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룡 - 후대야좌(後臺夜坐)
밤에 후대에 앉아
후대야좌(後臺夜坐)
정사룡(鄭士龍)
仲冬良夜仍南至 江月盈規看更完
銀闕湧空收薄翳 金波流彩閃驚湍
斗邊瞻望眞傷遠 天末飄零亦足嘆
坐到三更窮不寐 訓狐三叫髮衝冠
煙沙浩浩望無邊 千刃臺臨不測淵
山木俱鳴風乍起 江聲忽慮月孤懸
平生牢落知誰藉 投老迍邅祗自憐
擬着宮袍放身去 騎鯨人遠問高天 『湖陰雜稿』 卷之三
해석
仲冬良夜仍南至 중동량야잉남지 |
동짓날 좋은 밤에 남쪽에 이르니, |
江月盈規看更完 강월영규간갱완 |
강달은 둥글게 떠서 다시 완전해짐을 보았네. |
銀闕湧空收薄翳 은궐용공수박예 |
은빛 궁궐【은궐(銀闕): 백옥(白玉)으로 만든 궁궐의 문.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동해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瀛州)에 있다 한다. 『梁元帝』 「楊州梁安寺碑序」】은 구멍에서 솟아나와 가린 것을 거두어 엷게 하고, |
金波流彩閃驚湍 금파류채섬경단 |
금빛 물결은 채색을 흘려보내 여울을 섬광처럼 놀래키네. |
斗邊瞻望眞傷遠 두변첨망진상원 |
북두칠성 곁을 바라보니 참으로 멀리 있음이 속상하고, |
天末飄零亦足嘆 천말표령역족탄 |
하늘 가에서 나부끼니 또한 탄식할 만하구나. |
坐到三更窮不寐 좌도삼경궁불매 |
앉아 삼경에 이르러 다하도록 잠 오지 않아, |
訓狐三叫髮衝冠 훈호삼규발충관 |
수리부엉【훈호(訓狐): 올빼미과에 속하는 수리부엉이를 말함. 『本草綱目』 鴞】이 세 번 울 때 머리에 관을 찌르네. |
煙沙浩浩望無邊 연사호호망무변 |
안개 낀 모래톱 아득하여 바라봐도 끝이 없고, |
千刃臺臨不測淵 천인대림불측연 |
천 길 대(臺)에 오르니 깊이 헤아릴 수 없어라. |
山木俱鳴風乍起 산목구명풍사기 |
산과 나무가 함께 울리니,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고, |
江聲忽慮月孤懸 강성홀려월고현 |
강물 소리는 문득 사나워지니, 달이 외롭게 걸렸고나. |
平生牢落知誰藉 평생뢰락지수자 |
평생의 불우함 뉘를 알아 의지할꼬? |
投老迍邅祗自憐 투로둔전지자련 |
늘그막에 머뭇거리니 다만 절로 서글플 뿐. |
擬着宮袍放身去 의착궁포방신거 |
궁포(宮袍) 차려입던 것에서 몸 놓여나 떠나가니, |
騎鯨人遠問高天 기경인원문고천 |
고래 탄 사람, 이태백의 안부를 멀리 높은 하늘에 묻겠노라. 『湖陰雜稿』 卷之三 |
해설
깊은 밤 아득한 우주공간의 한 위치에서, 자신의 한 생애를 회상(回想)하는 침사고려(沈思苦慮)이다.
1연은, 깊은 소의 높은 대에 등림(登臨) 조망(跳望)하는 호망(浩茫)한 야경이요, 2연은, 불현듯 인생을 생각케 하는, 외로움을 일깨우는 밤의 분위기이다. 3연은, 한평생 쓸쓸함을 떼치지 못하는 과거에의 자성(自省)과, 늙마에 차질(蹉跌)을 빚고 있는 현재에의 자련(自憐)이요, 4연은, 지향할 길 없는 미래에의 민회(悶懷)이다.
이 시의 안목은 2연으로, 일찍이 호음에게서 두시(詩)를 배우던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스승의 평생 득의작을 물었더니, 호음은 서슴없이 이 시의 연구인 ‘山木俱鳴風乍起 江聲忽慮月孤懸’을 들더라는 일화가 『성수시화(惺叟詩話)』 35에 실려 있다. 일생의 회심작(會心作)으로 자천(自薦)한 구인 만큼, 이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그 성가(聲價)가 매우 높다.
‘온 산의 나무들이 일시에 떨어 우는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한 떼의 바람이 문득 나를 스쳐 지나간다.’는 전구는 소리의 현장과 작자가 앉아 있는 후대와의 공간적 위치차(位置差) 그리고 풍속ㆍ음속의 시간적 속도차에서 오는, 인과(因果)의 계기(繼起) 현상이다. 인(因)과 과(果)사이에 시차(時差)가 있어, 과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인의 정체를 깨달아 알게되는, 일종의 ‘엉뚱의 멋’마저 곁들여져 있는, 현장감 넘치는 사실(寫實)이다. 낮이었다면 한 비탈의 나무들이 몸을 뒤틀며 모든 잎들이 비늘처럼 허옇게 뒤집혀, 구름 그림자 지나듯 쓸어가는 광경만으로도, 바람의 노정(路程)을 육안으로 역력히 추적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밤이다. 다만 나무들이 왁자하게 떨어 우는 그 소리를 들을 뿐, 이윽고 나를 뒤흔들며 불어가는 일단(一團)의 바람을 겪으면서야 비로소 ‘사목구명(山木俱鳴)’케 한 정체가 바람의 소행이었음을 깨닫게 된 경위이다. 당시는 몰랐던 것, 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인생사 또한 그러하지 않을는지?
