

타라 브랙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인간적인 혼란을 수용하고 그 아픔과 함께하는 사랑의 행위다.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대립적 관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을 가해자ㆍ피해자라는 대립적 구조로 본다면, 서로에 대해 적대감을 부추겨 단절과 배제를 야기시키고 공동체의 협력을 어렵게 할 것이다. 어떤 경직된 기준과 규칙 준수에 집착하는 것도 대립적 관점을 갖게 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적 양극단에 빠지게 되고, 3의 새로운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안에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 안에는 이미 타인을 위한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다른 사람을 향해 열어놓고 기꺼이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와 타인의 만남과 연결을 위한 첫걸음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