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4장 변혁의 18세기

건방진방랑자 2022. 1. 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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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일찌감치 영토 국가의 관념을 깨우친 덕분에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슐리외가 사실상 전권을 지배한 루이 13세 치하처럼 총리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사태는 달라질 터였다. 과연 절대왕권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 걸맞은 절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는 후대에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 14(1638~1715, 재위 1643~1715).

 

30년 전쟁의 후반부를 배후 조종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어 6년 뒤에 벌어진 베스트팔렌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루이 13세도 그 이듬해 죽었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럼 베스트팔렌 조약은 열 살짜리 어린애가 주도한 걸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1643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낀 루이 13세는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아홉 살 때 즉위한 자신과 이제 다섯 살로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될 아들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여겼다. 부자간에 닮은 점은 또 있었다. 그에게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어머니(마리)가 있었듯이, 아들에게는 에스파냐 왕가 출신의 어머니가 있었다. 루이 13세의 아내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오스트리아의 안이라는 뜻이지만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의 딸이다)는 바로 유럽 최대의 명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이다(프랑스 왕실에 에스파냐나 합스부르크와의 통혼이 필요했듯이, 유럽의 명가들에게도 프랑스 왕실과의 통혼이 필요했다). 다만 리슐리외의 역할을 해줄 인물이 필요한데, 여기에도 적임자가 있었다. 리슐리외의 총애를 받아 추기경에 오르고 그에게서 국정 운영의 솜씨를 배운 마자랭(Mazarin, 1602~1661)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실에는 30여 년 전과 똑같이 나이 어린 왕과 섭정을 맡은 태후, 국정 운영을 맡은 총리의 구도가 들어섰다. 이들 역시 지난번 팀처럼 팀워크가 뛰어났고, 프랑스의 국력 강화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 새 팀에는 전과 다른 요소가 세 가지 있었다. 우선 마자랭은 리슐리외와 달리 외국인(이탈리아인)이었고, 루이 14세는 아버지처럼 한창 일할 나이에 죽지 않았으며, 태후는 합스부르크 혈통이었다.

 

리슐리외를 존경한 마자랭은 선배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주도하고 유럽의 평화를 안착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외국인 총리에게 진심 어린 신뢰를 주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마무리된 1648년에 귀족들은 상류층에 대한 과세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마자랭의 조치에 반발해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급기야 시민들도 귀족편에 가세해 이 반란은 두 차례의 내전까지 수반하면서 5년이나 끌었다.

 

 

태양왕 내가 곧 국가다.”라고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는 77년을 살았고, 그중에서 72년을 프랑스 왕으로 보냈다. 보수적이고 야심에 찬 군주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강국으로 일구었으면서 동시에 몰락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루이는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맥을 같이하는 절대왕정 시대의 전형적인 군주다.

 

 

사실 이 쿠데타는 역사적으로 양면의 칼이었다. 성공한다면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좌초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오히려 왕권을 크게 강화해줄 터였다만약 프롱드의 난에서 귀족들이 승리해 권력을 잡았다면 프랑스는 그 무렵의 영국처럼 시민혁명이 성공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국보다 앞서 그때 입헌군주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역사에만 기록된 작은 쿠데타였지만(프롱드란 당시 파리의 아이들이 관헌에게 돌멩이를 던지던 놀이의 이름이었다), 당시 쿠데타와 혁명은 한 끗 차이였다. 어쩌면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보다 한 세기 전에 피는 덜 흘리고 성과는 더 큰 시민혁명의 기회였을 수도 있다. 현실의 결과는 후자였다. 프랑스 귀족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100여 년 동안 두 번 다시 왕권을 넘보지 못했고, 어렵사리 반란을 진압한 마자랭은 절대왕정으로 가는 길을 확고히 구축했다. 당시에는 선진 체제를 굳히는 발전이었으나 멀리 보면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지게 되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출발이었다.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는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61년에 마자랭이 죽자 스물셋의 루이는 이제부터 총리대신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리슐리외 이래 50년 남짓 지속된 총리의 시대는 끝났다.

 

루이의 통치 철학은 단순했다. 국왕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역할이었고 가훈은 너 자신을 누구보다 우월하게 하라는 것이었다이런 맥락에서 내가 곧 국가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이 등장했고, 오늘날 유럽 최대의 왕궁으로 남아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 건축되었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의 상황을 스스로 평가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이웃 나라와 평화 관계가 수립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갈 것 같았다.” 사실 프랑스는 이미 기선을 제압한 상태였으므로 이후에는 더 천천히 팽창 사업을 진행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스스로에게 그런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친정(親政)을 선언한 데는 그런 오만함과 자존심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사실 오랜 총리의 시대를 거치며 프랑스에는 관료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으므로 루이로서는 특별히 한 사람을 중용하고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모든 관리는 국왕의 명과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이 되어야 했다.

