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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1부,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1부,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건방진방랑자 2022. 3. 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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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이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주제로 들어가 봅시다. 근대철학에 대해 얘기하려면 가장 먼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근대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야 할 범위를 철학으로 제한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철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혹은 철학적 근대란 무엇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지금 근대에 대한 어떤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근대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중세와 구분선을 그음으로써 정의되는 그런 시기입니다. 이 점에선 철학이나 역사나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근대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좋으나 싫으나 중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신약성서중 한 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

 

 

중세는 신이 창조한 세상이었고 신의 손 안에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신의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신학이 신의 말씀이라면, 말씀이 곧 신 자신이기도 하다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성직자가 신을 대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신의 말씀을 대리하던 성직자가 학문은 물론 대중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존재란 신의 창조물이며, 따라서 당연히 신이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초에 신의 말씀이 있었는데, 말씀이야말로 다름 아닌 진리였으며, 인식()이란 그 말씀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했습니다. 결국 진리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가 보장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 역시 당연히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의 말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중세는 봉건영주가 지배하는 시대였다는 말만큼이나 (신과)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성직자와 봉건영주가 지배계급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철학이나 과학은 어떠했는가? 중세의 철학은 신에 대해서 제기되는 의문, 신학에 대해서 제기되는 질문, 그것도 중세신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신의 작용과 신의 말씀을 이성을 통해 설득하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신학의 시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한다는 엄한 규칙과 규범이 있어도, 언제나 거기서 삐딱하게 벗어나고 저항하며 새로운 사고를 감행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에 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5세기경에 그려진 인체 해부도

제목이 잘못 붙은 게 분명하다고? 물론 인체 해부도에 위장도 창자도 보이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해부에 대한 근대적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사람의 신체를 별자리로 해부하여 보는 방법도 해부 방법의 한 가지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염소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등의 별자리가 인체를 둘러싼 대우주에 배열되어 있고, 이에 상응하여 게자리, 사자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등이 인체의 각 부분에 또한 배열되어 있다. 우주와 인체, 우주와 사물 간에 일정한 상응성이 있다고 보는 이런 태도는 서양의 중세뿐 아니라 동양의 중세에서도 쉽사리 발견되는 사유방식이다. 푸코는 이를 유사성에 의한 사유방식이라고 불렀다. 우주와 신체의 유사성을 대우주와 소우주라는 관념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가령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물개 거시기나 코뿔소의 뿔을 먹으면 정력이 좋아진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덕분에 애꿎은 코뿔소들이 거의 멸종 위기에 몰리고 있지만.

 

 

은폐된 공세

 

 

지오다르노 브루노(Giodarno Bruno, 1548~1600)는 일찌감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주란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로 가득찬, 그러나 끝도 중심도 없이 운동만을 지속하고 있는 영원한 전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신이란 일체의 만물을 지배하며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우주의 각 개체 속에 있는 것인 동시에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과 자연(우주)을 하나로 보는 이런 입장을 범신론(汎神論)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세적인 신의 개념,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교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견해였습니다. 이런 입장은 과학의 이름으로도 철학의 이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불경을 뜻하는 것이었지요. 달리 말하면 브루노는 신학의 시녀이기를 명시적으로 거부한 셈입니다.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해 있던 브루노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진지함, 세속적인 지식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고 맙니다. 신이, 교회가 제공하는 안정을 포기하고는 항상 쫓기는 방랑생활을 했는데, 유럽 전역을 돌며 강의 등을 하다가 어떤 베니스인의 초청으로 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브루노를 밀고함으로써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서게 되지요.

 

그러나 갈릴레이의 경우와는 달리 브루노는 종교재판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분노를 사서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는, 16002월 로마의 한 광장에 끌려가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한마디의 신음도 없이, 누군가가 던져준 십자가는 비웃음으로 내던지면서 그는 의연히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브루노는 너무나도 일찍이 중세가 허용할 수 있는 철학의 한계를 넘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중세철학의 한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세에는 신학이 곧 철학의 한계였고, 신학의 허용범위 안에서만 철학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신 안에서만 철학적 사고가 허용되었습니다.

