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17 - 레오 리오니와 박동섭과 황경민
레오 리오니와 박동섭과 황경민
박준규(지지학교 교장)
레오 리오니, 우치다 타츠루, 그리고 황경민 |
그림책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레오 리오니 작가를 아실터. 『으뜸 헤엄이』, 『파랑이와 노랑이』 못지않게 『프레드릭』도 많이 알려졌죠. 귀여운 들쥐 프레드릭은 동료가 땀 흘려 일할 때 노래만 부릅니다. 동료 쥐들이 음식을 부지런히 창고에 모을 때 프레드릭은 시만 읊었어요. 그랬던 프레드릭은 겨울에 동료들이 추워서 밖에 나가지 못할 때 봄나들이 할 때 볼 수 있는 아지랑이와 비온 뒤 펼쳐지는 영롱한 무지개를 노래로 보여줬고 시로 알려줬어요. 프레드릭에 집중하던 동료들은 따뜻함을 느꼈어요.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건 프레드릭 덕분이었고 뭇 쥐들은 감사의 박수를 보냈지요. 『프레드릭』을 본 어른들은 모두 레오 리오니의 팬이 됩니다. 무릎을 치면서.
페친 분들은 우치다 타츠루를 아시는 분이 많지요. 첫 번역책은 아니지만 『하류지향』이 꽤 알려졌습니다. 2012년에 우치다 선생이 내한 강연을 하면서 『하류지향』이 더욱 더 알려져 절판된 책을 민들레에서 재출간하기도 했어요.
제가 우치다 선생님과 부산 해운대 커피빈에서 인터뷰하면서 우치다 책에는 없는 아주 인상적인 말씀을 들었어요.
“일본에서 5,60년대 수많은 반전영화들이 쏟아졌어요.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고, 특히 인류에서 핵은 영원히 폐기해야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그런 영화 제작과 상영이 전쟁 재발방지와 핵무기 포기를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전쟁종식을 위해서 끝없이 외쳐야 합니다. 지쳐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구호로는 한계가 있어요. 예술이 그 역할을 짊어져야 합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이 아프도록 쳤어요.
아마도 제 페친 중에 부산대 근처 헤세이티 카페의 주인장 황경민 시인을 모르는 분이 드물 겁니다. 이분의 입간판 형식의 독특한 시에 여러 차례 무릎을 쳤드랬어요. 덕분에 늘 무릎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는...
레오 리오니의 메시지와 우치다 타츠루의 염원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분이 아닐까요. 시인은 노래도 만들고 부릅니다. 스스로 야매 싱어송라이터라고 합니다만 그건 거친 들판에 핀 꽃을 말합니다. 거름 듬뿍 뿌려진 화분을 거부하고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황 시인의 깊은 뜻은 의로운 사람이라면 알고 있죠.
저는 황 시인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끊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문예창작과 강연의 지속성은 우리 사회 건강 정도를 알리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시와 노래는 거친 들판의 저항입니다.
프레드릭이 없다면 동료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어려운 것처럼 황경민의 입간판과 노래는 압제의 터널을 지나는 유도등으로써 우리가 그 덕을 보고 있지요.
영화에서 보이는 언어의 송수신 게임 법칙 |
지난 23일 저녁에 스케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8시 반 KTX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
2시에 카페 헤세이티에서 있는 박동섭 독립연구가가 진행하는 영화특강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후 4시 이전에 헤세이티를 나와서 부산역으로 잽싸게 달려가 그 비싼 KTX를 타고 서울로 와서 밤 8시 이후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했다. 때문에 정오에 박쌤을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며 필요한 용건도 전달할 요량이었다.
그닥 부산을 직접 갈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게 맞겠다. 하지만 나는 지쳐 있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경험 상 기차 안에서 3시간 가까운 시간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 또한 별도의 욕망을 발산할 수 없도록 하는 공간적 제약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장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생과 밥을 먹는다든지, ‘말랑말랑’한 영화 얘기를 듣는 것도 회복적 휴식이 될 터가 아니겠는가. 서울을 잠시 떠나는 것만으로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한 것이다.
