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자 연표(孔夫子 年表)
선성소상(先聖小像)
공자와 제자 안연의 모습을 그린 그림
(三十六幅 孔子聖蹟圖 中에서)
▲ 니산치도(尼山致禱)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安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 공자가 태어났다.
孔子的母親顔徵在, 在尼丘山上祈禱后, 生下兒子孔子.
▲ 기린옥서(麒麟玉書)
공자가 태어나기 전, 하늘이 내린 책을 기린이 토해 냄.
孔子還沒有出生時, 有隻麒麟在他家裡, 口吐天降之書.
1살(BC 551) - 주영왕(周靈王, 동주시대의 천자天子) 21년 노양공(魯襄公, 제후諸侯) 22년
◇ 노(魯)나라 추읍(陬邑) 창평향(昌平鄕,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시曲阜市 동남쪽의 니산尼山부근)에서 태어남.
◇ 태어날 때부터 머리 위쪽 정수리 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했다.
◇ 자(字)는 중니(仲尼)이고, 성(姓)은 공씨(孔氏)이다.
◇ 형제로서 이복형이 한 사람 있는데, 이름은 맹피(孟皮), 자는 백니(伯尼)라고 전해짐. 『공자가어(孔子家語)』 「본성해(本姓解)」
◇ 생일은 하력(夏曆)으로 8월 27일(주력周曆 10월 27일, 양력 9월 28일)
▲ 이용오노(二龍五老)
공자가 태어나던 날 저녁, 두 마리의 창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집을 감싸고, 다섯 신선이 그의 집 뜰에 내려옴.
孔子誕生的晩上, 有兩條蒼龍自天降下, 繞護著他家, 五位神僊降到他家院中.
▲ 균천강성(鈞天降聖)
공자를 낳을 때 공자의 모친이 방에서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음.
孔子出生時, 顔氏在房中聽到天上的音樂聲.
3세(BC 549) - 주영왕 23년 노양공 24년
◇ 노(魯)나라에서 거주함.
◇ 부친(父親) 숙량흘(叔梁紇)이 별세하자 방산(防山, 고부성 동쪽, 叔公林이라고 부름)에 장사지냄.
◇ 모친(母親) 안징재(顔徵在) 공자를 업고 곡부성으로 이사함.
6살(BC 546)
◇ 모친의 교육 아래 호학(好學)의 습관을 익힘.
◇ 제기(祭器)를 갖추고 예용(禮容)을 갖추어 놀이하며 예의(禮儀)를 연습함.
▲ 조두예용(俎豆禮容)
제사놀이를 하며 예법을 익힘.
孔子爲兒嬉戱, 常陳俎豆設禮容.
7살(BC 545) - 주영왕이 사망하고 경왕(景王)이 왕위를 계승함.
8살(BC 544) - 주경왕 원년 노양공 29년
◇ 노(魯)나라에서 거주함.
◇ 오(吳)나라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주례(周禮)를 보기 위해 주공단(周公旦)의 봉토(封土)로서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사용했던 노(魯)나라에 옴.
9살(BC 543)
◇ 자산(子産)이 집정(執政)하여 정(鄭)나라가 크게 번성하자, 훗날 자산의 공적을 높게 평가하여 ’혜인(惠人)‘이라고 칭함.
10살(BC 542) - 노양공이 사망하고 노소공(魯昭公)이 계승함.
◇ 제자 자로(子路)가 태어남.
12살(BC 540) - 주경왕 5년 노소공 2년
◇ 노(魯)나라에서 거주함.
◇ 진(晉)나라 한선자(韓宣子)가 노(魯)나라 문물(文物)의 풍부함을 보고 감동하여 “주례(周禮)가 모두 노(魯)나라에 있다.”고 함.
14살(BC 538)
◇ 훗날 “내가 어린 시절에 가난하여 비루(鄙陋)한 일을 잘했다[吾少也 賤故, 多能鄙事]”고 회상함.
15살(BC 537)
◇ 훗날 “내가 15살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志于學]”고 회상함.