 

과학 또한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철학이었습니다. 즉 자연현상을 나름의 원리에 따라 해석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피지카(Physica, 과학)와 메타피지카(Meta-physica, 형이상학, 철학)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와 달리, 중세의 과학은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의 운행법칙, 그 오묘하고 조화로운 세계의 운행법칙을 인식하는 학문으로 존재했습니다.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신학의 그늘 아래 있어야 했으며,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학의 전제를 거부하거나 뒤흔들면 안 되는, 그렇게 해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를 암흑의 세계라고도 합니다. 갈릴레이의 유명한 사례는 중세라는 세계 속에서 과학자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가 를 보여주는 모범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나 반역하는 인간, 가공할만한 공포와 위협 혹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감행하는 인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앞서 화형당했던 브루노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투덜거렸던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나아가서 중세가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의 지식이 성서와 교회의 벽에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사태를 막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사고의 발전과 지식의 증가에 따라 성서를 이탈하는 이 모험적이고 반역적인 사람들의 말은 점점 설득의 기초를 확장해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세적 사고의 중심을 향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은폐된 공격이 중세의 이면에서 지속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러한 공세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실 갈릴레이나 브루노는 이러한 은폐된 공세 중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공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러한 공세는 중세를 전복하는 효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브루노의 비극, 혹은 르네상스 사유의 한계

브루노는 우직하고 고지식한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니 무한한 우주에 하나의 중심이 있다고 대체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는 우주가 무한하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르네상스인은 누구도 무한이란 말과 중심을 갖는다는 말이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교황청은 우주가 무한한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브루노는 교회라는 중심이 확고하게 통치하는 공간에 들어선 순간, 자신의 견해와 더불어 우주를 태우는 불길 속에 던져져야 했다. 하지만 다음 세기 사람들처럼 소실점 하나로 무한한 공간이 통합될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브루노는 굴종도 화형도 모두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정말 우주는 하나의 중심을 갖는 것일까? 단 하나의 점으로 무한한 공간이 통일되는 게 정말 가능할까?

 

 

중세 너머의 철학

 

 

이러한 은폐된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철학으로 무장하면서 신학을 위한 반론을 펴게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신학의 반대자들, 정통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사상가들과의 각축전은 사실은 불가피하게 신학 안에서, 신학적인 껍데기를 입고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10세기 이후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로스켈리누스(Roscelinus)아벨라르(Abelard, 라틴어로는 아벨라르두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명론(nominalism)이라 불리는 견해를 제출합니다.

 

유명론은 일반적인 개념은 단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견해인데, 신학적 사고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사상적으론 실재론’(realism)이라는 반박이 나오게 되는데, 이러한 대립과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삐딱한 사람들에게 돌아간 결과는 파문이나 감금 등, 사상은 물론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문제가 되는 모든 주제들은 불로 막든 협박으로 막든 어쩔 수 없이 다루어지고 논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철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따라서 철학적 논쟁은 신학의 이름 아래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계속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가 단순히 정체된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은 일면적이고 잘못된 견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가 뒤에 자세히 보게 될 데카르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카르트가 처음으로 쓴 논문은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라는 소책자였는데, 발표 바로 직전에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소식을 듣고는 논문 출판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쓴 것이 방법서설이라는 논문인데, 여기에 기상학광학에 대한 논문을 부록으로 붙여 익명으로 출판합니다. 이 책은 당시 유명한 과학자들과의 논쟁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데카르트가 극히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훗날 데카르트의 책자들은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처분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시대는 데카르트가 정면에서 교회와 싸움을 벌이지 않는 한, 그의 책을 금서로 막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행운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기 결정적으로 중세의 틈새가 벌어진 시기 에 자신이 차지한 위치에서 자신이 지닌 탁월한 사고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근대철학의 비조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상이 재판당하고 화형당하는 희생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데카르트는 수많은 반역적 사고를 모아 중세를 슬며시뒤집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마녀와 마녀의 처형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가 그린 마녀집회를 향한 출발(Feast of the Witches)

 

