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 - 타농설(惰農說)
게으른 농부와 학자들에게
타농설(惰農說)
성현(成俔)
歲庚寅, 大旱, 自正月不雨, 至于秋七月, 春不得犂, 夏不得鋤, 草之在野者無不黃, 禾之在畝者無不萎.
其有勤者則曰: “耘之亦死也, 不耘亦死也, 與其安坐而待焉, 孰若殫力而求焉, 萬一得雨, 豈盡無益? 故田已柝而耨不止, 苗已槁而芟不休, 終歲勤動, 要死而後已也.”
其有怠者則曰: “耘之亦死也, 不耘亦死也, 與其奔走而勞焉, 孰若無事而息焉, 萬一無雨, 是皆無益. 故見田夫而笑不已, 見饁婦而譏不止, 終歲退坐, 待天命而已也.”
余嘗秋穫, 至坡山之野, 其田半荒半理, 半疏半密, 或有疆項而仰者, 或有醉噎而垂者. 問諸父老則彼荒而疏, 疆項而仰者, 以爲無益而不耘者也; 理而密, 醉噎而垂者, 盡心盡力以求之者也. 偸一時之安, 而受終年之飢; 忍一時之苦, 而受終年之飽.
噫! 勤而得, 逸而失者, 非獨農也, 今世之學詩書媒仕進者, 何以異於是? 士方少時, 有志於學, 無晝無夜, 孶孶矻矻, 六經百史, 無不探也; 文章詞華, 無不習也, 懷才蘊奇, 進而戰藝於場, 一不得志則歉, 再不得志則惛, 三不得志則缺然自失曰: “功名有分, 非學所能致也; 富貴有命, 非學所能致也.” 舍其所學, 並棄前績. 或半塗而廢, 或至門而復, 爲山九仞之高, 不盡一簣之力, 得無與惰而不耘苗者類也.
學問之勞, 非若三農之苦, 學問之功, 奚啻三農之利? 農而養口腹則其利少, 學以取聲名則其利大, 小者猶不可以不勤, 而況大而不勤乎? 勞心之君子, 反不知勞力之小人, 故作斯說以喩之. 『虛白堂集』 卷之十二 男世昌編輯
해석
歲庚寅, 大旱, 自正月不雨, 至于秋七月, 春不得犂, 夏不得鋤, 草之在野者無不黃, 禾之在畝者無不萎.
경인(1470)년에 매우 가물어 정월부터 내리지 않은 비가 가을 7월에 이르렀으니 봄엔 밭갈 수 없었고 여름엔 호미질 할 수 없어서 들판에 있는 풀은 누렇지 않음이 없었고 이랑에 있는 벼는 마르지 않음이 없었다.
其有勤者則曰: “耘之亦死也, 不耘亦死也, 與其安坐而待焉, 孰若殫力而求焉, 萬一得雨, 豈盡無益? 故田已柝而耨不止, 苗已槁而芟不休, 終歲勤動, 要死而後已也.”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김매도 또한 죽고 김매지 않아도 또한 죽지만 편안히 앉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힘을 다해 구하리니 만일 비가 내린다면 어찌 죄다 무익하겠으리오? 그러므로 밭에 이미 싹튼 것은 김매기를 그치지 말고 묘가 이미 마른 것은 베어버려 쉬지 않아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움직여 죽은 후에야 그치길 바라오.”라고 말했다.
其有怠者則曰: “耘之亦死也, 不耘亦死也, 與其奔走而勞焉, 孰若無事而息焉, 萬一無雨, 是皆無益. 故見田夫而笑不已, 見饁婦而譏不止, 終歲退坐, 待天命而已也.”
어떤 게으른 사람은 “김매도 또한 죽고 김매지 않아도 또한 죽으니 분주하게 애쓰기보다 차라리 아무 일 없이 쉬려하니 만일 비 내리지 않으면 이것은 모두 무익하네. 그러므로 농부를 보고 비웃길 그치지 않고 들밥 내는 아낙을 보고 비난하길 그치지 않아 해가 마치도록 물러나 앉아 천명을 기다릴 뿐이오.”라고 말했다.
余嘗秋穫, 至坡山之野, 其田半荒半理, 半疏半密, 或有疆項而仰者, 或有醉噎而垂者.
