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신구 열강의 대결
신구 열강의 대결
전선은 예상한 것처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으로 갈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한편으로는 명분을 쌓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을 늘리기 위해 각자 중립국들을 영입하려는 활발한 외교전을 병행했다. 그 결과로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체질상’으로 일본은 동맹국에 속해야 하지만 영일동맹 때문에 본색을 숨겼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측으로 참전했고, 이듬해인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배반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며【이탈리아는 삼국동맹 소속이지만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여섯 나라 가운데 국력에서나 군사력에서 가장 약했으므로 어느 쪽으로 가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전쟁과 더불어 전개된 어지러운 외교전에서 이탈리아의 거취가 가지는 외교적 가치는 컸다. 동맹국 측은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 남부 이탈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남티롤과 트리에스테를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연합국 측은 그것 이외에 달마치야까지 얹어주겠다고 제의했다. 당연히 이탈리아는 연합국 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국이 승리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탈리아는 줄을 아주 잘 선 셈이다】, 발칸에서도 불가리아는 동맹국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명실상부한 세계대전으로 변모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일으켰으나 삼국동맹의 리더는 독일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동맹국 세력은 독일이 이끌었다. 애초에 독일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를 모두 상대해야 했을 뿐 아니라, 독일로서는 이번 전쟁이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은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먼저 프랑스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이동해 러시아를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격이 예상외로 빨랐다는 사실이 독일의 전략 수행에 중요한 차질을 빚었다(다시 한 번 러시아는 승부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과 싸우면서 병력의 일부를 빼돌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속전속결 구도는 깨어지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이제까지 역사상 어느 전쟁도 이렇게 장기전으로 전개된 경우는 없었다【기간으로만 보면 4년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짧은 편이다. 그러나 백년전쟁이나 30년 전쟁 같은 과거의 전쟁들은 그 기간 내내 싸운 게 아니었고, 전면전도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기간 내내 전선이 존재했고 전투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상 최초의 장기전이었다】. 장기전은 단기전과 달리 총력전일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규모가 큰 전쟁이라 해도 군사력으로만 승부했지 전 국민이 동원되는 총력전을 펼치지는 않았다. 이는 그만큼 이번 전쟁이 각국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미 각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국민들까지도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개념을 확실히 숙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참전국들의 정부는 각자 자신의 국민들을 향해 애국심과 자발적 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호소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싹을 보인 ‘국민전’의 양상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처음부터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그 점을 여주는 한 가지 예로, 이탈리아 총리는 참전을 선언하면서 “조국의 신성한 이기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좋게 보면 국민전을 주창한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렇잖아도 국민들이 품고 있는 징고이즘과 쇼비니즘을 더욱 조장한 것이다】.
▲ 대륙 전체가 전선으로 17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 세계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집대성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보여주는 이 지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전역이 얽힌 세계대전의 면모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장기전이 되자 새삼스럽게 중요해진 것은 보급로였다. 특히 해외 식민지로부터 필요한 군수물자를 수송해 올 수 있는 해상 보급로가 중요했다. 장기전의 양상으로 1917년까지 전선이 교착되면서 팽팽하게 맞서던 전황이 깨지게 된 계기는 바로 바다에서 발생한다.
독일 해군은 전통에 빛나는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해권을 빼앗긴 독일은 물자 수송은커녕 그동안 획득한 해외 식민지마저 차츰 잃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독일은 비상 카드를 빼어들었는데, 이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인 잠수함 U보트는 북해를 장악한 영국 해군만이 아니라 민간 상선들에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으며, 나아가 중립국의 상선과 여객선마저도 침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뜩이나 동맹국 측에 불리한 세계 여론은 이것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동맹국에 등을 돌렸다. 그게 여론만이면 좋겠는데, 악화된 여론은 예상치 못한 ‘거인’을 불러들였다. 그전까지 군수품 수출로 재미를 보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1917년 4월에 참전을 선언한 것이다. 그해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초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단독 강화를 맺고 철수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레시아와 미국이 맞교대한 셈인데, 연합국 측으로서는 소총을 버리고 대포를 얻은 셈이었다.
미국의 육군이 유럽 전선에 투입되면서 독일은 육상전에서도 연합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승패의 윤곽이 금세 뚜렷해졌다. 원래 동맹국 측은 독일의 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전개한 전투에서는 거의 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미군은 유럽에 상륙하기도 전에 힘을 발휘했다.
1918년 봄 곧 미군이 파견된다는 소식에 초조해진 독일은 그전에 전황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의 솜 강에서 총공세를 벌였다.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독일은 개전 이후 최대의 영토를 획득했다. 그러나 무리한 공격은 곧바로 큰 후유증을 불렀다. 적진 깊숙이 들어간 탓에 전선이 너무 길어졌고, 병력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그런 판에 미군이 매달 30만씩 파병되자 독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역전은 도저히 불가능한 형세였다.
종전 역시 개전에서처럼 발칸에서 시작되었다. 9월에는 불가리아가, 10월에는 오스만이 항복했으며, 이렇게 발칸 전선이 붕괴하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오스트리아도 11월 초에 항복했다. 그 일주일 뒤인 11월 11일 독일은 동맹국의 우두머리답게 휴전조약을 맺는 형식으로 항복했다.
▲ 전 국민의 전쟁 이전까지의 전쟁은 군대가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의 국제전은 참전국의 군대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후방에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선동이 중요했다. 위의 사진들은 그 정점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영국, 독일, 미국의 포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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