 

루이를 보좌한 인물들 가운데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재무를 맡아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콜베르(Colbert, 1619~1683) 정도였다. 콜베르는 한발 앞서가고 있던 무역 선진국 영국과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 수출 장려와 보호관세, 국내 산업 육성 등 중상주의 정책 (콜베르티슴)의 전형을 선보였고,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세워 해외 무역에 주력했다(이 무렵부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는데, 영국보다 뒤늦은 탓에 주로 북부, 즉 지금의 캐나다 동부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캐나다가 영연방 소속이면서도 프랑스어권이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토 국가 체제를 갖추었어도 그에 걸맞은 국가 재정이 미비했던 시절에 콜베르의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발 주자로서 선발 주자를 따라잡는 것은 같은 무기’(해외 무역과 중상주의)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더욱이 프랑스는 전통적 농업국가인 탓에 해상에서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당해낼 수 없었다. 1672년부터 6년간 전개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별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콜베르티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이 전쟁의 네덜란드 측 당사자가 바로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는 빌렘이다)콜베르의 정책은 영국, 네덜란드와 충돌을 빚었을 뿐 아니라 한창 성장하던 프랑스 국내 부르주아지에게서도 반발을 샀다.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의 맛을 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 기업가 들과 달리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산업과 무역에 투자하기보다 토지, 국채 등에 투자하고자 했다. 게다가 그들은 당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던 관직 매매에도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루이는 바다를 버리고 땅의 영토를 팽창하려는 전략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바야흐로 대륙제국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말이 좋아 팽창이지, 실은 전쟁이다. “나는 전쟁을 좋아한다.”라고 직접 밝혔을 만큼 루이의 야망은 노골적이었다. 어차피 전쟁을 벌일 결심이 섰다면 전쟁의 구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1685년 그는 할아버지 앙리 4세의 업적인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 회귀했다(종교적인 목적을 앞세웠다기보다는 절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의 통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100년 만에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그중 상당수가 네덜란드로 갔으니, 가뜩이나 미운 네덜란드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진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1688년 네덜란드 총독 빌렘이 영국의 윌리엄 3세로 즉위했다. 그것으로 목표는 정해졌다. 루이는 프랑스로 망명한 영국의 제임스 2세를 복위시킨다는 구실로 네덜란드를 침략했다(지금 같으면 명백히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지만, 당시는 근대국가 체제가 생겨난 초기인 탓에 중세적 통합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데다 각국이 통혼으로 얽혀 있어 타국이라는 관념이 약했다. 한 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이 곧장 국제전으로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놀라웠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물론, 프로이센과 작센을 비롯한 독일의 영방국가들, 합스부르크의 에스파냐 등 서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프랑스에 반대해 동맹을 결성하고 나섰다. 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이라는 대프랑스 동맹으로 뭉쳤으므로 이 전쟁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 부른다. 비록 일 대 다()’의 싸움이었지만 프랑스의 힘은 엄청났다. 10년간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내내 우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아킬레스건인 해군력이 약한 탓으로 해상에서는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해군력의 약점은 이후 영국과의 경쟁에서 계속 프랑스의 발목을 잡게 된다)엄밀히 말해서 프랑스의 해군력은 국보다 약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함선은 국의 함선보다 성능이 좋았다. 심지어 영국의 해군 장교들은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프랑스 군함을 지휘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그러나 전쟁이 장비만으로 되던가? 전력에서 유리한 프랑스 해군은 자국의 상선들을 보호하는 데만 열중했을 뿐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반면 영국 해군은 대담한 공격 전술로 적극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영국 해군력은 차츰 프랑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결국 1697년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종전이 이루어졌지만, 프랑스가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알자스-로렌 남쪽의 스트라스부르뿐이었다. 루이의 꿈은 일단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일 뿐이었으며, 곧이어 다가올 18세기 전란의 시대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18세기 벽두인 1701년 다시 유럽 대륙은 대규모 국제전을 맞이해야 했다. 이번에는 에스파냐에서 전쟁의 계기가 터졌다.

 

 

베르사유 시대의 개막 루이 14세가 세웠을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한 전경이다. 현재는 프랑스 최대의 유적이자 관광 상품이자 역사 미술관이 되어 있지만, 루이의 시대에는 17세기 유럽의 역사가 설계된 곳이다. 이후에도 베르사유 궁전은 나폴레옹 시대, 1848년의 혁명, 1871년의 파리 코뮌, 그리고 20세기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과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현장이 된다.

 

 

 추락하는 프랑스

 

 

최대의 번영 속에서 최악의 실정을 거듭한 펠리페 2세 이후 17세기의 100년 동안 에스파냐는 계속 몰락했다. 펠리페 3세 때는 네덜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펠리페 4세 때는 포르투갈이 독립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도 확정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업적이라면 오로지 대를 이어왔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펠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Carlos , 1661~1700, 재위 1665~1700) 때는 그 유일한 업적마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결혼에 재혼까지 했는데도 후사가 없었다. 재산도 잃은 판에 혈통도 끊어질 처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망해도 3년은 가는 게 부자라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망해도 300년은 갈 터였다. 비록 보헤미아와 헝가리, 네덜란드를 잃었고, 세습령인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독립했지만(카를 5세 때 본가가 에스파냐로 오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졌다), 아직도 합스부르크는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를 지배했고, 무엇보다 광대한 신대륙을 곁들인 에스파냐를 소유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의 후계 문제는 여전히 유럽 각국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1700년에 카를로스는 예상대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으로 수백 년간 유럽 최대의 왕가로 명성을 날렸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대가 끊겼다(물론 오스트리아의 분가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후사 대신 남긴 유언은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에게 에스파냐의 왕위와 합스부르크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던 것이다(루이 14세는 외가가 합스부르크였으므로 그의 손자라면 카를로스에게도 먼 친척이 된다).

