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1. 중국에는 ‘사서삼경’이란 말이 없다
“고전을 모르는 자는 학문에 들어갈 수 없다. 고전은 경(經)이다. 경(經)을 이해하는 첫 관문은 경(經)의 성립과정을 아는 것이다. 경(經)의 역사를 우리는 경학사(經學史)라고 한다. 경학사(經學史)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경이라는 텍스트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아닌, 『오경(五經)』이나 『십삼경(十三經)』으로 불러야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중국고전에 대해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이란 말이며, 여러분들도 사서삼경이란 말을 제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서삼경을 중국의 대표적인 고전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사서삼경이란 말이 없습니다. 굉장히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에 가서 중국학생한테 ‘쓰수싼징(四書三經)’ 그러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문화가 이렇게 달라요. 내가 처음 중국에 유학 가서 제일 놀란 게 그것이었습니다. 따로 떼어서 ‘쓰수(四書)’라고 하면 물론 알아듣지만 ‘쓰수싼징’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사서와 삼경을 같이 붙여서 말하는 경우도 없고, 삼경이란 말은 거의 중국 사람들이 안 쓰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조시대 때 과거제도 때문에 『삼경언해(三經諺解)』하는 따위 책들이 성립하면서 생겨난 말 같은 데 여러분들이 중국역사에서 문헌적으로 삼경(三經)이란 말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사서삼경이라고 말할 때 삼경은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역경(易經)』을 말합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것을 묶어서 삼경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그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은 오경(五經)이란 말입니다.
한대(漢代)에 경서(經書)를 확립하고 박사제도를 두었을 때에도 ‘삼경박사(三經博士)’라는 말은 없고 ‘오경박사(五經博士)’라고 했습니다. 벌써 한대(漢代)로부터 확립된 것은 오경(五經)입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또 많이 쓰는 말은 ‘쓰싼징(十三經)’이란 말입니다. 13경이란 말은 공자시대나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태종 때 생긴 말입니다. 경학이란 것은 간단한 게 아닙니다. 당태종이 중국문헌 중에서 유교 경전들(Confucian Classics)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할 때 비로소 13경이란 말이 확립되었거든요. 그리고 이때부터 현재 여러분들이 구해볼 수 있는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라는 거대한 주소본이 나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송나라 때 것입니다.
▲ 우리가 익숙히 들어온 '사서삼경'이란 말은 조선 때 만들어진 made in korea표였다.
춘추전국시대에 고전을 뜻하는 말은 육예(六藝)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인들이 중국고전을 불렀던 가장 흔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경(經)이란 말이 아니고 육예(六藝)라는 말입니다. 예(藝)라는 말은 영어의 아트(art)라고 하는데, 아트라고 해서 예술이란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어의 아트도 원래 의미는 기술(technic)이란 뜻입니다. 보통 예(藝)·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고 하는 육예(六藝)도 있지만, 여기서 육예(六藝)는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로서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입니다. 여기에 모두 경이란 말을 붙여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경(禮經)』ㆍ『악경(樂經)』ㆍ『역경(易經)』ㆍ『춘추경(春秋經)』이라고 하면 육예(六藝)는 곧 육경(六經)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보통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라고 할 때는 그것이 모두다 구체적인 텍스트(Text)를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詩)라는 것은 옛날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성립하면 거기엔 반드시 노래가 있게 되죠. 인간이 모여서 산다는 행위, 즉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현대 삶에서 유행가를 빼놓고 여러분들의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하면 노래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노래라는 것은 문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며, 그 노래의 가사가 대개 시(Poetry), 즉 시(詩)입니다. 시(詩)라는 것은 노래(songs)나 시(poetry)를 의미합니다.
서(書)라는 것은 다큐먼트(Document)라고 번역하는데 다큐먼트라는 것은 모든 서류입니다. 특히 서류 중에서 중요한 것이 인간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공문서입니다. 과거의 서류는 주로 왕의 칙서라든가 행위를 기록한 것들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서(書)’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禮)라는 것은 모든 제식(rites)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이 사는 데 의당 제기될 수밖에 없는 제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예라는 것은 하나의 질서개념입니다.
그 다음 악(樂)이라는 것은 역시 노래인데 여기에 작곡의 개념이 들어갑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성(聲)·음(音)·악(樂)을 구분하는데 성(聲)이라는 것은 지금 분필로 칠판을 두드릴 때 나는 이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등의 소리(Sound)를 말하며, 음악은 아닌 것이죠. 비록 현대음악에서는 사운드도 음악의 재료로 쓰지만, 사운드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소음(Noise), 즉 모든 잡음을 다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운드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운드 사이에서 질서를 발견했는데 사운드간의 질서라는 것은 음악적으로 말하면 배음(propotion), 즉 하나의 비율인데 사운드가 일정한 비례관계를 갖출 때 그것을 음(音, note)이라고 부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것은 ‘도’와 ‘레’, ‘레’와 ‘미’ 사이에 일정한 프로포션을 가진 사운드입니다. 그러니까 ‘도’와 ‘레’ 사이에는 무한한 성(聲)이 있지만 그 성(聲)은 음으로 취하지 않고, ‘도’하고 ‘레’라는 음(音)만을 취한 것 그게 음이죠. 그 다음 음(音)과 음(音)이 모인 것을 악(樂, music)이라고 합니다.