서양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를 자처했다. 그래서 종종 중세는 암흑과 같은 시대로 묘사된다. 그러나 지금은 알 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적 사유의 음각화로 중세를 그린 허상에 불과하다. 그 음울한 그림의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마녀를 화형하는 장면일 것이다. 확실히 마녀재판은 종교재판의 전형적 논법을 만들었고, 마녀사냥은 그 암울한 세계를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마녀를 고발했던 것은 대개 교회가 아니라 가난, 질병, 전쟁으로 피폐한 삶에 속죄양이 필요했던 마을 공동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것은 중세가 아니라 이미 거기서 벗어났다고 간주되던, 그리고 근대과학의 꽃이 본격적으로 개화되기 시작한 17세기 전반기였다.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을 열었으며, 따라서 근대철학의 비조’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데카르트에 대해 말하려면, 근대철학을 연 1원리인 코기토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코기토(cogito)라는 말은 생각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gitare1인칭 형태입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cogitare는 영어에서 생각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들, 예컨대 cognition, recognize와 같은 단어들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철학에서 코기토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란 문장을 한 단어로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 뜻은 알다시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이 명제는 데카르트가 보기에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명젭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 명제는 라고 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본 점에서, ‘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적인 관점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코기토란 명제가 근대철학을 연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당히 당혹스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를 연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4~50)가 철학(형이상학)의 제1원리라고 생각했던 명제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명제가, 서로 대비되고 대립됨으로써만 구별되는 근대와 중세를 열었다고 하는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이 철학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이걸 이해하려면 잠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보아야 합니다.

 

중세철학을 연 사람,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입니다. 중세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늘이었고 근대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감히 말을 해도 될 정도로, 그의 사고는 중세철학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해서 믿음과 이성을 종합하려고 했으며, 이로써 중세철학 전체를 기초지운 사람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이란 한마디로 말해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가 있고, 실제 세계는 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그림자인 감각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상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자리에 을 놓고 플라톤의 철학을 따라 기독교의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이란 개념에 입각한 철학이 만들어집니다.

 

이로 인해 중세 전반기에는 플라톤적인 철학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중세 후기에 들어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는 새로이 얻어지는 지식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플라톤적인 철학으론 그걸 감당하기 어려워진 데 따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 도움을 받아 새로이 중세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가 체계화한 이 철학을 흔히 스콜라철학이라고 합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증가하는 지식을 신학의 틀 안으로 흡수하고 포섭하려는 것이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었습니다. 그에게 자연물의 인식이나 기타 유사한 지식은 그 자체로는 불필요한 것이었고, 오직 신학적인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성의 출발점은 계시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면 믿어라라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뒤에 스콜라철학에서는 믿기 위해선 이해하라는 명제로 바뀝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믿음을 위한 요구를 확립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의무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고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는 기독교의 지배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고, 따라서 회의론은 기독교적 신앙과 이념이 지배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매우 불편한 걸림돌이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감각에 주어진 것(‘감각소여’, the given)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저기 있는 화분의 이파리들을 누구는 파랗다고 하고, 누구는 초록이라 하며, 누구는 연두색이라고 하며, 누구는 푸르스름하다고 합니다. 즉 보는 사람이나 보는 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또한 이 말들의 경계 자체도 모호하여 뚜렷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은 확실한 것, 불변의 진리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추리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회의를 합니다. 곧 이성의 사고를 믿을 수 없는데, 이성의 사고규칙인 추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추리를 믿는 것은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며, 확실한 것은, 진리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을 물리칠 묘안을 생각해냅니다. 즉 회의론자들의 그 수많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기를 당한다고 할 때, 사기를 당하는 내가 없다면 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을 생각할 때, 회의론자 말대로 내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불명확할 수도 있지만, ‘생각하고 있는 나가 없다면 대체 생각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의심하는 가 없다면 의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론자들이 의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의심하는 사람’(회의론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만큼은 회의론자들조차 반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철학에서 1원리로 제시합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나,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는 가 여럿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이유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이 부분은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데, 데카르트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또한 확실한 지식이며 진리라고 합니다.

 