나는 언젠가 추수할 적에 언덕과 산의 들판에 이르렀는데 밭의 절반은 황폐해졌고 절반은 다스려졌으며 절반은 엉성하고 절반은 촘촘했으며 어떤 건 뻣뻣한 목처럼 뻗어 있고 어떤 것은 취해 목멘 듯 수그리고 있었다.
問諸父老則彼荒而疏, 疆項而仰者, 以爲無益而不耘者也; 理而密, 醉噎而垂者, 盡心盡力以求之者也.
노인에게 물으니 “저 황폐하고 엉성하며 뻣뻣한 목처럼 뻗어 있는 것은 무익하다 여겨 김매지 않은 이들의 것이고 가꿔져 촘촘하며 취해 목멘 것처럼 수그리고 있는 것은 마음과 힘을 다해 벼를 구한 이들의 것이네.”라고 했다.
偸一時之安, 而受終年之飢; 忍一時之苦, 而受終年之飽.
한 때의 편안함을 훔쳐 해가 마치도록 굶주리게 됐고 한 때의 애씀을 참아 해가 마치도록 배부르게 됐다.
噫! 勤而得, 逸而失者, 非獨農也, 今世之學詩書媒仕進者, 何以異於是?
아! 부지런하기에 얻고 편안하기에 잃는 것은 농부뿐만이 아니니 지금 세상에 시와 글을 배워 벼슬하길 도모하는[媒=謀] 이들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士方少時, 有志於學, 無晝無夜, 孶孶矻矻, 六經百史, 無不探也; 文章詞華, 無不習也,
선비가 어렸을 적엔 배움에 뜻을 주고 낮밤 없이 힘쓰고 부지런히 해서 육경(六經)과 제자백가와 역사서는 탐구하지 않음이 없고 문장과 시문과 수사를 읽히지 않음이 없다.
懷才蘊奇, 進而戰藝於場, 一不得志則歉, 再不得志則惛,
재주를 품고 훌륭한 재능을 품고 진출하여 재주를 과장(科場)에서 다투는데 한 번 뜻을 얻지 못하면 한스러워하고 두 번 뜻을 얻지 못하면 번민하며
三不得志則缺然自失曰: “功名有分, 非學所能致也; 富貴有命, 非學所能致也.” 舍其所學, 並棄前績.
세 번 뜻을 얻지 못하면 서운한 듯 “공명엔 분수가 있어 배워 이를 수 있는 게 아니고 부귀엔 운명이 있어 배워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망연자실해하며 배우던 걸 버리고 아울러 앞의 실적도 버린다.
或半塗而廢, 或至門而復, 爲山九仞之高, 不盡一簣之力, 得無與惰而不耘苗者類也.
혹자는 중도에 그만두고 혹자는 문에 이르렀지만 자빠지니[復=覆] 아홉 길이의 높은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힘을 다하지 않으니 게을러 밭을 김매지 않은 부류가 아니겠는가?
學問之勞, 非若三農之苦, 學問之功, 奚啻三農之利?
학문의 애씀은 삼농(三農)【삼농(三農): 평지(平地)와 언덕과 습지(濕地)의 농사를 말한다. 『주례(周禮)』 천관총재(天官冢宰) 「태재(太宰)」에 “삼농에서 아홉 가지 곡식을 생산한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삼농은 평지와 산과 택이다.”라고 해설하였다. 또한 봄, 여름, 가을에 철에 맞게 농사짓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후에는 농민 또는 농사를 범칭하는 말로 쓰인다.】의 수고만 못하지만 학문의 공은 어찌 삼농의 이로움뿐이겠는가?
農而養口腹則其利少, 學以取聲名則其利大, 小者猶不可以不勤, 而況大而不勤乎?
농사는 입과 배를 배불리는 것으로 이익은 적지만 학문은 명성을 취하는 것으로 이익이 크니 작은 것도 오히려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큰 것을 부지런히 안 하겠는가?
勞心之君子, 反不知勞力之小人, 故作斯說以喩之. 『虛白堂集』 卷之十二 男世昌編輯
마음을 쓰는 군자가 도리어 힘을 쓰는 소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을 지어 그것을 비유한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