 

카를로스는 원래 루이 14세의 팽창정책에 반대했으나 궁정 대신들이 프랑스파와 오스트리아파로 나뉘어 권력다툼을 벌인 끝에 프랑스파가 승리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렇잖아도 호전적인 루이 14세가 절대군주로 버티고 있는 프랑스에 그 유산이 넘어간다면, 합스부르크 대신 부르봉 왕가가 유럽 최대의 가문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머잖아 유럽 전체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게 뻔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이해관계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였다.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끝났으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끝나지 않았다(비록 황가보다 왕가가 더 적통이었고 가세도 컸지만), 합스부르크의 오랜 세습령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트 1(Leopold I, 1640~1705, 재위 1658~1705)는 바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직계 후손이었으니(106쪽 참조) 당당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이다. 유산 상속 문제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꼬여드는 판에 상속권의 일부를 틀어쥐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가로서는 당연히 프랑스에 나라를 넘기라는 카를로스의 유언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1701년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세 나라가 주축이 되어 다시 한 번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에스파냐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다. 전쟁의 양상은 얼마 전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대동소이했다. 개전 초기 프랑스는 우세를 보였으나 1704년 포르투갈 근해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함대가 영국과 네덜란드 함대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이번에도 해군이 아킬레스건이었다). 계속해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영국이 네덜란드 방면에서 프랑스를 압박해 들어가면서 육전에서도 프랑스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양측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오스트리아는 그 뒤에도 1년간 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실제로 종전된 것은 1714년이다)유럽의 전쟁과는 달리 동양의 전쟁은 대개 끝장을 본다. 중국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 주변 세력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고 대치하는 게 아니라 주변국들을 아예 말살해 버린다. 7세기에 당 제국이 고구려와 백제 같은 한반도 왕조들을 멸망시킨 게 그런 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전쟁은 치열하게 싸우다가도 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졌어도 유럽 나라들의 수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는 경우는 없었다(심지어 폴란드 같은 나라는 몇 차례나 없어졌다가도 다시 생겨났다). 이런 차이는 민족이나 문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지리에 원인이 있다. 유럽에는 중국과 같은 지리적 중심이 없기 때문에, 로마 시대 이후 주변을 압도할 만한 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제전이 끝난 뒤에는 강대국들 간의 완충지대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세력 균형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가 가장 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때로 유럽 대륙을 제패하려 시도한 적이 있지만(17세기의 루이 14세와 19세기의 나폴레옹), 유럽의 지리와 역사를 볼 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었다.

 

 

몰락하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를 지배하게 된 것은 에스파냐에 큰 불운이었다. 신대륙의 금과 은이 대거 유입되었는데도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전략적 판단 실수로 얼마 안 가 다 날리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불운의 절정이었다. 그림은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함대에 의해 초토화되는 에스파냐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명예를 얻었고 동맹국 측은 실익을 얻었다. 그럼 무승부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물론 프랑스의 영토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카를로스의 유언대로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그대로 왕위가 인정되어, 펠리페 5(1683~1746, 재위 1700~1746)로 에스파냐에 처음으로 부르봉 왕조를 열었다.(이후 그는 에스파냐에 프랑스식 법제를 도입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성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 평가를 해보면 프랑스는 막심한 손해를 보았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아 있던 네덜란드의 일부 (16세기 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 참여를 거부한 남부의 가톨릭 주들이 바로 그 지역인데,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한다. 110~111쪽 참조)를 손에 넣었고, 애초부터 바라던 북이탈리아와 나폴리, 사르데냐를 얻었다. 또한 프랑스의 위성국이었다가 전쟁에서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붙은 사부아 공국은 줄을 잘 선 덕분에 시칠리아를 얻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를 내주고 사르데나를 받아 사르데냐 왕국을 이루었다(사부아 왕가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대의 성적을 올린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지중해의 관문인 지브롤터와 지중해 무역의 요지인 메노르카 섬을 얻었다. 한물간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한 것을 최대의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부록일 뿐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 영국은 또 에스파냐에게서 신대륙에 노예를 공급하는 권리를 비롯해 신대륙에 관한 에스파냐의 여러 특권을 빼앗았는데, 여기서 영국의 장기적인 복안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유럽 대륙보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입은 가장 큰 손실도 바로 그 점이었다.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메리카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맞섰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때도 양국은 여기서 접전을 벌인 바 있었다. 미국 동해안에서 서진하려는 영국과 캐나다에서 남진하려는 프랑스가 충돌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무승부로 끝났으나 그보다 승패가 더욱 뚜렷한 이번 전쟁에서는 승부가 가려졌다.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은 뉴펀들랜드를 차지하고 허드슨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여러 차례 대결을 벌이게 되지만17~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와 같은 기간에 아메리카에서도 맞붙었는데, 그래서 전쟁의 명칭도 쌍둥이처럼 각각 두 가지다. 즉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 윌리엄 왕 전쟁,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 앤 여왕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조지 왕 전쟁, 7년 전쟁 = 프렌치 - 인디언 전쟁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영국이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앞서나 가는 계기가 되었다.

