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건방진방랑자 2022. 4. 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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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이성이란 주체의 완전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상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는 긍정적으로 답합니다. 그 근거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근대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이었던 갈릴레이가 철학적으로 갖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려 보았다는 유명한 실험은 믿을 수 없는 신화라고 합니다. 갈릴레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실험보다는 자연과학(당시로선 물리학)을 수학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론 극히 불확실한 것이어서, 그대로 둔다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법칙으로 정식화되어야 했고, 따라서 수학적인 형태로 요약될 수 있어야 비로소 참된 지식’(진리)이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이란 수학적, 기하학적 기호들로 가득찬 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근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뉴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사실 보편중력의 법칙이 더 좋은 번역인데)을 서술한 그 유명한 책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였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경험적 지식의 불명료함을 씻고 분명하고 뚜렷한(clare et distincte) 판단 이 말을 흔히 명석판명한 판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명석하다’(똑똑하다), ‘판명되다’(분명히 드러나다)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는 일본어를 그대로 음독 번역해서 그런 것입니다 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자신도 수학적 작업에 무척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기하학조차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것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기하학은 사실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처럼 직관에 의존하고 있던 기하학을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대수학(代數學)으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그는 x축과 y축 등으로 이루어지는 데카르트 평면이란 좌표평면 상으로 기하학을 옮겨 놓습니다. 그래서 그냥은 삼각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좌표평면에 옮기면 특정한 삼각형은 세 변의 길이가 어떻고 꼭지점이 어디 있고 하는 식으로 대수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도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수학적인 면에서의 작업이었고, 철학적인 면에서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을 수학화하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갈릴레이 역시 자연과학에 수학을 도입했지만, 그것이 어째서 옳은지, 왜 진리인지는 증명하지 않았습니다(그는 과학자였으니까요). 한편 데카르트는 갈릴레이의 주장이 어째서 옳은 것인지를 증명하는 게 바로 (자신의)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에게 확실하고 완전한 개념의 모델은 수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지식을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유관념과 일치하는 지식, 즉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유관념이 진리란 개념은 이래서 또 다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철학이 과학의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과학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 전반을 사로잡았던 일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젠 오직 참된 지식만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직 과학적 지식만이 참된 지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에는 어떤 지식도 자신이 과학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말해 과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를 특징짓는 이 과학주의라는 사고방식은 이미 데카르트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뒤안 혹은 정치적 포르노그라피

절대주의의 시대, 그것은 마치 칼스루헤의 길들처럼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왕으로 집중된 시대였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왕의 모든 행동은, 심지어 똥 누는 것마저도 귀족들의 시선에 제공되는 스펙터클(구경거리)이었다. 왕의 행동은 식탁에서 포크를 쓰고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등등의 모든 사교 매너의 살아있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 절대주의의 중심에서는 또한 정반대의 삶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사유하는 이성의 뒤안에 어두운 정념이 보이지 않는 불꽃을 태우고 있듯이, 사교의 장인 파티는 곧바로 연애와 섹스로 이어졌고, 결혼과 섹스가 별개였던 시대였기에 그 연애와 섹스는 저 규칙적인 시선을 가로지르며 혼란과 음탕으로 치달았다. 포르노그라피들이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정치ㆍ철학 문헌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위의 그림은 동 부그르 이야기(Histore de dom B)의 삽화로 섹스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포르노그라피 중 하나였던 동 부그르 이야기는 진정한 악덕은 궁정인들이나 성직자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레즈비언, 남색, 근친상간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었다. 그 책의 도판을 만든 사람은 궁정인이나 성직자, 수녀들의 난교를 그렸다는 이유로 책을 만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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