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중국에서였다. 독일은 중국을 아예 영토 분할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처럼 문명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유럽에서 거리도 먼 데다 수천 년의 제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직접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열강은 독일의 주장을 반대했으며, 당시 외세 배척 운동이 한창이던 중국 민중은 그 때문에 독일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1899년 의화단 운동이 산둥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도 바로 독일이 러시아 대신 산둥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종횡무진 동양사」, 375쪽 참조)】. 그러나 빌헬름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자신은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삼국동맹은 삼국협상을 이길 수 없었다.
독일에 못지않게 초조한 나라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차라리 “독일의 미래는 해상에 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빌헬름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바다로 나갈 항구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발칸에 더욱 집착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인 발칸을 영토화하면 지중해로 향하는 항구도 얻게 되리라. 이런 생각에서 1908년 오스트리아는 발칸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일방적으로 합병해버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던 열강은 그 사실을 그냥 넘겼으나, 당시 발칸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세르비아는 격분했다. 애초부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탐내고 있던 세르비아 정부는 물론이거니와(당시 세르비아는 발칸에 슬라브족의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대세 르비아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국민들이 발칸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야욕을 알아차렸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거리에서 대낮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를 반대하는 비밀조직(흑수단의 회원인 프린치프라는 세르비아 청년이 군대 시찰을 위해 사라예보에 온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것이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뺌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흑수단은 바로 세르비아 정부에서 조직한 비밀 테러 단체였기 때문이다.
▲ 사라예보의 총성 모든 역사적 대사건이 그렇듯이, 발단은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진들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간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맨 위는 사라예보에 도착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이고, 가운데는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프린치프가 체포되는 장면이며, 아래는 입관된 황태자 부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계기는 바로 이 사건이었다.
비록 황태자가 죽었지만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에 큰 손실이 아니었다. 왕조시대 같으면 왕위 계승이 걸린 문제지만 이제는 정치적 구실로만 이용될 뿐이다. 오히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세르비아의 야심을 꺾고 발칸을 쉽게 장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 달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양측은 서로 외교 통로를 동원하면서 비교적 점잖게 사태를 이끌었다. 그러나 양측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는 외교 카드로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월 말부터 사태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드디어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가 그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소식은 곧바로 유럽 전체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우선 가뜩이나 발칸의 이해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러시아가 즉각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삼국동맹과 삼국 협상이 순발력을 보인 것은 이때였다.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같은 날 프랑스도 동원령을 내렸다. 이틀 뒤 독일군은 프랑스로 진격을 개시했으며, 그다음 날에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원래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은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만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군사 조항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참전을 선언했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려면 벨기에를 거쳐야 했으므로 사실상 그것은 참전의 구실에 불과했다】. 7월 28일부터 8월 4일까지 불과 일주일 만에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에 속한 여섯 나라 중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전쟁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래 다시 유럽은 대규모 국제전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치열할 게 뻔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산업혁명이 유럽에 퍼지면서 유럽 각국의 공업은 크게 발달했고, 그 성과의 하나로 군사 무기가 개발되었다(그래서 1853년의 크림 전쟁을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한 나라를 유럽 각국이 방어하는 전쟁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유럽의 열강, 그것도 전 세계를 분할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벌이는 총력전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지는 세계대전이 된다. 물론 20여 년 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 진짜 화약고 서양의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발칸 반도를 화약고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전쟁의 주요 이해관계가 서유럽 세계에 내재해 있었음을 다소나마 은폐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진짜 화약고는 사진에서 당당한 자세로 걷고 있는 빌헬름 2세(앞 열 맨 왼쪽)였다. 그는 뒤늦게 뛰어든 식민지 쟁탈전에서 기존 열강의 지분을 빼앗기 위해 전쟁이라도 불사할 각오였다. 사진에서 빌헬름과 나란히 걷고 있는 인물들은 그의 여섯 아들인데, 불행히도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제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빌헬름 2세로 독일은 제국의 역사를 끝장내게 되니까.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다시 온 수습의 계절 (0) | 2022.01.30 |
---|---|
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신구 열강의 대결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태풍의 눈이 된 독일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0) | 2022.01.30 |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0) | 202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