성(聲) | noise(sound) |
음(音) | 배음관계를 갖는 sound |
악(樂) | 音과 音이 모인 것 |
『예기(禮記)』 「악기(樂記)」 6절에 “성(聲)만 알고 음(音)을 모르는 놈은 금수(禽獸)와 같고, 음(音)은 알고 악(樂)을 모르는 놈은 소인, 그리고 악(樂)을 알아야 비로소 군자다[凡音者, 生於人心者也; 樂者, 通倫理者也. 是故知, 聲而不知音者, 禽獸是也; 知音而不知樂者, 衆庶是也, 唯君子爲能知樂].”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경(樂經)’이란 게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악경(樂經)』이란 것은 없습니다. 현재 「악기(樂記)」는 『예기(禮記)』의 한 편명으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서 「악기(樂記)」가 『악경(樂經)』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악기(樂記)」라는 것은 음악에 대한 인식론적인 철학이지 음악을 작곡하는 것에 대한 이론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고대에 악(樂)이라는 것은 과연 문헌적으로 있었을까? 악(樂)에 대한 이론이 실려 있는 것으로서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율력지(律曆志)」가 있죠, 악(樂)에 해당되는 것이 ‘율력지(律曆志)’의 ‘율(律)’이라는 것입니다. 이 율(律)은 법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을 뜻합니다. 여기에 뮤직 이론들이 많이 들어있어요. 정약용의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보면 이 『율력지(律曆志)』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역(易)이라는 것은 점입니다. ‘역(易)’이란 말 자체는 변화(change)란 말이고, ‘변한다’는 것은 인간 운세가 변한다는 말입니다. 우주든 인간이든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항시 변한다는 말이죠. 이 변한다는 것 때문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의 하나가 변하는 사태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미리 안다는 게 뭐죠? 그게 바로 ‘점(占, prognostication)’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변화를 미리 아는 방법 중에 가장 강력한 방법이 과학(Science)입니다. 일기예보라는 것은 일기라는 변화현상을 법칙적으로 미리 이해하는 과학이며, 물리법칙이라는 것은 물리적 현상이 미래에 이러이러한 법칙을 따라서 분명히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 예측의 근거를 법칙화한 것이 물리학입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에 『주역(周易)』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사이언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요.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적 수단이 없으니까 점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칙(Law)은 아닙니다. 점이라는 것은 올방구, 즉 변화(Chance)일 뿐이죠. 현대과학은 필연(Necessity)을 추구하지만 이 역(易)의 과학은 변화(Chance)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춘추(春秋)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봄과 가을인데 “춘추(春秋)가 몇이십니까?”라는 말은 “당신은 봄과 가을을 몇 번 겪으셨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나이를 말하고 나이란 곧 역사예요. 춘추(春秋)라는 것은 곧 시간(Time)입니다. 이 타임을 문화에다 옮겨 놓으면 역사(History)가 되는 것이죠.
이 여섯 가지 육예(六藝)는 옛날 문명을 구성하고 또 포괄하는 기본적인(Cardinal), 카테고리로서 인간세상에서 이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문명사에 다 적용될 수 있어요. 중국문명은 이러한 인간문명의 대 요소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전부 경전(經典)을 제시했습니다.
서양문화는 이렇게 포괄적이지 못하죠. 기껏해야 『성경(聖經)』 하나만 두루두루 말아서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예요. 성경을 보면 그 안에 시·서·예·악·역·춘추적인 요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등의 역사, 즉 춘추도 들어가 있고 제사장이 점치는 역도 들어가 있고 잠언 같은 형식의 악도 두루두루 다 들어가 있어요.
▲ 악경은 [예기] 속에 포함되어 있기에, 총 5권으로 완비되어 있다.
서설 2. 인간 세계를 이루는 두 축, 예(禮)와 악(樂)
중국 고문헌으로 확실히 인정할 수 있는 『시경』과 『서경』
하지만 중국문명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각기 따로따로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육예(六藝)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중국의 문헌으로서 가장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복잡한 고증을 해야 하겠지만 『시경(詩經)』이라는 것은 원시적인 노래들의 모음(collection)입니다. 『시경(詩經)』은 선집의 형식(Anthological form)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문명(古文明)의 잔재를 상당히 분명하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사 내용은 약 B.C 700년경에 사용되었던 언어문자를 아주 순수하게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경(書經)』은 나중에 심각한 금고문 논쟁을 야기시키는 텍스트이긴 하지만 상당히 고문헌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논어(論語)』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이란 말은 안 나오지만 ‘시서(詩書)’, ‘예악(禮樂)’이란 말은 짝으로 잘 나옵니다(물론 詩經, 書經이란 말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논어(論語)』라는 책은 중국문헌 중에서 가장 정통적 문헌입니다. 공자(孔子)라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으나 공자(孔子)라는 X가 있었다고 한다면 『논어(論語)』는 공자의 말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가장 믿을 만한(Authentic) 텍스트입니다. 물론 『맹자(孟子)』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센틱한 텍스트죠. 그러므로 『논어(論語)』라든가 『맹자(孟子)』같은 문헌은 고문명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논어(論語)』에 『역경(易經)』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역(易)이란 말이 하나 나오는데 이건 『역경(易經)』을 가리키는 글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역(易)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詩)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에서 그 인용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공자가 인용하고 있는 시가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경(詩經)』이라는 텍스트의 시하고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경(詩經)』이라는 텍스트를 분명히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자라는 사람이 이해했던 역사적 해석방식에 따라 우리는 그 텍스트를 접근해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공자가 꼭 『시(詩)』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요. 허나 『논어(論語)』에 나오는 ‘예악(禮樂)’이라는 말은 대개 추상적(abstract)으로 쓰여 지고 있으며 어떤 구체적인 텍스트를 가리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 시와 서야말로 글의 전범 같다. 그게 인류의 문자 생활이었고 여태까지도 그렇게 쓰여 지고 있다.
집단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예(禮)
그러면 예악(禮樂)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산다고 하는 사회현상은 일종의 떼지어 살기(Grouping)입니다. 모여 산다고 하는 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질서(order)가 없을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군집 형태가 개미의 예입니다. 하숙집에서 방에 앉아 있다가 기어 다니는 개미를 살펴볼 때가 간혹 있는데, 이 짜식들은 엄청난 고에너지체 같거든요. 개미라는 것은 도대체가 신기해요. 그 사이즈가 얼마나 작습니까? 그런데도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빠를 수가 없고 어떠한 물체를 물고 가는 걸 보면 그렇게 힘이 셀 수가 없어요. 개미의 몸체에 비한다면 개미가 뛰어다니는 속도는 벤 존슨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빠를 것이고 또 들어 올리는 힘은 전병관이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낼 그런 정도로 쎈 거라고. 그런데 벤 존슨은 고작 100미터 가서 지치지만 이놈의 개미는 수천 킬로를 그렇게 가는데 그동안에 아무것도 안 먹어도 이 대장정을 거뜬히 치러낸다 이겁니다. 개미라는 것 하나만해도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개미는 촉각은 발달되었을지언정 도대체 후각이 발달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 데도 꿀 묻은 컵을 놓아두면 수많은 개미가 몰려든다는 사실입니다. 그 넓은 천지에서 어떻게 나의 컵을 정확히 목표로 하고 몰려 올 수 있는지. 신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이런 숙제를 어떻게 푸는가 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죠.