19살(BC 533)
◇ 송(宋)나라 올관씨(兀官氏)의 딸과 혼인함, 병관씨(幷官氏)라는 설도 있음.
20살(BC 532)
◇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축하하기 위해 잉어를 하사하자 아들의 이름을 ‘잉어[鯉]’라고 지음. / 훗날 아들 공리(孔鯉)의 자(字)를 백어(伯魚)로 지음.
◇ 창고 관리를 맡는 ‘위리(委吏)’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감.
▲ 직사위리(職司委吏)
공자가 성년이 된 후, 계손씨 집안의 창고를 관리하는 위리(委吏)가 됨.
孔子成年後 曾爲季孫氏的委吏(管理倉庫的小官)
▲ 명명영황(命名榮貺)
공자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노(魯)나라 군주 소공(昭公)이 잉어(鯉魚)를 하사하여 이에 이름을 리(鯉)로 짓고 자를 백어(伯魚)라 하였다.
孔子生了兒子 昭公賜給鯉魚 孔子爲了顯耀國君的賞賜 給兒子取名孔鯉 字伯魚
21살(BC 531)
◇ 가축 관리를 맡는 ‘승전(乘田)’이 됨.
▲ 직사승전(職司乘田)
계씨 집안의 관리가 되었는데 생축(牲畜)이 잘 번식(繁殖)하여 많아졌다.
曾爲季氏司職吏, 牲畜繁殖增多.
24살(BC 528)
◇ 모친(母親) 안징재(顔徵在) 별세함.
27살(BC 525)
◇ 노(魯)나라에 내조(來朝)한 담(郯)나라(현재, 산동 담성의 서남쪽에 위치)의 후(侯) 담자(郯子【담(郯)나라 군주인 자작(子爵)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소공(昭公) 때 그가 노나라에 조현(朝見)하러 와서 관직을 새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자신의 먼 조상인 소호씨(少皞氏)의 행적을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공자(孔子)가 그를 찾아가서 배운 뒤에 “내가 듣건대, 천자의 관직이 정당함을 잃었을 때에는 사방의 이민족에게 배울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역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猶信].”라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17年】)에게 고대의 관직제도를 배움.
29살(BC 523)
◇ 처음으로 노(魯)나라의 제사에 참가함.
30살(BC 522)
◇ 훗날 “30세에 자립했다[三十而立].”고 회상함.
◇ 사학을 열어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함. 제자 중궁(仲弓)과 유약(有若)이 태어남.
◇ 12월에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음.
31살(BC 521)
◇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와서 정치를 물음.
32살(BC 520) – 주경왕(周景王) 25년 노소공 22년
◇ 노(魯)나라에 거주함.
◇ 4월 주경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탁왕(卓王)이 즉위했으나 왕자(王子) 조(朝)의 반란으로 피살됨.
◇ 진(晉)나라가 왕자 조를 축출하고 경왕(敬王)을 세움.
33살(BC 519) – 주경왕(周敬王) 원년(元年) 노소공 23년
◇ 노(魯)나라에 거주함.
34살(BC 518)
◇ 남궁괄(南宮适)과 주(周)에 가서 노담(老聃)에게 예(禮)를 물음.
◇ 노나라의 맹희자(孟僖子)가 임종(臨終) 시에 그의 아들을 공자에게 사사하여 예를 배우라고 유언함.
▲ 문례노담(問禮老聃)
남궁괄(南宮适)과 더불어 주나라에 가서 노담(老聃)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노담은 이전에 주왕조 수장실의 관리로 주례(周禮)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因爲老子曾做過周王朝的守藏室之史(管理藏書的官吏), 熟知周禮
35살(BC 517)
◇ 혼란한 노(魯)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피신함
36살(BC 516) - 주경왕 4년 노소공 26년(B.C. 516년),
◇ 제(齊)나라에 거주함.
◇ 제경공(齊景公)이 정치를 묻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대답함.
◇ 순임금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들으시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감명을 받음[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 재제문소(在齊聞韶)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공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순(舜)임금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듣고서 3개월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 이때 감탄하여 ‘음악이 이렇게까지 좋은지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不圖爲樂之至於斯也?