 

 

세력 재편 전쟁이 끝나면 논공행상이 있다. 지난 세기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처음으로 각국의 분명한 경계를 설정한 유럽 세계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자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 모여 다시금 영토 협상에 들어갔다. 그림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의 장면이다.

 

 

 떠오르는 프로이센

 

 

위트레흐트 조약에는 워낙 큰 규모의 영토 분할이 많았던 탓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사항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승인된 것이다. 1701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Friedrich I(1657~1713, 재위 1701~1713)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강적 프랑스를 맞이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절실한 연합국 측은 당시 프로이센 선제후를 프로이센 으로 격상시켜주었다(사실 그전부터 제후국이라기보다는 독립국이었으므로 내용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얼마 뒤에 벌어질 사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제후의 독립을 승인한 오스트리아 황제는 무덤 속에서도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새 나라의 기틀을 놓은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Friedrich willelin , 1688~1740, 재위 1714~1740)였다. 그는 후발 주자로서 단기간에 선두 주자를 따라잡으려면 하루속히 군사 강국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믿었다(지금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비군을 늘리고 군사훈련에 만전을 기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Friedrich II, 1712~1786, 재위 1740~1786)는 프로이센을 일약 군사대국으로 발전시켜 후대에 독일 국민들에게서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존칭을 얻게 된다프리드리히 2세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군대식 가정교육을 싫어하고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 계몽주의 철학에 심취해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서신까지 교환하 는 등 인문적 소양을 쌓았다. 군주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고 더욱이 프로이센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나라의 군주로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 뜻을 받들 것을 다짐한 뒤에도 반마키아벨리론이라는 책을 펴냈다(이 책에서 그는 군주란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공복(公僕]일 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왕이 된 뒤 그는 일세의 효웅이자 음모가로 변신한다. 어느 것이 그의 진면목이었을까?.

 