‘여울 소리 문득 거세지더니, 달이 외로이 걸려 있다.’의 후구는 심리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인과의 날카로운 기미(機微)의 포착이다. ‘여울 소리가 갑자기 거세게 들린 것’은, 여울 소리의 복수 음파의 파고(波高)가 겹쳐, 이른바 ‘산(山)’을 이룰 때 나타나는 실제적 증폭(增幅) 현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 갑자기 거세짐으로 말미암아, 전신적인 관심이 청각으로만 집중되었던 나머지라,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도외시되었던 시각적인 ‘달’에의 동정적 감정에서 그것이 ‘외롭게’ 보였음직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다음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곧, 한동안 외로움에 젖는 골똘한 침사(沈思)로 말미암아, 의식의 역외(閾外)로 밀려났던 여울 소리가, 침사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회복된 청각적 각성으로, 갑자기 들리게 된 심리적 현상이다. 그리하여 그 한동안 외로움에 젖어 있던 상념 속의 감정이, 시각적 각성에서 다시 비치게 된 ‘달’에게로 이입(移入)된, 미묘한 심리적 계기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다음 연에서 보아 더욱 그 개연성이 짙으니, 곧 지난날의 불미한 일들로 하여 좋지 못한 세평(世評)에 외로이 몰리고 있는 늘그막의 자신이, 스스로 가없게 바라보이는 그러한 눈에 비친 달인지라, 달 또한 외롭게 보였을 듯, 더구나 아득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현(孤懸)’의 달이고 보면, 그것은 만월(滿月)이 아닌 현월(弦月)일 것이며, 그것도 해사하게 야위어 가는 하현(下弦)의 달일시 분명하니, 호망한 우주 공간에 오직 깨어 있는 존재로서, 여기 이 퇴조(退潮)해 가는 늘그막의 ‘나’와, 저기 저 야위어 가는 ‘달’로 이어지는 ‘외로움’의 감정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자연스러움일 뿐이다.
한편, ‘왁자한 바람 소리’나 ‘갑자기 거세진 여울 소리’에는, 변해진 세태 인정, 떠들썩한 세간의 여론 등의 뉘앙스마저 풍겨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의 이백(李白)처럼, 이 속세를 시원스럽게 벗어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길은 없을까 하는 애달픔도 없지 않다.
호음의 이 연구(聯句)에 대해서는 역대의 여러 명가의 평 또한 적지 않았다.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는 『제호시화(霽湖詩話)』 25에서 말했다. “‘木落俱鳴夜雨來’는 간재(簡齋)의 구요, ‘灘聲忽高何處雨’는 오융(吳融)의 구인데, 호음이 이를 원전 무결(圓轉無缺)하게 새로 빚어낸 것이다.”라고……
그러나 보라. 그 인과(因果)하는 방향이 호음의 구와는 순역(順逆)이 바뀌어 있고, 호음의 구에서 가장 매혹적 요소인, ‘인과로 계기(繼起)하는 시차(時差)의 묘(妙)’와 ‘심리적으로 계기하는 인정(人情)의 기미’가 전이자(前二者)에는 결여되어 있으니, 단순한 글자 몇 자의 우합(偶合)으로, 마치 같은 혈통인 양 소자출(所自出)을 따지려는 일은, 부회(附會)의 혐이 없지 않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조석설(潮汐設)을 빌어, 여울 소리가 갑자기 거세짐은 물이 달의 인력으로 끌리게 되어, 밀물로 부풀어 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는데, 그 과학적인 비평 정신은 좋으나, ‘홀려(忽厲)’의 ‘忽(갑자기)’의 현상을 풀 수 없으니, 이 또한 적중한 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봉(芝峰) 이수광은, ‘강물 소리가 홀연히 거세지는 것’과 ‘달이 외로이 걸려 있는 것’과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실이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나무랐는가 하면, 허균(許筠)은 그가 편찬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이를 선입(選入)하면서, 이 시의 이 연은 이 책 중의 압권이라고 절찬했다.
백곡(谷) 김득신(金得臣)은 일찍이 황강역(黃江驛)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밤중에 문득 여울 소리가 몹시 거세게 들려오기에, 문을 열치고 내다보니, 기울어져 가는 달이 외로이 허공에 걸려 있어, 불현듯 호음의 시구가 떠올라, 재탄(再歎) 삼탄(三) 그저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했다.
자하(紫霞)는 그의 『논시절구』에서, 위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江聲忽厲月孤懸 | ‘여울 소리 홀연 거세지더니 |
早許湖陰壓卷篇 | 달이 외로이 걸려 있어’를 |
實踐眞知金柏谷 | 체험으로 실감한 백곡 김득신은 |
黃江一夜不成眠 | 황강의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네. |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257~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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