37살(BC 515)
◇ 경공(景公)이 품구(稟邱)의 읍(邑)을 제공하려 하자 이를 사양하고 魯나라로 돌아옴.
▲ 안영저봉(晏嬰沮封)
경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공자에게 니계(尼谿)의 땅을 떼어주고 중용(重用)하려 하였으나 안영(晏嬰) 등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자 이에 경공도 의심을 품고 결국 등용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마침내 제(齊)나라를 떠나 다시 노(魯)나라로 돌아옴.
38살(BC 514) - 주경왕 6년 노소공 29년
◇ 노(魯)나라에 거주함.
◇ 제자 안회(顔回)가 태어남.
39살(BC 513)
◇ 진(晉)나라가 형정(刑鼎)을 주조하자 비난하며 “백성들이 정(鼎)에서 형벌(刑罰)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함.
◇ 주(周)나라의 문물제도가 파괴됨을 깊이 우려함.
40살(BC 512)
◇ “40살에 미혹되지 않았다[四十而不惑].”라는 말로 인생관이 확립된 시기라고 회상함.
41살(BC 511)
◇ 진후(晉侯)는 유랑하는 소공(昭公)을 고국인 노(魯)나라에 보내려 하지만, 소공이 응하지 않음.
42살(BC 510)
◇ 겨울에 소공이 사망하고 계손씨(季孫氏)가 소공의 동생인 공자(公子) 송(宋, 定公)을 제후 자리에 앉힘.
43살(BC 509) - 주경왕 11년 노정공(魯定公) 원년(元年)
◇ 노(魯)나라에 거주함.
◇ 여름 소공의 영구(靈柩)가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장사지냄. 정공(定公)이 즉위함.
45살(BC 507)
◇ 제자 자하(子夏)가 태어남.
◇ 주(邾)나라 장공(莊公)이 사망하고 은공(隱公)이 즉위하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공자에게 대관식(戴冠式)의 예(禮)를 물음.
46살(BC 506)
◇ 노환공(魯桓公)의 묘를 참관하여 제기(祭器)를 살핌.
◇ 제자 자유(子游)가 태어남.
47살(BC 505)
◇ 제자 증삼(曾參)이 태어남.
◇ 노나라의 권세가인 계씨(季氏) 집안의 신하로서 전권을 쥐고 있던 양호(陽虎)가 공자를 만나려 했으나 피함.
48살(BC 504)
◇ 양호(陽虎)의 계략으로 노(魯)나라가 정(鄭)나라를 침범함.
50살(BC 502)
◇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라고 회상함.
◇ 양호(陽虎)가 계손씨(季孫氏)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킴.
◇ 계손씨의 가신(家臣)이었던 공산불요(公山不擾)가 공자를 초청(招請)했으나 제자들의 반대로 가지 않음.
51살(BC 501)
◇ 중도(中都)의 재상으로 임명되어 훌륭한 정치를 시행함.
◇ 제자 민자건(閔子騫)이 태어남,
◇ 6월에 노(魯)나라에서 양호(陽虎)를 정벌하자 양호가 제(齊)와 송(宋)을 거쳐 진(晉)나라로 도망감.
52살(BC 500)
◇ 노(魯)나라 중도(中都)의 재(宰)에서 승진하여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노(魯)나라 재상의 일을 맡음.
◇ 여름, 제(齊)나라 협곡의 회맹(會盟)에서 노(魯)나라에게 항복받으려고 했던 제(齊) 경공(景公)의 시도를 차단함.
▲ 협곡회제(夾谷會齊)
노(魯)나라 정공 10년 봄에 제(齊)나라 제후와 협곡에서 만났는데 제나라에서 변방 국가들의 음악을 연주하자, 공자는 기악과 무용을 물리도록 하고 이후 제나라 경공이 음악가들을 벌하게 만들어 노나라가 외교상 한 차례 승리를 얻게 하였다.
