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전쟁
국제 파시즘의 위협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세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은 ‘파시즘의 총수’ 히틀러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불과 20여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작성된 모든 기록을 깨고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신기록들을 세우게 될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같은 세계대전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성격이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한 것이고 ‘정상적인 힘의 대결’로 기존의 판도를 깨려 한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 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파시즘이 주도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출발점부터 제1차 세계대전과 달랐다.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은 비록 전쟁의 객관적 조건은 숙성해 있었으나 아주 우연한 계기로, 즉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게’ 발생한 반면, 파시즘을 ‘의식적으로’ 수용한 제2차 세계대전의 도발국들은 계획적이고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끝에 도발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라예보 사건 같은 것은 필요도 없었다.
1937년 말, 히틀러는 군 수뇌부를 모아놓고 오스트리아와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아직 취약한 독일의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며, 또 군대를 강화하는 이유는 ‘독일의 생존권’을 위해서다. 그러나 말하는 그도, 듣는 참모들도 생존권 따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이듬해 3월에 히틀러는 계획대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이 다시 뭉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이교도 동맹국인 튀르크는 빠졌으나 당시 연합국이던 아시아의 또 다른 이교도 파시즘 국가 일본이 그 자리를 메웠고, 게다가 ‘무늬만 연합국’이던 이탈리아까지 가세했다. 오히려 전력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강해진 셈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독일 혼자서 전쟁을 감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히틀러는 두 번째 약속도 지켰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위협을 가해 해체시키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병합한 것이다. 이미 에스파냐 내전에서 또다시 밀려오는 대규모 국제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일찍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으나, 당시 세계 정치의 우두머리인 영국은 평화 유지 (원래 평화란 기득권자의 구호가 아니던가?) 만을 부르짖으며 독일의 움직임에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의 우두머리가 된 미국 역시 대공황의 대책에 부심하고 있던 터라 굳이 유럽의 변화에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의 행보는 갈수록 빨라졌다. 1939년 5월에는 파시즘 형제인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어 추축을 완성하고(베를린과 로마가 같은 경도상에 위치했기에 ‘추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8월 23일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의 중립을 약속 받았다는 것은 곧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독일은 불과 며칠 뒤인 9월 1일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노골적인 군대의 이동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개전 2주일 만에 폴란드 주력군을 격파하자 동쪽의 소련도 러시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공격했다(또 다시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야합했다). 급기야 9월 말에는 두 나라가 폴란드를 분할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폴란드 국민은 나라 잃은 설움에서 해방된 지 겨우 20년 만에 또다시 나라를 잃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폴란드 분할의 원흉인 독일과 소련에 의해, 이후 한동안 독일은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에 폴란드의 희생만으로 전쟁은 그치는가 싶었다【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시기를 더 늦게 잡는 견해도 있다. 이를테면 연합국 대 추축국이라는 구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1941년 12월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다. 연표 작성자가 아니라면 전쟁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시기를 출발점으로 잡는 게 원칙일 것이다】. 적어도 독일은 아직 선전포고를 한 영국, 프랑스와는 맞붙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소련이 내친 김에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와 이듬해 봄까지 악전고투를 벌이느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소련은 아직 국제 질서 재편의 주역이 아니었다. 겨우내 침묵하던 독일은 1940년 4월 느닷없이 중립국인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하고 나서면서 이를 저지하는 영국,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충돌했다. 첫 접전은 독일의 완승이었다. 독일은 어렵지 않게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손에 넣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줄기차게 평화만을 외친 체임벌린 내각이 사퇴하고 독일에 대해 강경한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중심으로 하는 거국적 연립 내각이 들어섰다. 히틀러와 처칠, 이제야 비로소 전쟁의 적수가 제대로 맞붙게 된 것이다.
▲ 비운의 폴란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랬듯이, 폴란드도 독일과 러시아의 등살에 온전한 역사를 꾸리지 못했다. 18세기 말 세 차례에 걸쳐 분할되어 사라져버린 나라를 20세기 초에야 간신히 복구한 폴란드인들은 다시 독일과 소련 때문에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독일 기갑부대가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는 장면이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0) | 2022.01.30 |
---|---|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변수는 미국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파시즘의 힘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5장 불안의 과도기, 파시즘이라는 신무기 (0) | 202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