“아빠가 부산에 가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 작품 『안녕하세요』를 분석하는 강의를 듣고 올 건데, 같이 갈래?”
전날 저녁을 먹으며 대학생 딸에게 물었다. 관심이 있을 듯해서.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평론은 차고 넘칠 텐데... 나 내일 정기 세미나 때문에 못 움직여요”
“박동섭 선생님 강의는 다른 측면이 있지. 씨네21 글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빠가 부산까지 가는 거야.”
“암튼 잘 다녀오세요”
딸과 어딘가 동행한 것은 아이가 초5학년 때 2박3일로 둘만의 여행을 한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가고 오는 길에 속내도 들어보고, 내 사정도 말하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뿐만 아니라 『비정성시』, 『호남호녀』 등의 허샤오시엔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해석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대학교수의 글에 실망했던 바, 영화를 해석하는 철학적 작업을 맛보도록 하고 싶었던 동기도 있었다. 어쨌든 헤세이티 딸 동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박쌤은 최근 번역서를 하나 냈다. 일본의 33살 젊은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가 쓴 『수학하는 신체』를 번역했다. 박쌤이 ‘수학’과 별다른 인연이 없을 텐데 하면서 읽었다. 읽으면서 실실 웃게 됐다. “이건 평소 박동섭 선생님 강의 내용이잖아. 설마 번역을 하면서 원문에 없는 얘기를 마음대로 넣어놓은 건 아니겠지” 같은 얘기를 메신저로 박쌤께 보냈더니 답신이 왔다.
“비고츠키가 수학자로 환생했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너무나 매력적인 『수학하는 신체』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를 한국에 데려오는 일을 의논하겠다는 것이 박쌤을 만나는 첫 번째 동기였다. 그리고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지난 달에 출간된 『곤란한 결혼』을 번역한 원고를 드리려고 챙겨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모리타 초청에 대한 구체성이 떨어져서 깊은 얘기가 될 수 없었고, 서울로 복귀하느라 허둥대는 바람에 우치다 타츠루 번역 원고를 전달하지도 못하고 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두 영화 |
정신 없어서라기 보다는 첫 번째 부산행 ‘출장’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박쌤과 비즈니스적인 얘기를 하려고 했던 첫째 목적이 후순위로 밀리고 영화 『안녕하세요』 청강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는 박쌤이 보내준 영화 파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틀 전 밤에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왜 1959년 구닥다리 일본영화를(나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다) 보다가 박쌤은 벌떡 일어났을지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똑같은 행동을 했으니까.
일본영화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두 번 있었다. 밀레니엄이 출발한지 얼마 안 지나서, 시간을 죽여야 하는 일이 있어 DVD방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이 그 중 하나다.
포르노 장르라고 표기된 영화지만 하나도 야하지 않았다. 성기와 음모가 노출되는 장면이 있었음에도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내 나이 혈기왕성할 때다). 요정을 운영하는 부인 덕에 한량으로만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은 점점 섹스에 중독된다.
단 한번 보여준 사내의 쓸쓸함은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의 무기력함이었다. 나에겐 그 한 장면이 너무도 강렬했다. 전장에서 청년들이 가랑잎처럼 스러져 갈 때 중년의 일본인 사내는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 죽음으로 치닫는 섹스에 중독된다(고 나는 해석한다). 중일전쟁에 대한 묘사는 남자가 길에서 피는 담배 연기 뒤로 희미하게 행군하는 제국의 군인을 잠깐 보여주는 것으로 그친다. 탁월함이란 이럴 떄 붙일 수 있겠거니 싶었다.