전통의 강대국들은 활발한 해외 식민지 개척 경쟁에 나섰지만 아직 공국에서 벗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약소국 프로이센으로서는 무엇보다 영토 확장이 급선무였다. 영토를 확장하면 자원과 인구도 늘어 국부가 커지며, 이 국부를 바탕으로 전쟁을 치르면 더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가 노린 1차 목표물은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는 남쪽의 슐레지엔이었다. ‘슐레지엔의 풍부한 석탄과 철을 얻는다면 유럽 최강의 군대를 조직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프리드리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상대하기 벅찬 강국이었으므로 프리드리히로서는 마음속으로만 슐레지엔의 문을 열심히 두드려댈 수밖에 없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윽고 프리드리히의 눈에 슐레지엔의 문이 살짝 열리는 게 보였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에스파냐 왕위를 꿈꾸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레오폴트 1세의 아들)는 남의 후계 문제에 간섭하기에 앞서 자신의 후계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도 대가 끊길 운명에 처했으니 이래저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문을 닫을 때가 왔다). 딸은 있었으나 불행히도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게르만법에 따라 딸의 왕위 계승이 금지되어 있었다당시 유럽에서 여왕의 전통은 드물지 않았다. 큰 업적을 남긴 유명한 여왕들만 꼽아보아도 선대에는 15세기 에스파냐의 이사벨,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고, 당대에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있었다. 이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중세 시대부터 로마-게르만 전통에서 벗어나 있던 변방이라는 점이다. 이는 게르만 전통이 강력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여왕이 없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왕이 존재한 나라들은 대부분 오늘날에도 군주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유럽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영국ㆍ에스파냐ㆍ덴마크ㆍ네덜란드ㆍ벨기에ㆍ룩셈부르크ㆍ스웨덴ㆍ노르웨이의 여덟 나라인데, 모두 중세에는 변방이었다. 반면 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동유럽 등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은 하나같이 오늘날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러시아는 20세기의 특수한 사정으로 군주제가 사라졌지만).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의 왕이 된 해(1740)에 카를 6세는 죽으면서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재위 1740~1780)에게 제위를 계승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운의 여제 역사 속의 여제로는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잔티움의 이레네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처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1000년 전의 여제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까지 동원해 쓰러져가는 합스부르크 황실을 지키려 애썼으나 프랑스, 영국에 이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에마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간섭할 구실이 생겼는데, 이를 놓칠 프리드리히가 아니다. 그는 대뜸 군대를 출동시켜 슐레지엔을 점령해버렸다. 그러자 해외 경략에 주력하고 있던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아차 싶어 뒤늦게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들도 프로이센과 마찬가지로 침략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특히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좌절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는 더욱 열심이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굳이 전쟁이랄 것 없이 오스트리아의 해체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가 개입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반대한다는 것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 영국이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래서 다시금 국제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막상 도화선에 불을 붙인 프로이센은 초반에 슬며시 빠져버렸고, 전쟁 후반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전화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영리하게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계를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먹고 발을 빼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또다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전쟁은 또다시 무승부로 끝났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양측은 종전을 이루고 협상에 나섰다. 무승부니 자연 논공행상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가여운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위와 영토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잔꾀는 결국 덜미가 잡혔다. 이것이 곧이어 벌어진 7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재주만 부린 곰과 같은 처지가 된 프랑스의 눈에 돈만 먹고 튄 프로이센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가뜩이나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대해 위협을 느끼던 터였다. 그래도 프랑스는 억울함을 느끼는 정도지만 엉겁결에 알짜배기 땅을 빼앗긴 마리아 테레지아는 기가 막혔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부터 프랑스와 원수로 지낸 처지건만 오스트리아는 체면 불구하고 프랑스에 손을 내밀었다. 또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와 스웨덴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졸지에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남쪽의 오스트리아, 북쪽의 스웨덴에 완전 포위된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누군가? 그는 재빨리 영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포연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756년에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1748년부터 7년 전쟁이 시작되는 1756년까지 유럽 각국은 8년간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결국 다시 전쟁을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각국이 복잡한 막후 협상과 음모를 전개한 그 기간은 당시 유럽의 국제 질서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근대국가적 질서로 편제되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번에는 프로이센이 주적(主敵)으로 몰렸으니 프리드리히로서도 전처럼 손을 뺄 수 없는 처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직접 프로이센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프로이센의 인구는 유럽에서도 스무 번째였다. 병력 수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만큼 기동력과 공격적인 전술이 절실히 필요했다. 개전 초기 프리드리히는 기동력과 공격 전술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군과 한 차례씩 맞붙은 대회전에서 모두 승리하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로이텐 전투는 프리드리히를 존경한 후대의 전쟁 영웅 나폴레옹에게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단기전에서는 전술이 중요할지 몰라도 장기전이라면 국력이 좌우한다. 뒷심이 약한 프로이센은 개전 3년째가 되면서 차츰 패배가 많아졌고, 급기야는 수도 베를린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동맹국인 영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처럼 해외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맞서 싸웠을 뿐 육군에서는 프로이센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영국은 1757년 인도에서 벌어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면서 인도를 단독 지배하게 되었다. 하기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프로이센이지 영국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을 살린 것은 러시아였다.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불과 6개월 동안 재위한 그의 유일한 업적은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동맹 관계가 와해되자 다른 동맹국들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을 잃게 되었다. 마침내 그 이듬해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7년 전쟁은 끝났다.

 

또 무승부였을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더욱 확고하게 영토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원의 보고 슐레지엔을 확보한 것은 엄청난 잠재력을 비축한 셈이었다. 프로이센은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오히려 유럽의 강국으로 확고한 인정을 받았으니 하나도 손해 본 게 없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단기간에 전후 복구에 성공하고, 1772년에는 폴란드 분할에 적극 개입해 영토와 인구를 더욱 늘림으로써 프로이센을 최단기간에 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끌어올렸다.

 

 

 3세계의 변화

 

 

7년 전쟁은 불과 몇 년 전에 끝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완결지은 것이지만 그 전쟁과는 디른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참가 선수가 늘어났다는 것,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중세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역사에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15세기 말 모스크바 공국이 정치적·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이후(1457~458쪽 참조) 러시아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과 관계(주로 전쟁)를 맺었을 뿐 서유럽의 국제 질서에 뛰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서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먼저 중앙집권과 근대 국가 체제를 이루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모델로 삼았으니 중앙집권이야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었고, 서유럽의 프랑스가 위그노 전쟁에 휘말려 있던 16세기 후반 이반 4(Ivan IV, 1530~1584, 재위 1533~1584) 치하에서는 젬스키 소보르(zemsky sobor, 전국 회의)라는 신분제 의회도 생겨났다. 이반 4세는 그 밖에도 법전을 편찬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도 완비했으며, 군제와 교회도 개혁해 일개 모스크바 공국을 일약 러시아 제국으로 격상시켰다(러시아 제국을 공식 국호로 삼게 되는 것은 1721년의 일이지만 골조는 이때 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봉건 귀족러시아의 봉건 귀족들 가운데 차르에게 복속된 세력을 보야르(boyar)라고 부른다. 주로 대지주인 보야르는 신분상의 귀족이라기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원래 이들은 러시아의 각 공국에서 자체로 의회를 구성해 대공(군주)을 보좌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성립한 뒤에는 차르의 임명을 받고 차르 자문 기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보야르는 정치와 행정에도 진출해 관료층을 담당했다들을 대규모로 처형하는 공포정치로 뇌제(雷帝)’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얻었다. 하긴, 그로서도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귀족들의 영지를 강력한 제국 체제로 묶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반은 러시아 제국의 원형만이 아니라 향후 500년간 지속될 러시아 대내외 정책의 골간도 만들었다. 첫째, 대내적으로는 공포정치를 아예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그는 봉건 귀족들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비밀경찰까지 조직하면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에 힘썼다. 이 비밀경찰과 더불어 러시아 특유의 전제정치인 차리즘(tsarism)이 시작된다. 둘째, 대외적으로는 팽창정책을 펼쳤다. 이반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옛 몽골 지배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멀리 시베리아까지 러시아의 세력권을 넓혔다. 하지만 서쪽으로는 발트 해로 진출하려다가 스웨덴과 폴란드의 방어망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이런 이반의 팽창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러시아의 대외 정책으로 자리 잡아, 동쪽에서는 꾸준히 팽창하고 서쪽에서는 계속 발트 해 진출에 실패하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

