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성기의 기독교: 배타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기독교는 형성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타’(exclusiveness)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를 배타하기에는 너무도 문명의 두께와 질감이 다양했고, 창조적이었고, 혼돈스러웠고, 절대적 권위를 갖는 리더십이나 기준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물줄기가 뒤엉키어 하나의 카오스를 이루는 콥틱 크리스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일컬어 보통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부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교회사의 일반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혼돈스럽게 그리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영지주의는 영지(그노시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매우 협애하게 쓰이는 신비주의적 이단사상으로서 초기기독교에서부터, 신약성서의 세계에서부터 배척되었던 악종(惡種) 사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야말로 교회 내에서 분란만 일으키는 소수분열주의자들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통틀어서 그렇게 명료하게 개념화된 ‘영지’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도 없고, ‘영지주의자’(gnostic)라는 말도 없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개념은 그냥 ‘지식’(gnosis)이다. 이 지식은 기독교신앙과 관련된 바른 앎이다. 동사형인 ‘기노스코’(ginosko), ‘에피기노스코’(epiginosko)는 모두 안다(to know), 이해하다(to understand) , 인지하다(to perceive)의 일상적 뜻이다. 현상계에 대한 앎, 보고듣고 경험하는 것, 눈으로 검증되는 것, 객관적 관찰에 의한 지식을 포괄하는 앎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우주의 궁극적 법칙에 대한 이성적 이해이다. 희랍철학에서는 경험적인 차원으로부터 시작하여 경험을 넘어서는 불변의 실재(reality)에 관한 앎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말이었다. 현재 우리가 ‘과학’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 ‘사이언스’(라틴어, 스키엔티아, scientia)도 ‘그노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킹 제임스 바이블은 그노시스를 어떤 곳에서는 사이언스(science)로 번역하고 있다.(Ⅰ Timothy 6:20).
바울의 서한문에 나오는 ‘그노시스’는 결코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등에 나오고 있는 담론은 맥락에 따라 해석을 요하는 진지한 용법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특별한 앎이며, 성령에 의해 행함이 요구되는 앎이다. 이러한 얇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과의 신비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명명백백하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결합됨으로써 성립하는 앎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얇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앎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갈 4:9).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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