그는 이제 이 확실한 판단들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진리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습니다. 확실한 것이 단지 나라는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거라면, 즉 개인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거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확실한 것 코기토, 수학적 진리, 도덕적 지혜 등등 은 그것이 개인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바로 이것이 그가 문제를 설정하는 지반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문제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실한 판단, 즉 진리는 초인간적인 것,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근원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내면적 교사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요컨대 확실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는 거죠. 코기토처럼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코기토는 이처럼 신의 존재를 확증하고 증명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코기토는 중세철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이 확실한 기초에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 자신이 확실하지 못한 기초에 서 있다면 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자명한 기초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됩니다. 즉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내가 없다면 의심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를 게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론자를 반박해야 했지만,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그러나 유심히 보면 이미 출발하는 전제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통해서 신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확실한 출발점(코기토)을 그리스도 혹은 신이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면 데카르트에게는 그걸 누가 주었는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이, ‘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이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능력을 데카르트는 타고난 즉 본유관념’(innate idea)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본유관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이성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이성의 능력이 바로 자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입니다. 즉 이성은 자연을 비추어 주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똑같은 코기토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것이 신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확실한 출발점이었다면, 데카르트에게는 라는 존재의 연원이 바로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임을 확인해 주는 출발점이요, 그래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에게 그것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면, 후자에게 그것은 과학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 설정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마치 똑같은 사다리가 전봇대에 오르는 데 쓰이기도 하고, 불난 건물에서 빠져 나오는 데 쓰이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주체, 라는 것이 신이 없어도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라는 주체는 신이 없어도 내장되어 있는 본유관념 때문에 확실하게 사고할 수 있고,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고,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으로부터의 독립 때문에 데카르트의 사고는 중세에서 벗어나는 사고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럼으로써 철학은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따라서 주체라는 범주는 근대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주체없는 근대철학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했던 것이고, 이 주체는 어떠한 이론적 명제도 이것에 근거해야만 가능하게 되는 출발점이며, 그러한 명제를 구성하는 조직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기초며,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의 기초입니다. 즉 모든 지식과 사고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후의 근대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자아, 왕의 자리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그림 시녀들(Las Meninas)이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여기서도 소실점이 있는 자리, 무한한 공간을 통일시키는 그 자리에 거울을 갖다 놓았다. 그 거울에는 그림에는 없는 인물이 슬며시 비쳐져 있는데, 공주를 보러온 왕과 왕비가 그들이다. 바로 그 자리가 다름 아닌 왕의 자리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소실점은 우주를, 모든 대상을 보고 사유하는 주체의 자리다. 우주 전체를 대상 전체를 영유하고 장악할 수 있는 자리, 데카르트나 파스칼이 세계에 대한 모든 확실한 지식의 기초는 바로 라고 믿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자신이 말하는 생각하는 나, 그 자리에 서 있다는 확신 때문은 아니었을까? 주체, ‘사유하는 나’, 이것은 적어도 근대철학 안에서 왕의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요)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 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분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문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상과 분리되고,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졌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 살아있는 벌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젭니다. 만약 대상에 일치하는 지식, 즉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면, 이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아까 주체가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건 라는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막상 주체를 독립시켰더니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되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됩니까? 결국 그건 독립할 능력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신에게서 도망친 꼴이 되는 셈이지요. 따라서 데카르트로선, 그리고 이후의 근대철학으로선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 진리야말로 주체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이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범주를 독립시키자마자 진리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따라다니게 됩니다.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일치라는 뜻에서 진리라는 범주가 주체라는 범주와 쌍둥이로 등장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주체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입니다. 이 두 개의 범주는 근대철학 전체의 기초와 방향을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또한 이것은 근대철학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것에 매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체와 진리라는 범주로써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특징지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철학의 경계는 이런 식으로 그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리바이어던, 절대자의 다른 형상

헤르조그 폰 베리(Herzog von Berry)의 기도서 아주 풍요로운 시대(Les très riches heures)에 실려 있는 그림

 

세상은 철학을 만들고, 그 철학은 또 다시 세상을 만든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감명을 받았던 홉스는 그의 철학을 따라 사유하면서 사회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왜냐하면 인간 개개인이 모두 주체고 그 각각의 욕망이 평등하다면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텐데, 그럼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통합하는 절대적 중심의 자리, 모든 들을 통합하는 절대적 나의 자리에 바로 왕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 왕의 형상은 바로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각각의 내가 왕이라면, 이제 그 들은 왕의 입에 죽고 사는 존재가 된다. 왕이 내가 된 것이다. 그것은 벨라스케스가 찾아준 왕의 자리에 내가 들어서기 위해 치러야 할 입장료인 셈이다.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앞서 우리는 주체를 독립시키자마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데카르트에게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런데, 우선 이 문제가 그의 철학에선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심각했고, 다음으론 그 문제의 해결이 그의 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 극히 중요했다는 점에서 심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연장’(延長)사유’(思惟)가 그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못 보신 분은 별로 없겠지요? 거기 보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나옵니다. 이름은 T-1000이라고 하던가요? 미래의 세계에서 기계들이 보낸 터미네이터지요. 이 친구의 모습은 아시다시피 자유자재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이 친구가 주인공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의 목숨을 노리는 터미네이터인 변함없는 사실이죠. 이처럼 아무리 모습이 바뀌고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변함없는 불변적인 본질(특징)이 바로 실체입니다. 이는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영원한 특징을 뜻합니다.