 

 

뇌제의 성당 강력한 전제정치로 차리즘의 초석을 다진 이반 4세는 후진국 러시아를 적어도 영토적으로는 유럽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사진은 그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성 바실리 대성당이다. 아홉 개의 원통형 예배당을 짜 맞춘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면 볼 수 있다.

 

 

대내적인 전제정치와 대외적인 팽창정책 이외에 이반이 러시아에 남긴 마지막 선물은 로마노프(Romanov) 왕조였다. 강력한 전제군주인 이반이 죽자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한동안 혼란이 이어지다가 1613년 젬스키 소보르에서는 이반의 황후 아나스타샤의 가문 사람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황제로 선출했는데,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이다. 이반이 초안을 잡은 대내외 정책과 로마노프 왕조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러시아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서유럽 세계에서 벌어진 7년 전쟁에 개입할 만큼 러시아를 발전시킨 인물은 표트르 1(Pyotr I, 1672~1725, 재위 1682~1725). 흔히 표트르 대제라고 불리는 그는 그 존칭에 걸맞게 키도 2미터가 넘었으며, 서유럽에 비해 크게 뒤처진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고 전통적인 팽창정책을 충실히 계승한 뛰어난 군주였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넘어 1689년에 중국의 강국인 청 제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했고서유럽이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 러시아는 동쪽으로 팽창하면서도 부동항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남쪽으로 진출할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유럽 동남부 지역에는 당대 최강국인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고, 그 동쪽은 험준한 파미르 고원이었다. 할 수 없이 동진을 계속한 러시아는 청 제국의 북변에 이르렀는데, 청 역시 오스만에 못지않은 강국이었으니 러시아로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불운이라기보다는 후발 주자의 숙명이겠지만).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는 양국 간의 소규모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이 분쟁을 해결한 것으로, 중국으로서는 유럽 국가와 최초로 맺은 국제조약이다, 서쪽으로는 1713년에 새 수도 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으로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유럽 무대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웠다.

 

서유럽의 역사에 동참하려면 먼저 스웨덴을 꺾어야 한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스웨덴은 발트 해를 앞마당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스웨덴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나라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덴마크와 폴란드도 있었다. 그래서 표트르는 그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도전장을 던졌는데, 1700년부터 약 20년간 벌어진 이 전쟁을 북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폴란드의 왕은 작센 선제후였으므로 이 전쟁에는 작센과 프로이센, 하노버 등 독일 지역의 여러 공국도 개입했다. 그 무렵 서유럽에서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었으니 유럽 전역이 남과 북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스웨덴 왕 카를 12세는 덴마크와 폴란드까지는 어렵지 않게 제압했으나, 러시아는 다른 상대였다. 1707년 카를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는데,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에 말려 참패하고 말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은 중요한 계기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18세기 초반 스웨덴의 공세를 차단한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은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쳤으며, 20세기 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여기서 역전의 계기를 잡은 러시아는 1709년 스웨덴을 격파하고 발트 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다음 스웨덴의 카를이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스웨덴을 압박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1721년 스웨덴과 러시아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결과 러시아는 스웨덴을 제치고 북방의 패자가 되었다. 표트르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러시아 역사는 유럽 역사의 일부분으로 당당히 편입되었다. 수십 년 뒤에 벌어진 7년 전쟁은 러시아의 유럽 무대 데뷔전인 셈이다.

 