그런데 이놈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엄청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개미는 여왕개미, 일개미 등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컴배트 같은 살충제를 놓으면 일개미가 그걸 물어다 여왕개미에게 먹여 몰살을 시키는데, 이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남미의 종교집단의 교주가 교도 모두에게 독을 먹여 죽인 사건과 비슷하죠. 그래서 나는 컴배트를 놓을 때 ‘내가 엄청난 학살을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개미가 여왕개미에게 일개미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禮, ritual)입니다. 일개미가 여왕개미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분명히 기능(function)과 역할(role)이 다 분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禮)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도와 문화를 분화(differentiation)시키는 것이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예(禮)라는 한 측면만 있으면 인간사회가 유지되지 않아요. 예(禮)만 있으면 히틀러 사회나 개미사회로 가는 것입니다. 개미사회는 예(禮)만 있고 악(樂)이 없습니다. 그 녀석들은 노래를 못 부르잖아요?
▲ 그래서 개미의 군집을 표현할 때 집단지성이란 말을 곧잘 쓴다. 무리가 하나의 몸인 것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군집하여,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야 하기에, 예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여타 동물과 다른 존재로 발돋움하게 하는 악(樂)
인간은 자유의지(free will)를 가진 동물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추위가 오면 잎이 떨어져야지 안 떨어지겠다고 폼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식물은 자유의지가 없어요.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그대로 반응(Reaction)을 하는 겁니다. 소나무도 독야청청(獨也靑靑)한다고 하지만 성격이 다를 뿐 변화를 그대로 다 받아요. 추우면 추운데 따라서 거기에 맞게 조절(adjust)을 합니다. 나무를 잘라보면 나이테라는 것이 있는데 추울 때 성장한 부분과 더울 때 성장한 부분이 다릅니다. 식물은 자연법칙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필연적 법칙(necessary law)을 갖는 것이죠.
이에 반해 인간은 이런 자연의 변화와 질서 속에 있으면서도 추우면 춥게 살질 않고 히타를 틀고 오바를 입습니다. 즉 인간은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거역하면서 사는 거예요.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입니다. 겨울에는 춥게 살아야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자유의지를 구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필연(necessity)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 자기가 콘트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이란 신이 있다면 인간이라는 우주는 또 하나의 신이예요. 인간은 자기의 세계를 자기가 운영(manage)하는 아주 독특하고도 유일한(unique)한 동물입니다.
▲ [매트릭스]의 명장면, 자유의지. 생에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예(禮)와 악(樂)의 관계
‘예악(禮樂)’에서 예(禮)는 필연적인 법칙적 세계에서의 분화를 추구하며, 악(樂)은 자유의지의 세계와 타인과의 동화를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왜 노래를 부를까요? 서태지는 왜 인기가 있습니까? 노래 부르는 순간에는 인간이 모두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심이 없어지고 같이 기쁘게 어우러져 동화가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바카스 컬트(Bacchus cult) 같은 것은 전부 예(禮)의 세계가 아니고 악(樂)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난교(Orgy)의 세계예요. 구약성경에 의하면 가을 추수 때 들판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혼음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최근에 개봉된 여왕 마고라는 영화에 번지르르하게 술 마시고 섹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에 아주 평범한 생활이었어요.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은 모두 바킥컬트(Bacchic Cult)로부터 내려오는 올지전통입니다. 동양에도 이런 전통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고려말의 연등회니 팔관회니 하는 게 별 게 아니고 그게 다 올지라고. 절간에서 탑 주위를 빙빙 돌다가 뭐 하겠어요. 쓰러져서 서로 쑤시는 거지 뭐! 예(禮)의 세계가 아니고 악(樂)의 세계란 말이죠. 여자들이 상당히 예(禮)에 갇혀 살다가 악(樂)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바로 연등회의 탑돌이입니다. 이렇듯 예악이라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측면인 것입니다.
악(樂)만 있으면 인간세상이 혼돈(Chaos)로 가고 무정부로 가며, 예(禮)만 있으면 질서 속에 완전히 고착이 되어 파멸이 되어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항상 이 예(禮)와 악(樂)의 문제를 어떻게 적절하게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중용(中庸)』의 문제의식입니다.
『중용(中庸)』이라는 개념도 바로 이 예(禮)와 악(樂)에서 나오는 거예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논어(論語)』에 나타나 있는 예악(禮樂)이라는 말은 그런 추상적인 개념으로 나오지 『예경(禮經)』, 『악경(樂經)』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쉽게 확인할 수 있어요. 하버드-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에서 나온 ‘일자색인(一字索引)’에서 예(禮)나 악(樂)의 용례를 찾으면 쭉 나오는데, 그것들의 텍스트 상에서의 용법을 다 찾아보면 『논어(論語)』 전체에서 예(禮)·악(樂)이 어떻게 쓰였는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악(禮樂)이라는 말은 대개 추상적인(Abstract) 사회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禮)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이 남았지만 악(樂)에 대해서는 문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서·예·악·역·춘추의 육예(六藝) 중에서 『악경(樂經)』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육예(六藝)에서 악(樂)이 빠져서 오경(五經)이 되는 것입니다.
악(樂) | 예(禮) | |
우주론 (宇宙論) |
天 | 地 |
陽 | 陰 | |
神 | 鬼 | |
魂 | 魄 | |
인성론 (人性論) |
上焦 | 下焦 |
情 | 理 | |
由中出 | 自外作 | |
動於內 | 動於外 | |
사회론 (社會論) |
同 | 異 |
親 | 敬 | |
和 | 別 | |
靜 | 文 | |
和 | 節 | |
盈 | 減 | |
必易 | 必簡 |
출처- 『논어한글역주』, 598쪽.
▲ 악은 한껏 눌리고 한껏 구색을 차린 것들을 무너뜨리고 원초적인, 삶의 지향성으로 되돌린다.