 

한편 데카르트는 좀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실체를 찾으려고 합니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란 무엇인가? 그는 이것을 연장사유라고 합니다. 연장은 물질ㆍ물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데, 어떤 공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물체의 실체는 연장이다는 말은 모든 물체는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유는 한마디로 생각하는 성질입니다. 이건 공간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장이란 성질과 구분됩니다. 정신의 실체는 바로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철학은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유와 연장, 다시 말해 정신과 육체라는 두 실체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에게는 생각(사유)이 존재(연장)보다 우선합니다. 따라서 주체란 생각하는 나, 곧 정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처럼 정신이 육체나 물질보다 우선한다는 뜻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아까 말했던 문제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정신과 육체가 이처럼 별개의 실체라면, 따라서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이 완전히 별개라면 대체 이 양자는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결코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육체라는 대상은 정신이란 주체에 의해 규정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육체(연장)란 실체는 정신에 의존하게 되어, 실체는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라는(즉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정의에 어긋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따라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즉 주체와 대상, 정신과 육체가 일치하는가 아닌가는 데카르트로선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
연장(延長) 사유(思惟)
공간을 차지함 공간을 차지하지 않음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 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물이나 감각경험이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영혼(이성)에 우위를 두는 관념론의 입장을 채택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이 완전한 이성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신을 끌어들입니다. 완전한 개념은 불완전한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뭐가 다른가?”하고 성급하게 비난하진 맙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신을 증명하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데카르트는 신이 준 것은 바로 완전한 것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임을 강조합니다. 누가 준 것이든 간에 인간이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타고난다는 게 그에겐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는 거꾸로 이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와 신앙을 위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것이고요.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 중심축은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고와 서로 다른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성의 완전성 신이 부여 (近世)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존재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 (中世)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 중세적인 세계관과 근대적인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 당시 신학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은 중세의 몰락이 거의 분명해진 그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됩니다. 헤겔 역시 신학적 사고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세웠고, 종교비판을 감행했던 포이어바흐는 대학에서 쫓겨나 시골에서 은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갖고 있던 신학적 요소는 차라리 시대적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인데, 분명한 것은 그런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세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의 공존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네그리는 데카르트 철학을 절대왕정에 비교합니다.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절대왕정은 봉건제 말기 그리고 근세 초기에 봉건적인 귀족과 근대적인 부르주아계급의 힘의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 균형국가입니다. 따라서 절대왕정에서는 반대되는 두 계급, 즉 중세적 계급과 근대적 계급이 타협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절대왕정과 비슷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이성 능력의 완전성을 기초로 해서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개념들, 수학에서의 원이란 개념은 우리가 지각(경험)하는 실제 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에게 이 완전한 원의 개념은 실재하는 수많은 불완전한 원보다 훨씬 더 진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수학이야말로 확실하고 완전한 지식, 즉 진리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바로크적 절대주의, 절대적 중심

독일의 왕도(王都)인 칼스루헤(Karlsruhe)는 베르사이유를 모델로 했던 바로크 도시의 한 극한을 보여준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많은 길들이 한 점에 모인다. 무한한 공간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점, 그리고 그 하나의 점에 왕궁이 자리잡고 있다. 무한한 세계의 중심,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갈 권력과 위세, 혹은 무한한 세계로부터 몰려드는 모든 것이 모이는 중심, 바로 그것이 왕의 자리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가시화한다. 그래서인지 데카르트는 스웨던의 왕궁으로 가서 여왕에게 생각하는 나에 대해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여왕의 기세를 못 이겨 얼마 못 가서 죽고 만다. 누가 진정한 중심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처럼 보인다.