7년 건쟁에서 프로이센에 병 주고 약 준 표트르 3세는 겨우 6개월간 제위에 있다가 쿠데타로 실각하고 곧바로 암살되었다. 조상인 표트르 대제의 서구적 취향을 넘어 표트르 3세는 자기 나라를 저주받은 나라라고 경멸하면서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를 숭배했으니, 귀족들의 반발을 산 것도 당연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저주한 조국에 두 가지 큰 선물을 남겼다. 하나는 러시아 발전의 걸림돌인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2(Ekaterina II, 1729~1796, 재위 1762~1796)가 제위를 이었다는 사실이다(그녀는 남편이 이혼할 음모를 꾸몄다고 여기고, 귀족들과 연합해 남편을 제위에서 몰아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이 숭배한 프로이센 출신이었으나 남편의 성향과 달리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 복식을 입었으니 표트르 대제보다 한술 더 뜨는 유럽 지향적인 군주였다. 물론 좋은 것도 모방했다. 그녀는 당대 서유럽의 뛰어난 군주들처럼 계몽 군주로 자처하면서 프랑스 계몽주의를 폭넓게 수용하고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1773년 흑해 연안의 농노들이 푸가초프를 지도자로 삼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예카테리나는 그것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전제정치의 고삐를 더욱 강화했으니 완전한 계몽 군주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표트르가 발동시킨 러시아 근대화(서구화)와 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한 덕분에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제의 영예를 얻었다. 밝음 뒤에는 어둠이 있는 법, 그녀가 당대를 넘어 후대에까지 칭송을 받게 된 데는 지구상에서 한 나라가 사라진 덕분이 컸다.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계몽주의 철학을 정치에 도입하려 한 계몽 군주라면 당시 또 한 명이 있었다. 바로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였다.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 여제와 대왕은 1772년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한 나라의 영토에 욕심을 품었다.

 

바로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슬라브족의 국가이면서도 일찍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고(125~126쪽 참조) 서유럽 문명에 더 가까운 묘한 나라였다. 마침 프로이센과 지역적 경쟁자인 작센은 북방전쟁에서 타격을 입었고 7년 전쟁에서 다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힘이 크게 약화되어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다. 이 기회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는 아직까지 국왕도 선거로 뽑는 정치적 후진국인 폴란드(그렇기 때문에 작센의 제후가 폴란드 왕을 겸하는 게 가능했다)를 나누어 먹기로 했다. 여기에 영토 상실로 심상해 있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끌어들여 세 나라는 폴란드의 분할을 강행했다생살을 뜯기는 사태가 일어나고서야 폴란드의 지배 귀족들은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폴란드는 1793년에 2차 분할되고, 1795년에는 3차 분할이 이루어져 나라 자체가 없어진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위해 여러 차례 투쟁했으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은 100년도 훨씬 더 지나 20세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폴란드의 수난은 끊이지 않아, 2차 세계대전에서 잠시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나라를 수복했다. 강대국들 사이에 낀 약소국의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게 영토 국가의 개념은 유럽 모든 나라의 지배자들에게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영웅과 여걸 왼쪽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이고, 오른쪽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행차하는 장면이다. 후대에 대왕과 여제로 불린 두 사람은 서유럽의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각자 자국의 국력을 크게 배양했다. 그들은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분할하기도 했으니, 만약 둘이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집안의 호랑이

 

 

7유럽의 지배자들만 영토 국가의 개념을 굳게 다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폴란드가 사라질 즈음,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한 나라가 생겨났다. 바로 미국이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이 프로이센의 편을 든 이유는 오로지 프랑스가 개입했기 때문이고, 프랑스의 개입을 저지한 이유는 오로지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누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전쟁 기간 중 유럽에서는 체면치레만 하고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와 적극적으로 싸웠다. 그 성과가 바로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누르고 동양 최대의 식민지인 인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었고,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따돌리고 패권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는 100점짜리였으나 아메리카의 경우는 0점짜리였다. 일인자가 되면 부패하는 것은 한 나라의 독재자만이 아니었다. 드넓은 신대륙을 호령하게 된 영국은 아직까지 자기 집안에 호랑이를 키우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는 것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으나 실상 총독은 식민지의 정치와 행정에 그다지 참여하지 못했다. 식민지인들은 북아메리카 북동 해안 지대에 13개 주를 건설하고 자치를 시작했다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를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로 부르며 직계 조상으로 받드는 식민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국 본국과 원래부터 거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처지였기에 그들은 신분상 평등했고(지체 높은 귀족 집안이 멀리 오지에까지 올 이유는 없으므로), 또한 그랬기에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도입할 수 있었다. 영국이 중세까지 서유럽 세계에서 변방이었기에 일찍부터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듯이, 신대륙은 영국의 변방이었기에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셈이다.

 

7년 전쟁이 벌어지던 무렵까지는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그런 대로 좋았다. 영국은 아직 프랑스와 식민지를 놓고 다투는 중이었으므로 식민지의 내부 사정에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또 식민지인들은 적당한 세금만 내면 정치와 종교에서 모두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므로 본국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아메리카를 독차지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유럽과 전 세계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획득한 영국은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 왕 조지 3(George III, 1738~1820, 재위 1760~1820)는 유럽 각국의 영토 분쟁을 목도하면서 자극을 받아 한 세기 전에 확립된 입헌군주제의 전통을 잊고 전제정치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래저래 돈 쓸 곳이 많아지자 조지는 자연히 식민지를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많이 거두려면 세액을 올리기보다 과세 항목을 많이 신설하는 편이 훨씬 좋다. 1765년 그는 인지세법을 제정해 식민지 착취의 기치를 올렸다.