서설 3. 분서갱유가 촉발한 금고문논쟁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고전(古典)의 운명
그런데 ‘경(經)’, ‘오경(五經)’이라는 말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없었던 말이며, ‘오경’이란 말은 한대(漢代)에 생겨난 것입니다. 전국시대에서 한대로 넘어오는 데 가장 거대한 사건이 바로 진시황의 중원 통일입니다.
진시황이라는 인물은 분열되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끝낸 놈으로서 진시황은 서양으로 말하면 줄리어스 시이저와 비슷한 사람인데, 중국에 최초로 제국(empire)을 만들었습니다. 제국의 특징은 거대한 제국의 영토를 중앙집권제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즉 분권화(localized)되었던 모든 체제가 집권화(centralized)된다는 거예요. 진시황 밑에는 이사(李斯)라고 하는 아주 걸출한 사상가이자 탁월한 지략가가 있었습니다. 이사가 진시황에게 고하기를 “요새 지식인들은 아주 완고하여 항상 옛을 가지고 금(今)을 비판하며, 시대가 이미 변해서 법이 없으면 통제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자(儒者)들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늘 옛날만 찬양하고 현실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죠. 이것이 이사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가장 큰 근거는 이렇게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는 고(古)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식인들이 전거로 하는 것이 대개 시·서·예·악·역·춘추들이었는데 역(易)은 당시에 사이언스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분서갱유의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놈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든 서물들을 불살라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보부를 시켜서 그 당시 문제아들을 조사해보니 460명으로 많지도 않았다는데 이 460명을 파묻어 죽인 것이죠.
사실 여왕마고(Queen Margot) 같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사회에서 분서갱유란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460명이라는 숫자는 인류역사를 통해보더라도 그다지 많은 게 아니었고 실제적으로 책을 다 태울 수도 없었어요. 게다가 과학계통의 책은 안태웠습니다. 사실 분서갱유는 지식인에 대한 상징적인 탄압이었을 뿐이며 역사에서 자꾸 언급을 하기 때문에 확대되어서 인식이 되는 것이지, 분서갱유에 의해서 중국의 고전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예요. 그것보다는 B.C 206년에 항우가 수도인 함양을 불태웠을 때 더 많은 문헌의 손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서가 있은 지 22년 후에 서물을 복귀하라고 칙서가 다시 내려져서 오히려 중국문명은 더 적극적으로 부흥(Revival)을 하게 됩니다.
▲ 오히려 분서갱유가 학문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진시황과 모택동의 문자개혁
모택동도 중국을 통일하고 간자개혁(簡字改革)을 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간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컴퓨터가 발달한 지금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죠. 간자는 보기도 좋지 않을 뿐더러, 중국문자가 워낙 특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결코 간자혁명만으로는 문맹이 퇴치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내가 새로 알파벳을 만드노라[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라는 말을 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들이 문자가 하도 복잡해서 배우기 어려우므로 문자개혁을 한 것입니다.
진시황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진시황의 개혁 중에 가장 큰 것이 문자개혁이었는데 모택동보다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말에 방언이 있듯이 진시황 이전에는 각 제후국들마다 글자들이 다 달랐는데, 과두문자(蝌蚪文字)니 뭐니 해서 아랍문자가 저리가랄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었지요. 그래서 문자들을 통일하여 먼저 소전체(小篆體)를 만들었고 그 후 노예들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글자라고 만든 글자가 예서(隸書)입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라는 것은 이 예서에서 비롯된 해서(楷書)입니다. 대개 해서는 육조(六祖)시대에 완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분서갱유와 금고문논쟁으로 성립된 경(經)
칙령으로 고문헌을 다시 거두어들일 때, 진시황의 분서(焚書) 이후에 살아있던 사람들이 암기한 내용을 받아쓴 것에는 예서(隸書)로 썼을 것이며 이것이 대개 금문입니다. 그리고 숨겨둔 덕분에 분서에서 살아남은 문서는 복잡한 고문으로 되어있었겠죠? 그래서 한대(漢代)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내 것이 진짜 텍스트라고 구라를 치는 복잡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고문 논쟁은 결과적으로 한대의 문화를 엄청나게 부흥시켰습니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좋은 영향을 더 많이 발휘한 사건이었던 것이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이가 조금 더 용감했다면 광주에 가서 애매한 사람을 죽일 게 아니라 국회도서관 정도를 하나 확 불 질러 버렸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러면 활발한 학술논쟁이 많이 벌어졌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도 책을 많이 써서 양심에 걸리지만 요새 왜 이렇게 쓸데없는 책들을 많이 써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컴퓨터가 처음 나올 때는 책이 없는 간략한 사회를 모토로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문자공해를 야기시켰어요. 요새는 책이 저렇게 많은데 거기다가 목록 하나를 더해서 도서관 사서의 손을 한번 더 괴롭혀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책을 내기가 죄송스럽고 미안합니다.
하여튼 중국문명은 한대 금고문논쟁을 통해 크게 일어나서 고증학ㆍ훈고학이 발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經)’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죠. 즉 경(經)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텍스트(most cardinal text)라는 뜻이죠. 그러므로 분서갱유 이전의 서물에 대해서는 경(經)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자는 시(詩)를 편찬했지 『시경(詩經)』을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자는 시(詩)에 대한 인식이 있을 뿐 『시경(詩經)』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詩)와 『시경(詩經)』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경학(經學)이 성립되면서 한대(漢代)에 오경(五經)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도서관학도 발달하게 됩니다. 텍스트가 없어지니까 나라에서는 대대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들을 모두 수집하고 조사하는데, 그 당시의 문헌은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이었으므로 모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어(論語)』가 백 권이 있다고 하면 백 권이 다 다른 것이죠. 중국에서 인쇄술이 발달한 것은 송대 이후이므로 그 이전의 텍스트라는 것은 요즘 책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 한자의 변화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복잡해진 데서 단순해진 것으로, 둥그러운 모습에서 반듯한 모습으로.
서설 4. 『예문지(藝文志)』와 정경화
한나라, 잡다한 도서를 정리하여 『예문지』를 만들다
한나라의 성제(成帝)가 유향(劉向, BC 77~ BC 6)이라는 사람에게 기존의 서적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맡겼다는데 유향은 책들을 교감(校勘)하여 편목을 조목조목 나누고 그 대의(大義)를 기록하여 『별록(別錄)』을 만들었습니다. 유향이 이 방대한 작업을 하다가 죽자 아들인 유흠(?~23)이 그 작업을 계승하여 중국 최초의 도서 분류 목록인 『칠략(七略)』을 완성하고(略이란 분류기준을 말함), 이 『칠략(七略)』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 유명한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입니다. 『한서(漢書)』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최고의 정사(正史)이죠.