 

 

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이성이란 주체의 완전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상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는 긍정적으로 답합니다. 그 근거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근대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이었던 갈릴레이가 철학적으로 갖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려 보았다는 유명한 실험은 믿을 수 없는 신화라고 합니다. 갈릴레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실험보다는 자연과학(당시로선 물리학)을 수학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론 극히 불확실한 것이어서, 그대로 둔다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법칙으로 정식화되어야 했고, 따라서 수학적인 형태로 요약될 수 있어야 비로소 참된 지식’(진리)이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이란 수학적, 기하학적 기호들로 가득찬 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근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뉴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사실 보편중력의 법칙이 더 좋은 번역인데)을 서술한 그 유명한 책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였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경험적 지식의 불명료함을 씻고 분명하고 뚜렷한(clare et distincte) 판단 이 말을 흔히 명석판명한 판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명석하다’(똑똑하다), ‘판명되다’(분명히 드러나다)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는 일본어를 그대로 음독 번역해서 그런 것입니다 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자신도 수학적 작업에 무척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기하학조차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것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기하학은 사실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처럼 직관에 의존하고 있던 기하학을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대수학(代數學)으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그는 x축과 y축 등으로 이루어지는 데카르트 평면이란 좌표평면 상으로 기하학을 옮겨 놓습니다. 그래서 그냥은 삼각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좌표평면에 옮기면 특정한 삼각형은 세 변의 길이가 어떻고 꼭지점이 어디 있고 하는 식으로 대수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도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수학적인 면에서의 작업이었고, 철학적인 면에서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을 수학화하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갈릴레이 역시 자연과학에 수학을 도입했지만, 그것이 어째서 옳은지, 왜 진리인지는 증명하지 않았습니다(그는 과학자였으니까요). 한편 데카르트는 갈릴레이의 주장이 어째서 옳은 것인지를 증명하는 게 바로 (자신의)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에게 확실하고 완전한 개념의 모델은 수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지식을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유관념과 일치하는 지식, 즉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유관념이 진리란 개념은 이래서 또 다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철학이 과학의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과학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 전반을 사로잡았던 일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젠 오직 참된 지식만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직 과학적 지식만이 참된 지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에는 어떤 지식도 자신이 과학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말해 과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를 특징짓는 이 과학주의라는 사고방식은 이미 데카르트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뒤안 혹은 정치적 포르노그라피

절대주의의 시대, 그것은 마치 칼스루헤의 길들처럼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왕으로 집중된 시대였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왕의 모든 행동은, 심지어 똥 누는 것마저도 귀족들의 시선에 제공되는 스펙터클(구경거리)이었다. 왕의 행동은 식탁에서 포크를 쓰고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등등의 모든 사교 매너의 살아있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 절대주의의 중심에서는 또한 정반대의 삶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사유하는 이성의 뒤안에 어두운 정념이 보이지 않는 불꽃을 태우고 있듯이, 사교의 장인 파티는 곧바로 연애와 섹스로 이어졌고, 결혼과 섹스가 별개였던 시대였기에 그 연애와 섹스는 저 규칙적인 시선을 가로지르며 혼란과 음탕으로 치달았다. 포르노그라피들이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정치ㆍ철학 문헌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위의 그림은 동 부그르 이야기(Histore de dom B)의 삽화로 섹스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포르노그라피 중 하나였던 동 부그르 이야기는 진정한 악덕은 궁정인들이나 성직자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레즈비언, 남색, 근친상간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었다. 그 책의 도판을 만든 사람은 궁정인이나 성직자, 수녀들의 난교를 그렸다는 이유로 책을 만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셋째, 정신과 육체의 일치(통일) 문제, 혹은 윤리학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의 육체, 감정, 정념(passion), 이러한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자제할 줄도 모르고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안정되게 만들거나 억제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잘 되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남한테 맞았을 때, 그리하여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서 싸우려는 감정이 불끈 솟아날 때, 이성은 어디 있는지 꼬랑지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상태가 되지요. 즉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라는 문제로 제기되는 겁니다. 이걸 흔히 가치론’ ‘윤리학’ ‘도덕론등의 이름으로 부르지요.

 

데카르트가 최고의 학문으로 도덕학을 제기하는 맥락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학문을 커다란 나무에 비교합니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 세계는 이렇다고 밝혀주는 핵심적인 원리 인데, 이 형이상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부터 나오는 철학적 원리들입니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의 뿌리 위에 줄기가 나오는데, 그 줄기는 물리학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에서 뻗어나오는 가지들에서 의학, 역학, 도덕학 이런 열매들이 맺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덕학이 이러한 것들 중 최고의 열매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작용을 미치고, 육체에서 파생하는 감정과 정념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려면 감정과 정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념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에게서 독립할 자격을 얻으려면 신이나 성직자가 없어도 인간(주체)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게도 인간의 육체나 감정은 제멋대로고 이성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제멋대로라면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떻게 육체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다루는 도덕론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도덕론이 서있는 기초입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하면 감정과 정념, 욕망과 육체적 활동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이성이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정신)이나 육체나 각자가 독립적인 실체임은 아까 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 정신은 대체 육체나 육체적 욕망, 정념에 대해 어떻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요컨대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이성에 따라) 일치될 수 있을까요?