타인과 몸을 섞지 않아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가 있다. 어떤 전율, 그 전율에 대한 전두엽의 해석이 오르가즘을 구성한다. 남자의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확산하며 표류할 때 전율을 느끼고 전두엽을 통한 오르가즘을 느꼈던 것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 매력을 향유한 첫 경험이다.
또 다른 하나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다. 광화문 교보에 나갔다가 덤핑으로 파는(만원에 3장) DVD를 3만원어치 사왔는데, 그 중 하나였다. 거장이라지만 나는 이름을 몰랐던 구로사와 감독의 1950년 작품이라 보기 전 느낌은 ‘구닥다리’와 한국전쟁‘이었다. 1950 숫자를 보면 자동반응하는 한국전쟁은 체험 없는 강렬한 기억이다. 우리가 원시적인 전쟁으로 몸뚱이가 토막날 때 일본의 영화감독은 인식의 상대성을 다루는 스토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니... 뭐 이런 대위법적인 멀씨 씽킹~
『라쇼몽』은 벌떡 일어난 것과 반대로 영화가 끝나도 일어나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감독과 배우와 내가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하다가 말문이 막힌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정에 문 닫는 도서관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며 밤하늘 별을 본 느낌이랄까, 열심히 공부한 자신을 격려하듯 상쾌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을 하는 내게 감독과 배우가 말을 거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말은 행위다 |
『감각의 제국』이나 『라쇼몽』은 우연히 본 영화였지만 『안녕하세요』는 ‘내가 이 영화를 잘근잘근 씹어줄게’라고 말하는 연구자의 사전예고를 받고 보는 작품이라 좀 긴장이 됐다. 그리고 다른 일본영화와 달리 벌떡 일어나지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박쌤이 거실에서 편하게 누워 감상하다가 영화 시작 얼마 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는 에피소드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느 부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을까를 찾았다. 강의의 핵심이 ‘Speech is Social Action’이었기에, 박쌤은 아마도 영화 시작하고 5분 여쯤 지나서 아역 중 하나인 코우조가 똥을 싼 것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첫 장면에 코우죠가 미션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션 실패의 결과가 똥을 속옷에 지린 것을 알려면 5분 정도 지나야 한다.
『씨네21』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읽을 수 없는 박쌤의 탁월함이 이 지점에 있다. 첫 장면에 아이 네 명이 등굣길에 함께 걸어간다. 젠과 코우죠, 미노루 형제가 그들이다. 젠, 코우죠, 미노루는 검은 교복을 입었고 “This is a cat” 수준의 영어를 배우는 걸로 봐서 중학교 1학년이고 미노루의 동생 이사무는 초등1학년으로 보인다. 젠이 먼저 자신의 이마를 눌러보라고 한다. 미노루가 이마를 누르자 방귀 소리가 난다. 미노루 동생 이사무가 신기해하며 다시 누르자 다시 방귀 소리가 났다. 젠은 “신기하지”하며 의기양양해한다. 이번에 젠이 코우죠의 이마를 누르지만 코우죠에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재차 눌렀을 때 코우죠가 인상을 쓴다. 그리고 코우죠는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나머지 3명만 학교로 향한다. 코우죠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간다. 똥을 지렸기 때문이다.
