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물이나 감각경험이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영혼(이성)에 우위를 두는 관념론의 입장을 채택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이 완전한 이성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신을 끌어들입니다. 완전한 개념은 불완전한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뭐가 다른가?”하고 성급하게 비난하진 맙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신을 증명하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데카르트는 신이 준 것은 바로 완전한 것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임을 강조합니다. 누가 준 것이든 간에 인간이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타고난다는 게 그에겐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는 거꾸로 이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와 신앙을 위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것이고요.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 중심축은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고와 서로 다른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 이성의 완전성 | ← | 신이 부여 | (近世) |
아우구스티누스 | 신의 존재 | ← |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 | (中世) |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 중세적인 세계관과 근대적인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 당시 신학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은 중세의 몰락이 거의 분명해진 그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됩니다. 헤겔 역시 신학적 사고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세웠고, 종교비판을 감행했던 포이어바흐는 대학에서 쫓겨나 시골에서 은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갖고 있던 신학적 요소는 차라리 시대적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인데, 분명한 것은 그런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세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의 공존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네그리는 데카르트 철학을 절대왕정에 비교합니다.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절대왕정은 봉건제 말기 그리고 근세 초기에 봉건적인 귀족과 근대적인 부르주아계급의 힘의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 ‘균형국가’입니다. 따라서 절대왕정에서는 반대되는 두 계급, 즉 중세적 계급과 근대적 계급이 타협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절대왕정과 비슷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이성 능력의 완전성을 기초로 해서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개념들, 수학에서의 원이란 개념은 우리가 지각(경험)하는 실제 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에게 이 ‘완전한 원의 개념’은 실재하는 수많은 불완전한 원보다 훨씬 더 진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수학이야말로 확실하고 완전한 지식, 즉 진리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 바로크적 절대주의, 절대적 중심
독일의 왕도(王都)인 칼스루헤(Karlsruhe)는 베르사이유를 모델로 했던 바로크 도시의 한 극한을 보여준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많은 길들이 한 점에 모인다. 무한한 공간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점, 그리고 그 하나의 점에 왕궁이 자리잡고 있다. 무한한 세계의 중심,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갈 권력과 위세, 혹은 무한한 세계로부터 몰려드는 모든 것이 모이는 중심, 바로 그것이 왕의 자리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가시화한다. 그래서인지 데카르트는 스웨던의 왕궁으로 가서 여왕에게 ‘생각하는 나’에 대해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여왕의 기세를 못 이겨 얼마 못 가서 죽고 만다. 누가 진정한 중심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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