 

이제 그에게는 정신과 육체가 만날, 그래서 육체가 정신의 말을 듣고 통제에 따라줄 그러한 장소가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 속에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들고, 동시에 육체로 하여금 사물을 향하게 하거나 피하게 만드는 어떤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데카르트송과선’(松果腺)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만나거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양자가 일치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송과선은 뇌의 한복판에 있다고 하는데, 어떠한 해부학자도 아직 이것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문제가 다시 남는데, 그것은 이 송과선은 도대체 어떠한 실체인가 하는 것입니다. “송과선은 사유하는 실체인가, 연장을 가진 실체인가? 송과선은 정신인가 아니면 육체인가?”하는 문제가.

 

아무튼 데카르트는 송과선까지 발명하면서 이 정념론에 기초해 잠정적인도덕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우리의 욕망에는 도달할 수 있는 것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욕망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합니다. 결국 가급적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상태를 위해서 제멋대로인 육체를 통제하고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이 그의 도덕론의 요체였던 것이고, 이는 사실 이성 혹은 영혼에 의해 세계가 파악되고 움직여질 수 있다는 그의 본래의 이상에 맞는 도덕론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라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사드 이전의 사디즘?

사드는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서 하나의 문턱을 표시한다. 프랑스 혁명은 이제 포르노그라피로 하여금 정치적 성격을 가질 조건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1790년대 말 이후로 포르노그라피의 출간은 급속히 감소한다. 사드는 절대왕정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부도덕과 욕망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도덕 자체를 비난하고 도덕 너머에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지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그는 오히려 거기서 정해진 틀, 정해진 선을 넘쳐나는 욕망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먼 극한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성욕은 이제 성기 아닌 신체 자체를 겨냥하고, 신체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는 욕망으로 변환된다. 그것은 욕망으로 하여금 잔혹의 길로 가게 한다. 그리고 잔혹을 통해 욕망은 사유나 관념, 도덕의 모든 틀을 부수고 나간다. 그 잔혹과 파괴의 마지막 극한은 축음이다. 거기서 쾌락을 위해 쾌락의 대상인 육체를 제거하는 역설이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는 사드의 소설을 영화화함으로써, 파시즘의 광기와 사드적인 잔혹을, 죽음을 하나로 연결한다.

한편 위의 두 그림은 나중에 성인(聖人)이 된 두 여성에 대한 고문 장면을 그린 것인데, 위쪽이 성 바바라의 고문(St. Barbara Altar: Detail, the fire torture)이고, 아래쪽이 성 마가렛의 고문(St. Margaret, Maniera di Turino Vanni)이다. 손과 몸을 묶고 옷을 벗긴 신체에 회초리나 채찍, 불 등의 고문을 가하는 이런 장면은 사드의 작품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디스트라면 충분히 흥분할 수도 있을 법한 장면이다. 사드 이전의 사디즘이라고나 할까?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지금까지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음 또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컨대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조금 우회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 얼굴을 모르는 분 있습니까? 예상대로, 아무도 없군요. 그럼 다시 하나 질문을 하지요. 여러분들 중에 혹시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역시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아무도 자기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모두 다 자기 얼굴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마 여러분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거울에서 본 게 자기 얼굴인지 어떻게 알지요? 그게 자기 얼굴이라고 판단하려면, 이미 자기 얼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자기 얼굴이 어떤지 미리 알고 있지 못합니다. 만약 거울을 처음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거울에 대고 말을 걸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자기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나 자신은 거울에 비치는 대상입니다. 거울은 그 대상을 비추는 주체지요. 거울에 비치는 대상()과 그걸 비추는 거울(주체)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나와 거울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옆에서 보고는, “거울에 비친 모습하고 네 얼굴하고 똑같다고 말이라도 해준다면 모를까.