박쌤은 이 장면을 곧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메타포로 읽은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양자 간에 동시 발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S(Stimulus)-R(Response) 작용 같은 것. 한쪽이 발화하면 그걸 바탕으로 다른 쪽이 응답한다. 한쪽이 이마를 누르는 자극에 이마를 눌린 쪽은 응답을 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을 이 영화는 『안녕하세요』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코우죠는 왜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실물’을 인사의 ‘컨텐츠’로 커뮤니케이션의 장에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방귀’는 ‘방귀’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시니피앙’이다. 다른 것은 모두 현실음이 사용되는 이 영화에서 ‘방귀’소리 만큼은 관악기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중략)
‘방귀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마를 누르면’ ‘소리가 나는’ 응답의 즐거움만이 추구된다. 한쪽은 ‘이마를 누르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방귀로 응답하는 자’라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싫증나지 않는 쾌락을 선사한다. -강의 원고 중
이마를 누르면 의미가 소거된 소리(방귀)로 대답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실물(똥)을 내어놓았기 때문에 코우죠는 벌을 받고 퇴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커뮤니케이션이 정보 소통을 위한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면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일상의 대화는 정보를 실어 나르지 않는다. 내가 확보한 정보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의 반응을 상대방에게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만약에 대화 채널을 통해 정보를 주려고 한다면 대화는 바로 깨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대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코우죠가 실물(박쌤의 표현이 탁월하다)을 내놓음으로써 대화의 장에서 탈락하게 된 것이란 해석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이로써 말이 왜 행위가 되는지 선명해진 것이다.
난 오랫동안 ‘말이 곧 행위’라는 해명에 곤란함을 지니고 있었다. 반은 알 것 같은데 나머지 반은 모르겠다. 문제는 모르는 반의 흐릿함에 있었다. 무엇을 모르겠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답답함과 곤란함의 핵심이다. 행위는 신체가 있어야 가능한데 말의 본질은 공기의 파동일 테니 물리적 작용이 불가능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행위로 풀어 말하는 것은 말이 행위의 메타포가 되거나 행위가 말의 메타포가 된다는 의미일 텐데, 그 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박쌤의 영화특강의 오랜 숙제를 해결해주었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남들이 나의 대박 느낌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함께 답답함과 곤란함을 공유한 세월이 있어야 대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쓰기는 내 대박 느낌을 공유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오지만 읽는 이가 어떤 경로로 내가 대박 느낌을 가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언어가 가진 본질이자 한계다. 즉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없다면 언어도 아니다. 한계가 곧 본질이니까 말이다.
영화 『안녕하세요』와 박쌤의 해설이 비로소 나의 오해를 일깨워줬다. 내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 오해의 실체를 깨달았기에 돈오(頓悟)가 가능하다. ‘悟’가 ‘깨달을 오’인데 心+吾로 이루어졌다. 깨달음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박쌤을 통해서 들은 아포리즘 중에서 ‘안다는 것은 행위의 사후적 정의다’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런데 사후적 정의가 내 마음 속에서 주체적으로 홀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앎의 이전 단계에서 행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행위는 매우 상호적이다.
내 오해는 말을 미디어나 메신저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파동인 물리적 성격의 말이 컨텐츠를 실어 나르는 매개라는 인식은 아주 오래됐다. 이게 오해였다. 말은 미디어지만 컨텐츠를 실어 나르는 것은 아니다. 말이 시니피앙일 뿐이다. 시니피에는 말에 없다. 수신자의 마음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이 시니피에를 직접 실어 나른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오해였다. 컨텐츠를 버린 말만이 행위로서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후적 정의는 수신자만이 홀로 할 수 있다. 발신자가 definition 과정에 개입하려고 할 때 쌍방의 관계는 어긋난다. 부모-자식 관계나 교사-학생 관계에 대입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긋남으로 당황했던가!
쓸데 없는 말들의 향연 |
『안녕하세요』와 박쌤의 강의로 얻은 새로운 깨달음이 또 다른 오해라고 해도 상관없다. 기존의 개념을 갱신하는 과정이 공부이며, 다양한 오해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미노루가 아빠에게 대들며 “어른들이야말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잖아!(41~43분)”라고 할 때 벌떡 일어나게 됐다. 미노루와 미노루 아빠의 대화 속에서 말의 이중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대사는 이러저러한 개념을 관객인 당신에게 주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 저것은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내 마음에서 피어오른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자극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 미노루와 미노루 아빠의 대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내 나름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세월 동안 나의 독서와 고민, 사색이 얽히고설킨 결과다.