 

 

식민지인들에게 인지세법은 아주 황당한 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인쇄물에 인지를 첨부하는 것이었는데, 그 인지는 물론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이에 따라 신문과 책자는 물론 공문서, 증서, 심지어 오락용품인 카드와 학위 증서에까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세금이 덕지덕지 붙었다. 관세까지는 본국의 권한으로 식민지인들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관세를 올리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직접 과세, 그것도 터무니없는 과세 항목을 설정한 것은 만행이었다. 더구나 본국에서 세법을 마음대로 개정해도 식민지인들은 법적인 발언권이 없었다. 본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즉각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거세게 항의했다.

 

예상치 못한 기세에 놀란 영국 의회는 1년 만에 인지세법을 폐지했는데, 속셈은 따로 있었다. 식민지의 항의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의회는 우선 법리상의 모순을 제거하고 새로운 법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새로운 법안은 그전보다 더 악법인 선언법이었다. 이것은 식민지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권리를 본국이 보유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식민지인들의 정치 참여를 애초부터 근절하려는 교활한 의도였다.

 

이렇게 법적 방비 장치를 해놓은 뒤 의회는 후속 법안을 제정했다. 그것이 1767년 타운센드 법으로, 내용은 식민지 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유리와 납, 페인트, 종이, 차에 대해 과세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식민지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자 1770년부터는 차에 대한 세금만 남기고 나머지를 없앴다. 그런데 1773년 영국 수상 F. 노스는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1773년 식민지인들은 식민지 자치에 대한 지나친 간섭에 격분하여 보스턴 항구에서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습격해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후대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명백한 반란 행위에 영국은 즉각 응징에 나섰다. 위기감을 느낀 식민지는 1774년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대표들이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열어 강경책을 선택했다. 이제 무력 충돌은 시간문제다.

 

1775년 드디어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처음으로 충돌했다. 사실상 식민지 정부가 된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식민지 민병대는 그대로 정규군이 되었다. 선전포고는 멋들어지게 177674일 독립선언으로 대신했으니 여러모로 식민지답지 않은 식민지였다(실제로 식민지 시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식민지로 여기지 않고 뉴잉글랜드라고 불렀다. 당연히 영국은 올드 잉글랜드였다). 이제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의 적수가 없어 자국민끼리 전쟁을 벌이는 셈이 되었다.

 

 

독립의 신호탄 17731216일 한밤중에 342상자의 차가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변장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급진 세력이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습격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차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할 미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일종의 변형된 내전같은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만에 프랑스를 필두로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속속 식민지 편으로 참전했다공교롭게도 식민지의 편을 든 나라들은 모두 프랑스가 일인자였을 때는 영국 측에 붙은 나라들이었다. 이는 각국이 서로 견제하는 유럽의 분권적 전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근대국가 체제에 들어선 이후 유럽 각국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에 개입하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던 터였다. 그 명분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식민지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선언했으니, 이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 된다.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부터 서두른 이유는 바로 외부 원조를 끌어들이려는 데 있었으니 서로 손발이 잘 들어맞은 결과였다.

 

특히 프랑스는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개전 초기부터 대륙회의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애국파와 본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렸는데, 수로 보면 애국파가 다수였지만 재력가들은 전부 충성파였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륙회의는 일종의 국채라고 할 종이돈(paper dollar)을 발행했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게 프랑스였다. 사실 프랑스는 참전을 선언하기 전부터 비밀리에 식민지군에 의복과 장비 등 군수품과 아울러 막대한 양의 화약을 공급해주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식민지군은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식민지 측의 또 다른 문제는 해군이었다. 식민지군은 육지에서는 그런대로 대등하게 버틸 수 있었으나 해군력에서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에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해결해주었다. 참전을 선언하지 않은 유럽의 국가들도 대부분 식민지를 지원하고 나섰다.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등은 1780년 무장 중립을 선언하고, 중립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들의 선박으로 식민지군에 군수물자를 실어다 주었다.

 

십시일반의 국제적 지원에 힘입어 식민지군은 전황을 역전시켰으며, 1781년 요크타운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할 수 없이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은 식민지의 딱지를 떼어버리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독립 당시 미국은 5대호에서 미시시피에 이르는 북미 대륙 동쪽 해안 지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였다. 당시만 해도 땅은 넓었지만, 장차 이 나라가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해서 더욱 영토를 넓히게 될 뿐 아니라 불과 한 세기 만에 당당한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영국으로서는 당연히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겠지만, 미국이 탄생함으로써 서양 문명은 처음으로 다른 대륙에 자신의 적자(嫡子)를 만든 셈이 되었다. 이미 중남미 대륙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오래전에 뿌린 서양 문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지만, 그것은 서양 문명의 적자라고 보기 어려웠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서양 문명의 줄기에 해당하는 중세의 적통을 이어받은 게 아니었을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 문명을 이식했다기보다는 그곳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삼았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의 효과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에게 선언 작성자들이 선언문을 제출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섯 명의 작성자들 중에는 프랭클린, 제퍼슨, 애덤스 등 미국 초기의 주요 정치인과 장차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 끼어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전쟁이 개시된 이후에 발표됨으로써 영국에 반대하는 유럽 나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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