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 성선설을 지키기 위해 고자(告子)와 논쟁하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 성선설을 지키기 위해 고자(告子)와 논쟁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5. 14:05
728x90
반응형

성선설을 지키기 위해 고자(告子)와 논쟁하다

 

 

맹자가 보기에 인간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선한 마음 또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자연히 그를 동정하는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맹자에 따르면, 이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기 때문이지요. 그 유명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공자의 유학 사상을 변호하려는 숭고한 소명을 부여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옹호했던 것은 자신이 체계화한 성선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요. 맹자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성선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어떤 사상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고자(告子)입니다. 물론 그는 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맹자는 이제 고자라는 인물의 도전에 맞서 자신의 성선설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 이제부터 맹자가 어떻게 고자의 도전을 물리치고 성선설을 정당화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고자가 말했다.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술잔과 같다. 인간의 본성을 어질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를 나무술잔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告子曰: “, 猶杞柳也; , 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 猶以杞柳爲桮棬.”

고자왈: “, 유기류야; , 유배권야. 이인성위인의, 유이기류위배권.”

 

맹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버드나무의 본성을 따라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본다면, 또한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사람을 어질고 의롭게 만든다고 보는 것인가?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서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는 것은 분명 그대의 말일 것이다.” 맹자』 「고자

孟子曰: “子能順杞柳之性而以爲桮棬乎? 將戕賊杞柳而後以爲桮棬也, 如將戕賊杞柳而以爲桮棬, 則亦將戕賊人以爲仁義與? 率天下之人而禍仁義者, 必子之言夫!”

맹자왈: “자능순기류지성이이위배권호? 장장적기류이후이위배권야, 여장장적기류이이위배권, 즉역장장적인이위인의여? 솔천하지인이화인의자, 필자지언부!”

 

 

맹자는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덕목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고자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지요. 고자는 인의예지가 학습된 것, 따라서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성을 살아 있는 버드나무에 비유하면서, 유학자들이 내세우는 인의예지는 그 버드나무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나무술잔과 같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누구나 알다시피 나무술잔을 만들려면 살아 있는 버드나무는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고자가 든 이 비유는 결국 유학의 인의예지가 인간의 고유한 생명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외적 폭력을 통해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맹자는 고자가 들었던 버드나무와 나무술잔의 관계를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의 성선설(性善說)을 옹호하려고 합니다. 그는 버드나무가 나무술잔이 되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버드나무에는 이미 나무술잔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주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만약 버드나무에 나무술잔이 될 수 있는 잠재적 본성이 전혀 없었다면, 결코 버드나무는 나무술잔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맹자의 이런 논법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고자에게 버드나무와 나무술잔은 각각 자신의 힘으로 살아 있는 존재와, 외부의 강제적 힘에 의해 죽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버드나무는 살아 있는 것이고, 나무술잔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맹자의 논법대로라면 살아 있는 버드나무가 곧 죽은 나무술잔과 같다는 말이 됩니다.

 

이 점에서 맹자는 고자의 논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에게는 버드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인지, 방금 베어져 목재로 변한 나무인지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맹자와 그의 제자들이 맹자에 고자와의 논쟁을 기록한 이유는, 아마도 맹자가 고자를 논파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맹자가 고자의 핵심 논점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각자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