얽히고설킨 타래가 없는 생각의 시원은 있을 수 없다. 타래의 패턴은 사람마다 다르니 결국 생각도 다를 것이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또는 지향해야 할 것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경향성이다. 학교가 패턴의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강의를 듣기 전에 영화를 본 것만으로도 ‘쓸데없는’ 말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 행위라는 걸 알게 됐다. 부산으로 달려가 박쌤이 마련한 강의원고를 읽고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생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는’ 말이 정말로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며 시니피에를 고려하지 않는 시니피앙으로서 말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니피에가 없는 시니피앙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기호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AM과 달리 FM라디오는 좌우 스테레오 사운드가 확연하게 들린다. 중파에 담을 수 없던 좌우 스테레오 소리가 초단파 FM에서는 한 번에 투 트랙에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동시에 전달하는 매체라고 생각했었다.
말은 시니피앙을 전달하고 그에 대응하여 수신자의 마음에서 시니피에를 구성한다. 시니피에가 수신자의 마음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수신자에게 이미 구조화된 스키마가 있기 때문이다. 발신자는 말로써 스키마까지 함께 전달할 수 없다.
이마를 누르니 방귀 소리가 난다. 이 상황에서 소리를 듣는 현장의 구성원은 웃게 된다. 결코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이미 알고 있다. 방귀 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즐거워지는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의 근원을 찾아 먼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한편 방귀를 뀌려다가 실수로 실물(?)이 나와 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실물을 커뮤니케이션의 장에 내어 놓은 자를 놀리거나 비웃는다. ‘이마 누르면 방귀 소리 내기’ 게임의 법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코우죠는 진정으로 곤란에 처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관객이 어떤 이의 불행을 즐기는 악마성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기존의 약속과 어긋나는 행위는 약속 당사자 사이에서 곤란함(또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 상황을 높은 시좌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에게 즐거움(또는 경각심)을 선사한다. 같은 시좌에서 타인의 곤란함을 즐거움으로 대하는 자는 악당이다. 시좌가 같을 때는 공감해야 한다. 곤란함을 나눠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높은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 고통스런 일이 천상에서 보면 코메디일 수 있다. 그래서 늘 날갯짓으로 날아올랐다가 먹이를 먹으러 땅으로 내려오는 반복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영화는 이런 메타메세지를 위해 ‘오하요’ 인사말을 내세웠다. “안녕하세요”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얻을 것인가. “날씨가 참 좋네요”도 같다. “어디 가세요?”는 질문이 아니고 “어디 좀 갑니다”도 대답이 아니다. 시니피에가 제거된 방귀 소리 같은 인사말들이 박동섭 선생님은 축복의 메시지라고 말한다.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마음 따뜻해지는 해석이다.
반대로 저주의 메시지가 있을 것인가? 욕을 퍼붓는다면 저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저주의 메시지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축복의 메시지만이 바로 Social Action이고, 그로 인해 우리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저주의 메시지는 커뮤니티를 구성하기는커녕 기존의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Action이기에 지속가능한 언어로 존재할 수 없다. 해체된 커뮤니티에서 더 이상 메시지의 존재유무는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99번 이상의 원소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원소로서 실험실에서 잠깐 존재할 수 있지만 빠르게 붕괴해버리는 존재인 것처럼 사람의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둘 이상이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말을 내뱉고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은 미노루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축복의 격려들이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안녕하세요’ 인사말을 내세웠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코우죠의 실물을 씻어낸 속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인사말은 수신자가 같은 인사말을 반복한다는 원칙이 있다. 전 세계 모든 언어의 공통점이다. 발화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같은 발화를 끌어낸다. 서로 같은 인사말을 반복함으로써 너와 내가 우리가 된다는 확인 의식을 치른다. 그러므로 ‘Speech is social action’이 성립한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서로 다른 영화에서 같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쓴다. 만화가들은 작품마다 서로 다른 캐릭터의 인물이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것과 같다. 일테면 만화가 이현세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 이름이 엄지다.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미노루의 고모는 중요한 배역인데 이름이 ‘세츠코’다.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업는 하라 세츠코의 이름에서 왔을 것이다. 『안녕하세요』에서 하라 세츠코는 출연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인물이 겹친다. 오즈 감독의 대부분 영화에서 활약하는 이가 스기무라 하루코(1909~1997)다. 오즈의 대표작 『동경이야기』에서 큰딸 역할을 맡았던 스기무라는 『안녕하세요』에서 방귀 대신 실물(?)을 내놓은 코우죠의 엄마이자 동네 부녀회장이다. 코우죠 엄마는 이웃에 거의 없는 전기세탁기를 사용한다. 전기세탁기가 코우죠의 똥 싼 속옷을 빠는 것으로 나온다. 철없는 캐릭터이고, 그의 친정 엄마의 입을 통해 진중하지 못한 인물로 묘사된다. 산파일을 하는 드센 친정 엄마는 손자인 코우죠도 제멋대로라고 하며 못마땅해 한다.