▲ 귀전사과(歸田謝過)
제나라는 예전에 노나라에게서 빼앗았던 땅을 사과의 뜻으로 돌려줌.
53살(BC 499)
◇ 공자가 국정(國政)을 관장한 지 3개월이 지나자 노(魯)나라가 번성해짐.
◇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던 중 노나라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여 정치 기강을 바로잡음(일설엔 55세로도 봄)
▲ 주소정묘(誅少正卯)
공자는 노나라 대법관 시절 정치를 혼란하게 만든 사대부 소정묘를 사형시킴. 국가의 대사에 참여한 지 삼 개월 만에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고, 남녀가 분별이 생기고, 물건을 파는 자가 가격을 속이지 않는 등 나라에 큰 치덕의 모습이 드러났다.
54살(BC 498)
◇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삼도(三都) 중 두 곳의 성(城)을 함락시켰으나, 맹손씨(孟孫氏)의 성읍(成邑)은 함락시키지 못함.
55살(BC 497)
◇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생활을 시작함.
◇ 노(魯)나라가 잘 다스려지자 제(齊)나라에서 이를 방해하기 위해 80명의 여악(女樂)을 보내 정공(定公)을 미혹시킴.
◇ 정공이 여색(女色)과 음악에 빠져 정사(政事)를 소홀히 하자, 공자가 크게 실망하여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떠남.
◇ 위(衛)나라에서 진(陳)나라로 가던 중 공(匡)에서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아 고통(5일간)을 겪고 위(衛)나라로 돌아옴.
▲ 여악문마(女樂文馬)
제(齊)나라에서 악무(樂舞)에 능한 미녀 80명과 좋은 말 120필을 정공과 계환자에게 보냄.
▲ 인번거로(因膰去魯)
미녀와 좋은 말을 받고 즐거워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구실로 노나라를 떠나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기 시작함.
56살(BC 496) - 주경왕 24년 노정공 14년
◇ 위(衛)나라에 거주함.
◇ 일설엔 광(匡)땅에서 고통을 당했다고 함.
▲ 광인해위(匡人解圍)
공자의 모습이 양호(陽虎)와 닮아 광땅에서 5일이나 잡혔다가 풀려남.
57살(BC 495) – 노정공(魯定公)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애공(哀公)이 즉위함.
◇ 일설엔 사마환퇴(司馬桓魋)가 죽이려고 했다고 함.
58살(BC 494) - 주경왕 26년 노애공(魯哀公) 원년
◇ 위(衛)나라에 거주함.
59살(BC 493)
◇ 위(衛)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가던 중 황하(黃河) 부근에 이르렀을 때, 조간자(趙簡子)가 현인(賢人) 두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위(衛)나라로 다시 돌아옴.
◇ 이후에 다시 위(衛)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향하는데, 도중에 사마환퇴(司馬桓魋)가 죽이려고 하자 정(鄭)나라로 갔다가 다시 진(陳)나라로 향함.
◇ 위령공(衛靈公)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출공(出公) 첩(輒)이 즉위함.
▲ 서하반가(西河返駕)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길을 떠났으나 황하 강변에 다다라 진나라가 현명한 사대부인 두명독(竇鳴犢), 순화(舜華)를 죽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군자는 같은 군자를 해치지 않는다”라며 가마 머리를 돌렸다.
▲ 송인벌목(宋人伐木)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도착한 공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제사 예절을 연습하는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큰 나무를 베어버렸다.
60살(BC 492)
◇ “60세에 귀가 순해졌다[六十而耳順].”라고 말함.
◇ 송(宋)을 지나 진(陳)으로 감.
63살(BC 489)
◇ 진(陳)나라에 머물다가 오(吳)나라에서 진(陳)나라를 침략하여 크게 혼란스러워지자 진(陳)나라를 떠나 채(蔡)를 거쳐 부함(負函)으로 가던 중 길이 막혀 7일간 끼니를 굶음.
◇ 부함(負函)에 도착하여 섭공(葉公)이 예(禮)로써 대우하고 초(楚)나라의 소왕(昭王)이 공자를 중용(重用)하려 했으나 간신배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음.
