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측천무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측천무후)

건방진방랑자 2021. 6. 6. 08:18
728x90
반응형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아무리 관료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천자라는 별칭(別稱)처럼 하늘에 이르는 것이었다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적ㆍ정신적 굴레를 벗고서야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체제인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서양 역사와 달리, 이미 고대부터 합리적인 관료제와 절대적인 황권이 공존한 중국의 역사는 서구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과업을 마무리했을 뿐 개인적으로는 병약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신생국의 중앙 권력이 미흡하다면 아무래도 문제다. 이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자로 나선 인물은 놀랍게도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 그 여성은 바로 역사에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로 기록된 측천무후(則天武后).

 

사실 무후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고종의 아버지인 당 태종의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태종이 죽을 무렵 그녀는 이미 아들 고종의 애첩이 되어 있었다어린 나이에 후궁이 되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후궁을 아들이 물려받은 것은 황궁에서도 유학(儒學) 이념이 확고히 뿌리 내리지는 않았음을 반증한다. 유학이 중화 제국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된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아직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고한 성리학 국가로 알려진 조선도 초기에는 항렬의 관념조차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동생이자 정적인 안평대군이 숙모와 놀아났다는 나쁜 소문을 퍼뜨린 바 있는데, 설령 무고라고 해도 궁중에서 그런 소문을 조작할 정도라면 유학(儒學)이 궁중에서도 생활 윤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고종에게는 황후가 따로 있었지만 황제의 애정을 잃은 황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무후는 곧 그 껍데기를 폐위시키고 황후가 되어 황제 대신 국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30년 가까이 허수아비 황제로 살아가던 고종이 죽었을 때 무후는 제위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아들들을 내세워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의 두 황제로 삼았다가 이내 폐위해버리고, 690년에는 드디어 직접 제위에 올랐다.

 

 

 

 

여제가 이상하다면 아예 나라를 바꿔주마. 제위에 오른 무후는 대담하게도 신성황제(神聖皇帝)라고 자칭하면서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여기서도 주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들의 이상향이자 영원한 고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위를 잠시 찬탈한 것일 뿐 실제로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측천무후의 지배는 15년간에 불과했다. 705년에는 아들 중종이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다시 황제로 복귀하면서 무후의 정치 실험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비해 그녀의 치세는 이후의 권력 구조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측천무후로 인해 관롱(關隴) 집단이 몰락했다는 점이다. 관롱 집단이란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의 귀족 집단을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오랜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한족화된 선비족의 귀족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와 당의 건국자인 양견(楊堅)이연(李淵), 나아가 두 나라의 개국공신 세력도 대부분 관롱 집단의 소속이었다. 개국한 지도 한참 되는 마당에 개국공신이라니, 눈에 거슬리는 그들을 측천무후가 가만 놓아둘 리 없다. 무후는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자신의 무씨 일가를 중용하는데(무후가 유달리 과거제에 집착한 이유도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후유증이 생긴다. 바로 외척 세력의 성장이다. 무씨 일가 자체는 중종이 복위하면서 몰락했지만, 이를 계기로 외척 권력이 당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한 제국이 멸망한 것도 외척과 환관 정치가 주요 원인이었는데, 당 제국도 비슷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측천무후 시대의 직접적 후유증은 무후를 폐위시키고 복위한 중종 대에 벌써 드러난다. 그것도 바로 전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한다. 무후의 며느리이자 중종의 황후인 위()씨가 정치에 관여하다 남편까지 독살한 다음 권력을 장악하고 일가붙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녀도 시어머니처럼 아예 제위를 차지해버릴까 고려하던 중 예종의 아들 이융기(李隆基)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복위시킨다. 그렇게 태자의 지위를 되찾은 이융기는 2년 뒤 아버지가 죽자 제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당의 6대 황제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최초의 여제 한 고조 시절 고조의 황후인 여태후가 세도를 부린 일이 있었지만, 정식 여제로는 당의 측천무후가 최초다. 온갖 치장에 화려한 옷을 입고 환관들의 보좌를 받으며 걷는 측천무후의 얼굴에서 첫 여제로서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50년 동안이나 권력을 잡은 탓에 이후 제국의 권력 구조는 크게 변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반복되는 역사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쓰러지는 세계 제국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