르느와르의 작품 |
영화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자주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 마을은 집이 동시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모양과 구조의 집이 구획선에 맞춰 나란히 줄을 섰다. 워낙 가까이 붙어 있어서 이웃집 소리가 다 들릴만하다. 그런데 유독 코우죠 집에서 젠의 집을 바라보는 카메라워크가 있다. 그때 코우죠 집 출입문 왼쪽에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와 크기로 달력이 걸려있다. 달력에는 르느와르의 1895년 작 『The Rambler』가 커다랗게 들어있다. 이 장면이 대여섯 번 나온다.
오즈 감독의 장난기 있지만 세심한 미장센을 고려한다면 달력 속 르느와르의 그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우연한 장치가 아니라는 확신이다. 떠오르는 비슷한 장면이 있다. 영국의 3대 그림동화작가인 찰스 키핑의 『창 너머』의 첫 장면에 해군 복장의 남자 초장화가 장면의 오른쪽에 걸려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다. 키핑의 『창너머』 전체를 조망하고 해군 복장 남자의 초상화를 해석하자면 아이의 아빠일 가능성이 크고(적어도 가족은 분명) 작품이 전쟁과 관련된 것이란 힌트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전기세탁기-코우죠-코우죠 엄마(스기무라 하루코)-코우죠 할머니 직업(산파)-코우죠의 똥 싼 속옷-르느와르 작품을 관통하는 장치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일본을 그리고 있다. 『안녕하세요』는 오즈 감독의 말년 영화다.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모두 전통복장을 입고 있다. 전통복장을 입지 않고 평소 집에서 서양식 잠옷을 입고 있는 부부가 한 동네에 있는데, 결국 이들은 동네가 시끄럽다며 이사를 가버린다. 아이 엄마들은 자기 아이가 신식 젊은 부부 집에 놀러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따라서 르느와르 작품은 특히 프랑스를 좋아하는 일본인 정서를 고려했을 때 서양문물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미장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르느와르의 회화 작품이 고작 달력 그림으로만 소화되는 것이 1950년 대 일본의 일상을 보여준다. 오즈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 고려할 점이다. 그런데 수많은 르느와르 작품 중에 왜 하필 이 그림일까? 고민을 했지만 그건 모르겠다. 오즈 감독이 들으면 웃으며 아무 그림이나 걸었다고 할 수도....
영화에서 달력 그림은 한눈에 르느와르 풍이라는 걸 알겠는데, 르느와르로 검색했을 때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구글이 텍스트 검색어가 아닌 그림을 검색창에 직접 드래그해서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명 이미지 검색이다. 영화 속 장면을 캡처해서 구글에 이미지로 넣었더니 르느와르의 1895년 작이라고 가르쳐준다. 편리한 팁을 알게 됐다.
인용
존 버닝햄 / 앤서니 브라운 /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 레오 리오니와 박동섭과 황경민 /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