▲ 재진절량(在陳絶糧)
공자가 초(楚)나라로 가는 도중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대부들이 함께 병사를 보내 길을 막아 식량이 바닥나 곤경에 처함.
▲ 자서저봉(子西沮封)
초나라 소왕이 땅 칠백 리를 하사하려 하였으나 자서가 반대하자 소왕은 생각을 취소하였고, 공자도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옴.
64살(BC 488) - 주경왕 32년 노애공 7년
◇ 부함(負函)을 떠나 위(衛)나라로 돌아옴.
65살(BC 487)
◇ 부인 올관씨(兀官氏)가 별세함.
◇ 3월, 오(吳)나라가 노(魯)나라를 침입했지만 오(吳)나라가 크게 패함. 이 싸움에서 제자 유약(有若)이 큰 공을 세움.
67살(BC 485)
◇ 일설에는 부인 올관씨(兀官氏)가 별세했다고 함.
68살(BC 484)
◇ 봄에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침범하자, 제자 염유(冉孺)가 우군(右軍)을 지휘하여 승리함.
◇ 계강자(季康子)가 폐백을 보내 초청하니, 13년간의 천하유세(天下遊說)를 마치고 노(魯)나라로 돌아옴.
◇ 노(魯) 애공(哀公)과 계강자(季康子)를 도와 국정(國政)을 자문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제자교육과 오경(五經) 편찬에 전념함.
◇ 시(詩)와 서(書)와 예(禮)를 정리함.
▲ 작가구릉(作歌丘陵)
계강자가 예물과 함께 예를 갖추고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노(魯)나라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고 공자는 귀국함.
▲ 행단예악(杏壇禮樂)
살구나무 강단에서 예와 악을 가르침. 제자를 가르치고 문헌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함. 제자의 숫자가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인이었다.
69살(BC 483) - 주경왕 37년 노애공 12년
◇ 노(魯)나라에 거주함.
◇ 아들 리(鯉)가 마흔 아홉의 나이로 죽음. / 일설에는 안회(顔回)가 죽었다고 함.
70살(BC 482)
◇ 노애공(魯哀公)이 정사(政事)를 물음.
◇ “70세가 되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데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 고백함.
71살(BC 481)
◇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음, 노나라에서 기린을 잡음.
◇ 제자 안회(顔回)가 죽자 “하늘이 날 버렸구나, 하늘이 날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통곡함.
▲ 서수획린(西狩獲麟)
서쪽에서 기린(麒麟)이 잡히자 공자는 절필을 하게 됨.
72살(BC 480)
◇ 겨울 위(衛)나라에 정변이 발생하여 제자 자로(子路)가 죽음.
73살(BC 479) - 주경왕 41년 노애공 16년
◇ 하력(夏曆) 2월 11일(周曆 4월 11일, 陽曆 4월 18일) 생을 마침.
◇ 노성(魯城, 현재의 곡부曲阜) 북쪽에서 장사지냄.
◇ 노(魯)나라 애고(哀公)이 제문(祭文)에서 공자를 ‘니보(尼父)’라고 존칭함.
▲ 몽전양영(夢奠兩楹)
공자의 병이 중하여 자공이 문안을 가니 “어제 꿈에 제사 성전 양 기둥 사이에 앉았는데 은나라 사람은 그곳에서 장사지내기 때문에 자기는 곧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7일 뒤 공자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 치임별귀(治任別歸)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강 언덕에 묻혔는데 제자들이 심상(心喪) 3년을 지낸 후 떠났고, 자공(子貢)은 무덤가에 오두막[廬]를 짓고 3년을 더 지냈다.
▲ 한고사로(漢高祀魯)
한고조 유방(劉邦)이 곡부(曲阜)를 지날 때 소, 양, 돼지를 잡아 제를 올렸다.
▲ 진종사로(眞宗祀魯)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을, 송(宋)나라 진종(眞宗)도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였으나 5년 후 현(玄)을 지(至)로 바꾸어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고 원(元)나라 때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명(明)나라 때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시호도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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