이 「예문지(藝文志)」라는 것이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예문지(藝文志)」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 가는 줄 몰라요. 도서목록인데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싶겠지만 「예문지(藝文志)」에 한번 미치면 한 몇 년은 보내야 합니다. 나도 한때 『예문지(藝文志)』에 미쳐서 몇 년을 보내본 적도 있습니다. 중국 고문헌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예문지(藝文志)」를 들춰보지 않고서 중국문명 운운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예요. 나의 책 『너와 나의 한의학』에서 『상한론(傷寒論)』 하나 가지고 쭉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전부 「예문지(藝文志)」만 보고 한 것입니다.
▲ [한서예문지]는 한나라판 사고전서에 가깝다.
성경의 성립과정을 통해 본 정경 확정의 난점
이렇게 해서 악(樂)을 뺀 시ㆍ서ㆍ예ㆍ역ㆍ춘추가 경화(經化, cannonization)됩니다. 즉 성경(Bible)화 된 것이죠. 예를 들어 『신약성경』의 「로마서」라는 것도 처음에는 단지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편지(Paul‘s letters to Romans)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바이블(BIBLE)』을 『성경(聖經)』이라고 번역한 것은 한대의 ‘경(經)’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서양 바이블을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예요.
서양 사람들은 바이블이란 개념을 쓰는데, 바이블이란 파피루스, 페이퍼와 통하는 말로서 결국 종이쪽, 문헌이란 뜻입니다. 바이블의 구성은 편지와 전기(biography)밖에 없는데, 예수의 전기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사람이 쓴 것이 있고 거기에 사도행전이라는 역사적 문헌이 더해진 것입니다. 그것들 역시 모두 필사본이며 사도바울의 편지도 모두 필사본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의 성립 과정을 예로 든다면,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라는 데에 가서 구라를 치고 교회를 성립시킨 다음 떠나가면서 이제는 너희들끼리 예수 찬양하고 살아라하고 떠나죠. 그런데 바울이 거기에 있을 당시에는 바울의 구라가 워낙 좋으니까 교회가 잘 운영되었지만, 바울이 떠나고 한참 지나니까 개판이 되어버릴 것이 아닙니까? 석 달 만에 만든 교회니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나자렛에서 나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라는 놈을 알게 뭐야? 그래서 교회에서 서로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쌈박질을 벌이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메신저가 헬레벌떡 바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갑니다. 그러나 교통이 좋지 않은 당시에 바울이 다시 돌아가서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비서에게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탄의 꾀임에 빠지지 마라.” 등등 구라를 받아쓰게 해서 건네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에 있는 「에베소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니, 「고린도 후서」니, 「로마서니」 전부 이런 식으로 성립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사람이 당시 바울이 직접 쓴 그 편지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떼돈을 벌 테지만 어떤 게 사본이고 어떤 게 원본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 편지의 온갖 사본들을 모아서 A.D 300년 이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데에서 편찬한 것이 바로 『바이블』이예요. 그러므로 유실되지 않고 성경 27편에 들어간 글들은 아주 재수가 좋은 것이죠. 요새 예수가 인도에 가서 수도했다는 썰들을 실은 책들이 나오는데, 당시에 전기나 편지가 한두 개가 아니고 성경성립까지 2, 3백년의 공백이 있었으므로, 그런 설도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사실 그런 설은 말도 안 됩니다.
정경 확정 이전엔 위서란 없다
인간이 가짜를 진짜처럼 위조하려는 욕망은 대단한 것 같아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353년 3월 3일 성립)니 하는 여러 가지 위서(僞書)들이 인간 세상에는 끊임없이 생깁니다. 갑골문조차도 돈이 된다고 하니까 벌써 1910년대에 은허의 동네놈들이 자기네가 먹던 소뼉다귀를 태우고 썩히고 갑골문 흉내를 내어서 엄청나게 위조품을 만들어 팔아먹은 경우도 있어요. 처음엔 그것도 모르고 갑골문 연구가들이 죽어라고 연구했는데 내용이 너무 이상해서 보니깐 위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수한 목적에 의해서 경화(經化, cannonize)되기 전에는 위서(僞書)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어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몇 번 했다는 이야기 같은 불경스러운 내용이 파피루스에 있으면 이 사본은 경전화 작업에서 빠지게 되고 이것은 경전(經典)에 대해서 ‘외경(外經, apocrypha)’이라고 불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의 전도여행.
서설 5. 마왕퇴 『노자(老子)』의 발견과 중국을 휩쓴 불교
마왕퇴 『노자』 발굴이 보여준 고문헌의 정밀성
동서문명이 경전화(canonization) 사업을 벌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중국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빠르고 방대하며 더 정확합니다. 얼마 전에 마왕퇴(馬王堆)의 한묘(漢墓)에서 B.C. 190년경의 백서(帛書)들이 발견되었는데, 문헌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 연구학자가 쥬라기 공원에 가서 살아있는 공룡을 보았을 때 감격하는 장면과 비견할 수 있는 사건으로서, 눈물을 줄줄줄 흘릴 만한 엄청난 사건이 터진 것이죠.
노자 텍스트만 보더라도 B.C. 5세기 정도부터 계속 베껴서 내려 온 것이니 그 원본은 고사하고 그 당시 널리 읽혔던 책과 요즘 우리가 보는 책과는 얼마나 차이가 크겠습니까? 게다가 죽간을 묶는 가죽끈이 끊어져서 다시 묶을 때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 즉 착간(錯簡) 현상을 감안할 때 문헌 비평(text critique)은 보통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는데 죽간으로 된 책은 편(篇)으로 세고 두루마리로 된 것은 권(卷)으로 센다는 것이예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을 많은 사람들이 공자가 『주역(周易)』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요즘의 가죽표지의 콘사이스가 세 번 떨어진 것처럼 너덜너덜 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죽간을 묶은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공부한 것뿐이예요. 이 끈은 잘 끊어집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자는 사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건 아닌 거야. 한 100번쯤은 떨어져야 제대로 공부했단 이야길 듣는 거지.
