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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볼셰비키 혁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볼셰비키 혁명)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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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차르가 물러나자 일단 러시아의 정권은 의회에 넘겨졌다. 의회는 서둘러 임시정부를 구성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은 이번 혁명을 12년 전처럼 불발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혁명을 완성하려면 혁명정부가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참여하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새로운 권력체를 만들었다.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와 민중이 구성한 소비에트 정부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1905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소비에트가 생긴 것만이 아니다. 혁명적 대중 외에 볼셰비키라는 혁명의 지도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19174월에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이것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으나, 이미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은 사회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다분히 모험적인 것이었다.

 

승산이 없는데 승부수를 던지는 바보는 없다. 레닌은 임시정부와의 힘겨루기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믿는 도끼는 바로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국가 간의 약속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임시정부의 노선은 명분에서 앞섰다. 하지만 혁명적 상황에서 대의명분이란 쓰레기나 다름없다.

 

6월에는 또다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여 러시아의 전쟁 중단을 소리 높여 외쳤고, 7월에는 병사들마저 무장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이 기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타도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족했다. 임시정부에게는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볼셰비키와 레닌을 제압했으면 사회주의혁명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전쟁에, 대내적으로는 혁명적 분위기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과소평가했다. 오히려 임시정부 최고사령관인 코르닐로프는 정부 수반인 케렌스키를 무시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하려 들었다. 결국 코르닐로프의 조급함은 또 한 차례의, 그리고 마지막이 될 혁명을 불렀다.

 

 

귀국하는 망명자들 19174월 레닌은 32명의 볼셰비키 망명가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적국인 독일을 경유해서 러시아로 귀국했다. 사진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군중의 환영을 받는 레닌의 모습이다. 독일 정부는 그들에게 독일을 통과하는 동안 열차에서 내리면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는데, 그래서 그 열차를 봉인열차라고 부른다. 독일은 물론 사회주의를 혐오했지만 러시아로 귀국하겠다는 레닌의 요청을 들어주는 게 전쟁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레닌은 독일 정부에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겠다는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8월 말, 코르닐로프는 휘하 군대에게 수도 진격을 명령했다. 임시정부마저도 무시한 반란 행위였다. 볼셰비키는 이제 합법적인 자격으로 반란군을 막았다볼셰비키는 이미 적군(赤軍)이라는 자체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레닌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이론가였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19174월에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로 적군을 편성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적군은 러시아의 정규군이 된다. 코르닐로프가 체포됨으로써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제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1023, 껍데기만 남은 임시정부는 뒤늦게 볼셰비키를 공격하는 데 나섰으나 볼셰비키는 간단히 맞받아쳐 손쉽게 임시정부를 타도했다. 이것이 러시아에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성립시킨 10월 혁명이다.

 

이듬해 3월에 레닌은 볼셰비키당을 러시아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겨 새 헌법을 제정했다. 그런 다음 그는 혁명 전부터 주장하고 약속한 대로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 단독으로 강화를 이루었다. 굴욕적인 강화의 대가는 참담했다. 러시아는 독일에 핀란드와 발트 해 연안, 우크라이나를 내줘야 했다(전후 베르사유 체제는 러시아가 그 영토를 포기한 것을 추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출혈은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 정권이 안정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레닌은 스위스에 체류할 때 독일과 밀약을 맺고, 자신이 집권하면 전선에서 발을 빼겠다고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일 것이다. 실제로 19174월 그는 독일 정부가 제공한 봉인열차(중간에 아무 역에도 서지 않는 직행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왔는데, 밀약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록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과거의 러시아 제국과 다르다 해도 기존의 국제적 약속을 어긴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금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제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는 것과 같다.

 

레닌으로서는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 게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지 몇 개월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버린 것이다. 종전 자체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연합국 측에서 러시아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응징에 나섰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유럽 모든 정부에서 혐오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에 들어섰기에 연합국들은 더욱 분노했다(자유주의 공화국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연합국들의 기세에 힘입어 러시아 내에서도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0년까지 이들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치러 마침내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당시 러시아에 진출한 연합국 군대들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군대는 바로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국제전에서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던 일본군은 대소간섭전쟁에서 처음으로 패배하고 비참하게 철수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의 세계대전

신구 열강의 대결

다시 온 수습의 계절

혁명의 러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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