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니다.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중요한 전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두 철학자 간의 상호관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단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중요한 전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을 보면서 시작하기로 합시다. 이를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봅시다.
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데카르트는 신에게서 사고와 행동의 중심인 주체를 떼어내는데, 그로 말미암아 주체는 불가피하게 대상세계와도 분리되게 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주체’라고 할 때, 그것은 적극적ㆍ능동적인 것이고, 자연의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사고하는 힘이 있으며, 그걸 이용해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뜻합니다. 반면 ‘대상’인 자연세계는 조용히 주체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게 됩니다.
이제 신을 대신해서 ‘주체’라는 이름표를 단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자연은 이 주체가 정복하고 지배하며 이용해야 할 세계가 됩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여기에 필요한 정보를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반자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는 환경주의자나 생태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데카르트야말로 자연을 이토록 파괴한 ‘원흉’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자신의 경계를 정하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가 보기에 자연은 단지 수동적인, 그래서 지배되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데카르트적인 관점에 대비해서 스피노자는 자연 자체가 수동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능동적이고 활기있는 것임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스피노자가 설정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둘째로는 주체와 분리된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서 ‘과학주의’가 등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문제는 스피노자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개념이나 지식은 실제 대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양자가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한마디로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양자가 일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양자는 단일한 실체의 속성이어서 애초부터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또한 어떤 판단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알려면 진리를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는 역설까지 지적합니다.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것이지요.
셋째로 윤리학에 관한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나 스피노자에게나 ‘윤리학’이란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단지 도덕에 대한 사고만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지요. 알다시피 데카르트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데 ― 육체가 그것이지요 ― 이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만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데카르트로서는 인간의 이러한 성격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그의 도덕론의 원칙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정확하게 계몽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 역시 스피노자로선 경계선을 긋는 또 하나의 지점입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 정념 등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임을 분명히 합니다(이러한 ‘자연주의’는 앞서 말했던 존재론에서부터 일관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계몽주의적인 윤리학과는 애초부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르네상스기 독일의 대표적 화가 뒤러(Albrecht Dürer)의 「자화상」이다. 인간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기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그림에 서명하는 것조차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정면에서 그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만의 징표라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뒤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예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교묘하게 겹쳐놓은 듯이 그렸다. 흔한 사이비 종교 교주들처럼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착각했던 것일까?(실제로 그는 정확히 12명의 제자를 데리고 있었다.) 아니면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후자가 더 정확할 것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또한 인간의 얼굴에 성모의 얼굴을 겹쳐 그려 놓지 않았던가!
이처럼 사람의 모습을 이상적인 형상으로 그리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신성한 존재로서 ‘인간’ 발견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럴 것이다. 휴머니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니. 그러나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에는, 인간 아닌 것에 가해진 특별한 억압이 수반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선 안 된다. 인간중심주의에 따르면, 저 희고 숭고한 얼굴과 달리 ‘검고 흉한’ 얼굴을 가진 ‘것’들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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