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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다시 온 수습의 계절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다시 온 수습의 계절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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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온 수습의 계절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세계 분할이 완료되면서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일단 완성되었다. 어지러운 유럽의 국제 정세는 대립하는 두 개의 축으로 단순화되었다. 남은 것은 전쟁이든 외교든 양측의 이해관계를 정산하는 절차였다. 여기서 현실의 역사는 전쟁을 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양대 제국주의 세력이 맞붙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질서의 완료이자 새로운 재편을 향한 진통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득권층은 신흥 세력을 누르고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참전국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후 질서를 수립했고,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는 빈 체제가 교통정리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세기 초마다 터진 대형 국제전에서 유럽 각국은 전쟁이 끝난 뒤 늘 국제회의를 열어 국제조약을 맺고 전후 질서를 수립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전후 처리를 위해 연합국 수뇌들이 1919년 파리에 모였는데, 여기서 생겨난 새로운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른다.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자 국민전이었고, 25개의 참전국으로 전쟁의 규모도 사상 최대였다. 게다가 잠수함, 비행기, 비행선, 탱크, 독가스 등 각종 신무기도 선보였다. 무엇보다 전사자가 무려 1000만 명에 달한 재앙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는 의외로 쉬웠다. 그 이유는 참전국들이 확연히 두 패로 나뉘었고 승패가 명확히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수습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를 확고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전 세계가 영국, 프랑스, 미국의 주도로 운영될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계는 소수의 지배 국가들과 다수의 피지배 국가들로 나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패전국들을 포함한 피지배 국가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우선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가 몰수되었고, 무기 생산도 금지 되었으며, 1320억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이로 인해 독일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는데, 이는 20여 년 후 독일이 다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나서는 계기가 된다). 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형적인 제국은 생겨난 지 50년 만에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분립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나라가 탄생했다.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면서도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보헤미아가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것이다. 원래 오스트리아는 영토와 민족에서 독일계 헝가리계·슬라브계로 나뉘어 있었으니, 패전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민족 국가의 멍에를 벗은 셈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전쟁의 계기를 제공한 세르비아는 두둑한 보너스를 챙겨 승전국과 패전국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바라던 대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물론 크로아티아까지 통합해서 발전적 해체를 이루어 새로 유고슬라비아라는 연방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기준으로 볼 때, 17세기 30년 전쟁으로 서유럽 국가들의 면모가 처음 드러났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서유럽 각국의 경계선이 확정되었다면, 20세기의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 국가들의 경계를 확정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수백 년의 시차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를 나타내는 듯하다.

 

 

신무기 박람회 1차 세계대전은 각종 신무기의 경연장과도 같았다. 독일은 잠수함과 비행선을 무기화했고 독가스를 신무기로 선보였다. 또 영국은 탱크를 실전에 처음 투입했다. 특히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개전 초기 비행기는 정찰용으로만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전투기도 출현했다). 왼쪽은 독일의 독가스에 대비하여 방독면을 쓰고 있는 프랑스군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해골로 발견된 독일군 병사의 모습이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의 주요 세력이던 오스만 제국은 원래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케말 파사(Kemal Pasha, 1881~1938)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이 반정부군을 구성하더니 유명무실해진 제국을 대신해 연합국의 간섭에 거세게 저항했다. 분할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어차피 이교도 세계인 소아시아를 영토적으로 지배할 자신이 없던 연합국은 결국 그들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케말 파샤는 연합국 측과 로잔 조약을 맺고 새로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한때 동유럽을 호령하며 서유럽 세계까지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은 6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나라들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따라 교통정리만 해주면 되었다. 그에 필요한 신호등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시했다. 그것이 곧 민족자결주의, 즉 각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형성하고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원래 윌슨은 주로 유럽 지역을 염두에 두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고 베르사유 체제의 승전국들도 그렇게 이해했으나, 전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 민족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919년 한반도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바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바탕으로 일어났다만약 일본이 패전국이었다면 한반도도 당연히 이때 독립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이 유럽에서만 벌어졌음에도) 승전국의 신분이었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베르사유 체제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된 1910년은 세계적으로 열강이 식민지 정복을 거의 완료하던 시점이었으므로 세계 여론에 비친 한반도는 그저 열강에 먹힌 또 하나의 식민지일 뿐 별다른 주목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우리처럼 인구가 무려 2000만 명에 달하는 식민지는 없었다고 보면 당시 세계 여론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연합국의 핵심이었다가 전쟁이 거의 끝나갈 즈음 배신한 러시아는 괘씸죄로 찍혀 패전국이 아니었음에도 패전국보다도 더 심한 제재를 받았다. 패전국이 아니니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연합국 측은 역사적인 책임을 묻기로 했다. 무려 2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초 북방전쟁으로 러시아가 얻은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독립시켜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신생국으로 탄생했으며, 폴란드와 핀란드가 독립을 얻었다. 폴란드인들은 100여 년 만에 독립을 얻은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189쪽 참조)에 참여한 독일(프로이센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모두 단죄를 받았으니 더욱 기뻤을 것이다.

 

한 가지 당시 연합국이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은 동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진출이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에 참전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차피 기본 전장은 유럽이니까 일본으로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했으나 유럽 전선에 참여하기는커녕 전쟁 기간 동안 아시아에서 제 몫을 부지런히 챙겼다. 명분은 독일 식민지인 태평양의 작은 섬들을 접수하여 독일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애초에 목표로 삼은 중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마침 산둥 반도는 독일의 조차 지역이었으므로 구실도 좋았다. 일본은 잽싸게 만주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산둥 반도도 이동시켜 독일군의 요새를 격파하고 중국 침략의 든든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미국의 역할 전쟁의 종반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러시아가 맡은 역할 이상을 해냈다. 미국의 참전은 교착 상태에 있던 전황을 순식간에 연합국 측의 우위로 만들었다. 사진은 프랑스에 처음으로 상륙한 미군이 도열하고 있는 장면이다. 전쟁 중반까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고 종전 이후에는 막강한 정치력까지 얻었으니, 미국으로서는 여러모로 유익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의 세계대전

신구 열강의 대결

다시 온 수습의 계절

혁명의 러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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