그런데 마왕퇴의 『노자』는 죽간으로 된 것이 아니고 비단에 쓴 백서입니다. 백서는 병풍처럼 접어서 보관되어 있으므로 착간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노자 텍스트와 B.C. 190년의 텍스트가 80프로이상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국문명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결국 중국의 고문헌은 상당히 일찍 경전화되면서 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위편삼절이 대단한 게 아니다. 죽간으로 묶인 책이기에 조금만 봐도 금방 떨어지니 말이다.
당(唐)의 『구경(九經)』, 송(宋)의 『십삼경(十三經)』 확정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에서 예(禮)는 『예기(禮記)』ㆍ『의례(儀禮)』ㆍ『주례(周禮)』의 삼례로 분화되고 춘추(春秋)는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의 삼전(三傳)으로 분화되어 모두 구경(九經)이 되는데 위진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 구경(九經)이란 말이 나와요.
한나라 이후 가장 번성했던 제국은 당나라인데 이 당대(唐代)에 중국문명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구경(九經)에 『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효경(孝經)』 그리고 중국고대의 사전인 『이아(爾雅)』가 더해져서 십삼경(十三經)이 된 것입니다. 이 십삼경(十三經)에 『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논어(論語)』·『맹자(孟子)』는 다 들어가 있지만 사서(四書)란 개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송대(宋代)에 이런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수당을 휩쓴 불교와 『사서』란 개념의 성립
당(唐)과 송(宋)의 거대한 차이는 당(唐)이 외래에서 유입된 불교문명이었음에 반해 송(宋)은 그 외래문명에 대한 반발로 철저히 반불교적인 유교문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불교는 전도주의(evangelism)가 매우 강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인도라는 울타리를 넘어 중국으로까지 전파되는 것이죠.
나는 언젠가는 학생들하고 인도에서부터 천산북로, 남로를 거쳐 돈황까지, 그리고 돈황에서 방향을 틀어 곤륜산까지 올라갔다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불교의 전도자(evangelist)들이 어떻게 중국문명에 침투했는가를 걸으면서 체험해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인류사에 있어서 불교처럼 강력하게(massively) 외래문명이 한 문명에 들어온 사건이 별로 없습니다. 인류사에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엄청난 문화적 공략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중국문명은 불교에 완전히 세뇌(洗腦)당하게 되요. 그래서 불교에서 에너지를 빌린 수(隋)ㆍ당(唐)의 제국문명이 꽃핀 것입니다. 엄청난 산맥으로 격절되어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융합되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징기스칸이 세계를 제패했다고는 하나 말발굽으로 한번 달렸을 뿐, 문화를 남긴 것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엄청난 사건이었죠. 현대에서 이러한 형태의 융합이 가장 매시브하게 일어난 것이 바로 서구라파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로부터 나온 거대한 과학문명이 세계를 제패한 사건입니다. 위와 같이 수(隋)ㆍ당(唐) 문명에서 송(宋)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서(四書)’라는 새로운 개념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 대학과 중용을 예기 속에서 빼오고, 맹자를 새롭게 편입시켜 사서를 만들었다.
서설 6. 당송에 침투한 불교
주희, 불교에 의해 만들어진 수당(隋唐) 문명에 위기감을 느끼다
주희가 사서(四書)를 만들 때 사경(四經)이라는 말을 써도 안 될 것은 없으나 사서(四書)라는 말을 썼어요. 당시에 서(書)라는 것은 ‘쓴다’는 포퓰라(popular)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서(書)라고 해서 결코 경(經)보다 낮은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는 말은 전 시간에 말했듯이 조선시대에 언해본이 나오면서 과거(科擧)와 관련해서 생겨난 말입니다. 경(經)에 대해서 서(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십삼경(十三經) 안에 사서(四書)는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는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사서삼경이라는 말은 없는 거니깐요.
주자라는 사람은 이 네 책을 뽑아서 어필을 시켜야만 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자는 수(隋)ㆍ당(唐) 문명이 그 근원을 밖에 있는 엑소제노스(exogenous, 외생의)한 문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라는 인도문명이 들어와서 그것이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수(隋)ㆍ당(唐) 문명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래문명일 뿐이라는 거예요. 서구라파의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강력했던 이유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양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만 가지고 들어왔다면 그토록 대대적으로(massive)하게 침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합리주의라는 것은 ‘1+1=2’라는 것처럼 설득하기가 쉬워요.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다 설득당해서 죽어라고 수학공부하는 것이 아닙니까? 수학공부 안 하고 살려면 청학동 가서 살 수밖에 없어요. 현대문명에서는 이 수학과 타협하지 않고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불교는 중국정도만 먹은 데 비해서 이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전 세계를 싹쓸이한 것이니 굉장히 무서운 것이죠. 그러나 나는 수학을 모르고도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20세기는 계몽주의가 휩쓸었고 그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계몽주의가 낳은 상처, 성수대교&아현동 가스폭발 사고
우리나라도 불교를 받아들인 수ㆍ당 문명처럼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지금의 대한민국문명으로 탄생했고 또 그 패러다임 안에서 문명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문명의 정체는 성수대교 붕괴와 아현동 가스폭발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된 지 며칠 후 이리에서 올라와서 직접 가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사를 덜 조였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큰 문제는 디자인상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트러스교는 구조상 비틀어지면 비틀어졌지 가운데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시공할 때 시공의 편의를 위해 카트리지식으로 끼워 넣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본 수학이 없었던 거예요.