 

결국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란 두 개의 항()만으로는 인식한 게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는 주체가 확인하고 보증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이 확인하고 보증해 줄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란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옵니다. 굴뚝 청소부가 두명 있었습니다. 그 두 명이 각각 굴뚝 청소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굴뚝 하나는 깨끗했고 다른 하나는 더러웠기 때문인지, 한 명의 얼굴은 까맣고 다른 한 명의 얼굴은 하얗습니다. , 그러면 누가 얼굴을 씻으러 갈까요? 다 아시겠지만, 더럽고 검은 얼굴의 굴뚝 청소부가 아니라 깨끗하고 흰 얼굴의 굴뚝 청소부가 얼굴을 씻으러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상대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난점이 뭔지 좀더 분명해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인식주체 대상)만으로는 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과 실제 내 얼굴의 상태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더럽다는 판단을 한 게 사실과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똑같은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딜레마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고, 양자가 일치하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할 수도 없고 보증할 수도 없다는 난점을 가리킵니다. 그게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주는 제3예를 들면 신 가 없다면 근대철학으로선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근대철학의 원죄인 셈입니다.

 

이 딜레마는 근대철학에 고유하게 나타납니다. 중세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은 창조론이 설명해 줍니다. 또 무엇이 진리인가? 어떤 게 진리인가? 그것은 계시론이 보증해 줍니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성서 혹은 계시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고, 이를 전하는 교회와 성직자의 말에 따르면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었지요.

 

 

 

 

근대철학의 딜레마

 

 

그런데 데카르트주체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그렇다면 독립된 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됩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능력이 어디까지 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치론혹은 윤리학’(‘도덕론’)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는 근대철학의 세 가지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으로부터 독립해도 좋은 것인지, 그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인지를 입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체가 신에게서 독립하려면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신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대개 인식론적인 형태로 제기되며, 인식론이 가장 발전하게 됩니다.

 

신에게서 독립하려는 이 근대철학자들에겐 등대불 같은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급진전되고 있었던 과학혁명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의 얘기를 통해 세상은 이렇다성경의 말씀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신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신학 없는 철학, 신에게서 벗어난 주체(인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과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근대철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과학주의가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모두 스스로 과학자가 되려고 했으며, 모든 지식은 과학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즉 근대철학은 과학이란 위성을 가지고 주체/진리란 범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주의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해 주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점이 진리라면, 어떤 지식이 과학인지 아닌지는 과학 자신이 확인하고 보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이란 지식 역시 주체/진리라는 범주가 야기한 근대철학의 딜레마에 빠져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진리를 판단해 줄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제3자가 없다면 양자의 일치(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제3자 역시 진리의 보증자가 되려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결국 다시 신을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보게 될 버클리나 헤겔도 다시 일종의 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이라고 하는 문제설정, 즉 주체와 대상을 나누고 양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철학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해결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철학의 딜레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근대철학이 부닥칠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유아론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자리에는 100명 정도의 사람이 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다수의 주체들이 모여서 동일한 것에 대해 상이한 판단을 했을 때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딜레마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극단적으로는 유아론,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진리는 주관적이다라는 견해로 나가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주체를 신에게서 떼어내었을 때와의 생각과는 달라지는 것이죠. 이는 사실 대상과 일치하는 진리를 하나로 확정하지 못한다는 딜레마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 딜레마의 이면인 셈입니다.

 

이후 근대철학은 이 문제(일치의 문제)를 풀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줍니다.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바로 이 딜레마로 인해 매우 다양한 인간의 사고영역이 개척됩니다. 근대철학은 이 딜레마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기차였던 셈입니다.

 

 

거울과 반성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비너스(Venus). 벨라스케스는 미인의 등만을 보여준다. 정말 미인 맞나? 미인 앞에는 거울이 있고, 그 거울 안에 희미하게 미인의 얼굴이 보인다. 비너스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게 자기 얼굴이란 걸 알고 있을까? 나르키소스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물에 비친 제 얼굴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바보짓? 아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럴 줄 알았다.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 얼굴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구나 내 얼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걸 말이다. 벨라스케스는 나르키소스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거울 옆에다 천사를 한 명 앉혀 두었다. 아마도 그 천사가 말하겠지. “이게 네 얼굴이야.” 비너스의 얼굴도 볼 수 있고, 거울에 비친 것도 볼 수 있는 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자리에 천사가 아니라 악마를 앉혀 두었다면? 그가 말하는 진실을 믿어야 할까? 결국 거울을 보는 우리에겐 항상 천사나 이 필요하다. 진실을 보증해 줄 존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인식하는 라는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게 진리인지 대체 누가 확인해 줄 것인가? 그래서 신이 죽었다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신이 없으면 불안해 하며, 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게 아닐까?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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