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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1장 요한복음과 로고스기독론 -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요한의 해석틀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1장 요한복음과 로고스기독론 -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요한의 해석틀

건방진방랑자 2022. 3. 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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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요한의 해석틀

 

 

요한복음의 해석의 지평에는 영지주의라는 우주론이 깔려있다. 이런 말을 하면 또다시 영지주의 = 이단사상이라는 편견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해를 근원적으로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요한복음 해설서를 보면 모두 그 모두(冒頭)에 꼭 한마디를 한다: ‘요한복음은 반영지주의적 복음서이다.’(이영헌 역주, 요한복음서, 29~31. 참고. 물론 이 책은 훌륭한 요한복음의 연구ㆍ주석서이다). 이 말은 칼 맑스는 헤겔의 유심론체계에 반대하여 유물론체계를 수립하였다라는 말과 대동소이하다. 칼 맑스의 유물론과 헤겔의 유심론은 물론 상반될지 모르지만 그 양자에는 공통된 변증법 구조와 공통된 발전사관구조가 들어있다. 공부를 진지하게 많이 하신 신학자분들의 소신을 내가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이 반영지주의적이라는 것을 100% 수용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발전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영지주의라는 개념이 그들이 반영지주의적이라고 규정하는 모든 속성조차도 흡수하는 사상체계라고 할 때는 반영지주의적이라는 규정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는 말이다. 영지주의라는 개념이 기껏해야 가현설(Docetism)과 일치되는, 빛과 어둠, 하나님과 세계, 영과 육의 타협할 수 없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단순한 도식에 머물러 있기에는 영지주의 문헌의 범위는 너무도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말씀의 성육신이라는 그리스도론 하나의 논리로 반영지주의를 운운키는 어렵다.

 

발전된 21세기 신학의 성과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나이브한 언급일 뿐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철저히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어휘로써 새로운 복음의 해석의 지평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독교는 험난한 23세기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실 기독교를 이방세계에 전파한 사람이 바울이요, 바울이야말로 기독교를 헬라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헬라세계에서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은 요한의 해석의 틀이었다. 세기가 전환하는 AD 100년경 요한이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로칼한 동방종교로 사그러질 수도 있었다. 요한의 복음서 하나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몇 천 몇만 배의 사유의 여로를 열었던 것이다. 자아! 그렇다면 과연 요한 해석의 지평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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