물론 계몽주의의 죄로 성수대교가 빠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도올서원에 온 것이 아닙니까? 성수대교 사건의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양의 과학을 철저히 못 배운 탓도 있겠지만 그러한 잘못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인간 자체의 문제도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서양문명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믿어서 물질이 풍족해졌으면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느끼고 비판하듯이, 송대(宋代)에는 수(隋)ㆍ당(唐)의 찬란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문명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로써 지식인들의 비판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침투는 의학ㆍ철학ㆍ분석학 등의 문화적인 것들의 침투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한 문명이 침투할 때 정신적인 측면만 들어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정신문명을 가능하게 한 물질적인 측면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정신문명이 침투할 때 물질문명도 동시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흔히 불교는 종교니까 그 정신적인 측면만이 중국에 침투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그 불교 문명을 가능하게 한 엄청난 물질문명이 인도에는 있었으며 그것이 불교와 더불어 동시에 중국으로 침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라는 종교만이 침투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도의 건축, 의상 등의 여러 물질문명들이 중국에 들어왔고 이것의 영향으로 수, 당대의 찬란한 문명이 이룩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한의학도 순수히 중국의 것만은 아닙니다. 인도에도 아유르베다【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도의 전통의학 시스템으로 생명의 과학이다. 그 어원을 보면 ‘아유르(Ayur)’는 ‘생명(life)’을 의미하고 ‘베다(veda)’는 ‘지식(knowledge)’을 뜻한다.】 의학이라는 엄청난 의학 체계가 있었고 이것이 들어와 중국 한의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보는 한의학 텍스트에도 수많은 인도 의학의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 1994년 10월 21일 7시 38분경에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한 사건. 삼풍백화품 붕괴와 함께 최악의 참사다.
서설 7. 안타깝게 송나라를 바라보던 주희의 눈망울
송나라에서 적폐로 인식된 불교
그러나 침투한 문명 중 핵심적인 것은 불교였고 그것이 중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이든지 방식이 다를 뿐, 결국 그 주제는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그 구원의 방식이 문명으로부터의 벗어남인 해탈(解脫, enlightenment)이라고 주장합니다. 불교가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인간세의 모든 것이 고(苦, 一切皆苦)이고 그 고(苦)는 집착[執]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苦)’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세의 일에 대한 집착을 끊는[滅執]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윤리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버린다(transethical)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잣대를 벗어난 원효에게는 요석공주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런데 초윤리적이라는 것이 제대로 될 때는 근사한데, 어설프면 땡중들이 뒷구멍으로는 호박씨나 까면서 밖으로는 자기는 해탈했다고 뻐기면서 돌아다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송나라 때 당문명에 대하여 가한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바로 불교의 초윤리적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을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서구의 계몽주의가 가르친 것은 시민의 자유(individual freedom)이고 이런 개별적 자아에 대한 강조가 인간의 삶의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현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 문제점이 개인주의, 청소년 범죄증가, 인간소외 등인데 수(隋)ㆍ당(唐) 대에도 청소년 범죄증가, 땡중들의 사기행각, 불교의 영향을 받은 관료들의 부패 타락상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똑같은 문제이지요.
▲ 불교의 전파는 그 나라를 완전히 바꾸었다.
송나라의 불교와 우리나라의 계몽주의의 공통점
송나라 때 사람들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다 보니 불교는 화려하고 해탈하고 열반에 들고 하는 것이 멋있기는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개유심조(一切皆惟心造)’라고 해서 마음먹기에 따라서 산도 없어졌다가 나타났다하고, 십이지연기가 어떻고 삼법인이 어떻고, 아홉식[九識]이 어떻게, 하여튼 사고와 언어가 화려하고 복잡하기 그지없어요. 이러한 새로운 사고가 쏟아져 들어오자 중국의 지성인들 거의가 불교에 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근세에는 지성인들이 전부 계몽주의에 미친 것입니다. 지금 서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거의가 계몽주의에 미친놈들입니다. 서양철학을 다 따라가려면 희랍어도 배워야 하고 과학철학도 배워야 하고 논리학도 배워야 되고 한량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아무리 해봐야 결국은 성수대교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까 송나라의 지성인들에게 이와 똑같은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자라는 사람은 뼈저리게 이러한 문제를 고민한 양심적 사상가였던 거예요. 칼 맑스가 대영제국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면서 굶주리고, 난로도 못 피우고, 아내와 자식은 병들어 죽는 불행한 처지에서까지 『자본론』을 쓰다가 죽은 것과 비슷하게 주자는 죽기 전날까지 『대학(大學)』을 교정보다가 책상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왜 그러고 있었을까요?
▲ 주희, 그는 이런 위기의식을 어떻게 타파하려 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사서였다.
서설 8. 주희의 사서운동(四書運動)
주희, 「대학」과 「중용」을 장구화하다
그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잘못되어가는 문명을 바로잡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 문명을 만들어야겠다는 근본적인 걱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아주 강력한 윤리주의를 들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의 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자가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십삼경(十三經)을 들여다보다가 『예기』 31장에 있는 『중용(中庸)』의 첫머리를 보고 쇼크를 받은 거예요. 하늘(Heven)이 명령하는 것, 그것이 성(性)이라는 거예요. 이때 주자의 눈에 들어온 성(性)이란 것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moral nature)입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도덕성을 이미 부여했다’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불교의 초윤리적인(trans-ethical) 메시지와는 전혀 달라요.
그래서 『중용(中庸)』을 본 주자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했고 『중용(中庸)』으로 문제를 다시 풀어서 문명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隋)ㆍ당(唐)에서 비롯하여 주자가 살고 있던 송(宋)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영향으로 지성인들이 너무 타락하고 너무 풀어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자는 어떠한 새로운 질서(order)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주자에게 어필된 것이 『예기(禮記)』,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인데 『논어(論語)』, 『맹자(孟子)』에는 집주를 했고 『대학(大學)』, 『중용(中庸)』은 장구(章句)를 했습니다.
장(章)이라는 것은 챕터(Chapter)이고 구(句)라는 것은 단락(Paragraph)을 말하는데, 『예기(禮記)』에 있던 대학과 『중용(中庸)』이란 텍스트를 보니 쭉 붙어있고 너무 복잡해서 주자가 직접 장(章)과 구(句)로 나누어 분류를 해서 편집한 것이죠. 여러분들은 장구(章句)라는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의 장구(章句)라는 말은 주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주자가 비로소 장구화(章句化) 함으로써 성립한 주자의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으로 주희는 이걸 빼내어 단행본으로 재편집하며 만들었다.
‘집주’ 작업을 통해 변혁을 꿈꾸다
『중용(中庸)』을 자세히 보면 장구(章句)의 장(章)처럼 나누어질 만합니다. 1장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부터 ‘만물육언(萬物育焉)’까지가 1장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과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날 『예기(禮記)』를 쓴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구의 개념은 없었지만, 『중용(中庸)』의 내부구조에 있는 리듬을 주자가 잘 파악해서 재정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는 『논어(論語)』, 『맹자(孟子)』에 대해서 이전의 모든 주를 모으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집주(集註)라는 것도 주자의 고유명사이므로 일반명사처럼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앞에 사서(四書)라는 말이 없이 집주(集註)라고만 해도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말하는 줄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집주(集註)라는 말은 다른 경우에는 쓸 수 없거든요.
주자라는 사람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통해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며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거의 7세기동안 동아시아 문명을 지배한 것입니다. 실지로 여러분들에게 고전으로서 다가온 것은 당대에 성립된 13경이 아니고 주자가 재정립한 『사서집주(四書集註)』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서(四書)라는 것은 완전한 새로운 운동(New Movement)이며 지성사에서 아주 유일(unique)한 새로운 문명의 굴레바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자는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내면서 자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해석학(hermeneutics)적인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이른바 해석학적 제2기원)【해석학적 제1기원 : 공자가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술이부작(述而不作)’한 사람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 ‘술(述)’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새로운 ‘작(作)’을 했으며, 그 작(作)을 한 것. / 해석학적 제2기원 : 사서(四書)운동이라는 ‘술(述)’을 통하여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작(作)’한 것】.
▲ 주를 모았다는 뜻의 집주라는 말도 주희가 만든 말이다.
주희의 해석을 전범으로 삼지 말고 ‘사서운동의 정신’으로 읽어라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읽을 때에는 어디까지나 주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패러다임으로 봐야지 거꾸로 이것을 사서(四書)에 대한 유일한 해석(the interpretation)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서집주(四書集註)』는 사서에 대한 하나의 해석(a interpretation)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서집주(四書集註)의 해석을 사서에 대한 유일한 해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전형적인 때가 조선시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the’를 ‘a’로 바꾸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서(四書)를 읽는다는 것은 주자의 것을 단지 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주자가 일으켰던 것과 같은 우리의 혁명을 일으켜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역사라는 게 돌고 돌거든요? 주자가 불교라는 외래문명에 대해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려고 노력한 운동이 바로 사서운동이었고 7세기동안 동아시아문명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다시 서구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외래문명에 의해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에 의한 찬란한 수(隋)ㆍ당(唐) 문명과 같이 서구의 계몽주의 패러다임으로 대한민국 문명을 만든 것이죠. 그런데 여기 살고 있는 우리는 또다시 이것을 비판하고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서(四書)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는 주자가 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집주(集註)’가 나오겠지만 또한 우리는 주자의 집주(集註)도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는 이런 식으로 리드미컬한 반복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역사라는 게 너무 반복을 되풀이해서 재미가 없는데 다 때려치우고 완전히 쌩으로 새 것은 없을까?
서설 9. 고전학을 공부하는 이유
해 아래 새 것은 파워가 없다
완전히 쌩으로 새 것이 나온다고 하면, 불가능할 거야 없지만 힘들고 또 누가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은 어떤 의미에서 업보예요. 왜냐하면, 글을 쓸 때에도 『중용(中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하면 근사하게 생각하고, 쌩으로 김용옥 얘기다 하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을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고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더 센 게 있으면 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서태지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서태지는 아주 센세이셔널(sensational)하고 자기 메시지도 있고 텍스트도 있으며 매체도 있습니다. 랩송은 아주 새로운 것이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나도 ‘전혀 새로운 것으로 히트 칠 것 없나’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 묘안이 없어요. 그럴 바에야 “썩은 것이지만 이것을 재해석하자”하고 고전학에 덤벼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고전학이란 것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다릅니다. 서태지도 새것이지만 그것 가지고는 문명의 운영이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고전 속에 파묻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왜 이런 고전을 봐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없이 그저 고전이라니까 고전학을 하는데 이제 우리는 고전학을 하는 그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 주희는 기존에 있던 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완전히 뜯어고쳤다. 이건 그냥 편집일까, 창작일까?
적당히가 아닌 제대로
나도 내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요새는 조금 철이 든 것 같아요. 사람은 철이 안 들었을 때는 역시 화려하고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제 나는 유명해지는 것도 싫고 대단하게 무엇을 만드는 것도 싫습니다. 그저 앉아서 진실되게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거기서 묵묵히 무엇을 모색하는 그런 것을 하려고 합니다.
한국 지성계를 괴롭히는 가장 거대한 문제는 바로 무지(無知)입니다. 학자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배우는 사람인데 도무지 배울 생각들을 안 합니다. 지금 내 나이가 벌써 50인데, 나는 50살 돼서야 겨우 요정도 지식체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서원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개가 한창 젊은 사람들인데요, 나는 지금 이 나이가 들도록 한의학이고 뭐고 간에 모두 쌩으로 다시 하는 정말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정말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서 뭔가 해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컴퓨터를 현란하게 두들거리거나 마이클 조던의 멋진 덩크슛이 있는 농구처럼 하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것, 고전을 하나 독파해서 제대로 안다든가, 의문이 드는 것을 철저히 따져서 확실하게 안다든가 해야지 어정쩡하고 애매한 자세로 남들이 얘기해주는 것이나 주워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제대로 알 때까지 파고드는 자세
오늘 내가 말한 십삼경(十三經)에 관한 얘기들은 대학교에 가면 경학한다는 사람들이 쉽게 강의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내 강의를 들으면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전혀 새로울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은 지가 모르는 남의 얘기들을 가져다가 지껄이는 것이고 나는 내가 경학사를 보다가 내가 깨달은 것만 여러분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쉽고 재미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제대로 알고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한국문명이 나아갈 길이 없어요. 젊었을 때 야망을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중요한 도전인데 고전에 대한 도전이 없는 지식은 공중누각입니다. 한국문명을 전공하든 무엇을 하든 고전에 대한 뿌리와 이해가 없이 문명을 논하는 허구성에는, 내가 보기에 감당하지 못할 천박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올서원에 온 것은 대단한 일이며 엄청난 고전의 세계의 맛을 보려하고 있는 것이에요.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공부해주기 바랍니다. 비록 한 달 동안이지만 상당히 집약적인 시간이 될 테니 열심히 공부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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