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⑤강: 박동섭은 모피어스다
처음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만 해도 넘치는 열정, 그리고 무언가 해보겠다는 결의로 신났었다. 그땐 의지가 굳셌고 기운이 왕성하여 어떤 강의내용일지라도 씹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포와 함께 전장을 달려 어떤 것에도 잡히지 않고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 적토마처럼 바람을 가르며 맘껏 강의시간을 누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고 3강도 채 끝나기도 전에, 가쁜 숨을 내쉬며 급속히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기진맥진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가 강의 내용을 천리마의 날렵함처럼 종횡무진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조랑말의 아둔함에 불과하여 하나하나 써나가기도 버거웠다.
▲ 4월 18일 첫 강의가 있던 날의 모습. 그 땐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근데 얼마 가지 못했다.
강의 내용이 많아요
동섭쌤의 강의는 2시간 동안 쉼 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동섭쌤은 “저번 강의도 노검(녹음의 부산사투리)을 하느라 노검기를 켜놨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노검기를 끄고 시간을 보니 글쎄 1시간 58분이 찍혀 있더라구요”라는 말을 하신 것이다. 어찌 보면 1시간 58분은 꼭 길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강의 도중에 여러 예를 들고 사적인 얘기도 함께 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가기도 하니 말이다. 분명히 2011년에 동섭쌤의 강의를 들었을 땐 그래도 영상을 보여준다던지, 재밌는 예화를 들려준다던지 하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로 주제를 부각시켜줬는데, 이번 강의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녹음기에 1시간 58분이 찍혀 있으면, 정말 1시간 58분 동안 다양한 강의 내용으로 꽉꽉 채웠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모든 강의내용을 잘게 씹어 먹어주겠어’라고 호기롭게 달려들던 마음은 싸그리 사라지고 ‘과연 저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 하지?’하는 걱정만 하게 됐던 것이다.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순식간에 한 대를 얻어맞고 겁에 질려 초라하게 돌아서는 아주 싱거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당연히 소화불량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럴 땐 억지로 게워내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다. 나 또한 많은 강의 내용을 들어서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아 복잡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이해력의 한계를 실감했고, ‘과연 후기를 쓸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 한숨만 나왔다.
▲ 화이트보드를 가득 메운 내용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혼란을 한 아름 안다
그런데 단순히 강의 내용이 많다 적다의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의 내용이 많더라도 오히려 이론적인 것만 얘기하거나, 완전히 생소한 얘기만 할 경우엔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땐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에서 그걸 나의 언어로 정리하여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동섭쌤의 강의는 낯선 것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론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니 말이다. 그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방식’으로 말해주면 그나마 좋을 텐데, 동섭쌤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해주니, 자연히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인재 육성’,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사가 되자’, ‘가치 있는 것만 배운다’,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하다’, ‘학교를 잘 가동시켜 세상을 바꾸자(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의 패러디)’와 같은 말들은 너무도 당연한 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라는 살짝 어이없다는 생각도 든다.
▲ '학교가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라는 준규쌤의 말과 동섭쌤 강의는 공명한다.
하지만 동섭쌤의 강의를 듣다 보면, 분명히 그런 말들의 기본전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건 좋은 말로 하면 ‘앎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나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기반 자체가 허물어진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네가 노예란 진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라고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이 디자인된 세상인 매트릭스임을 알려준다. 그러고 나서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명심해! 난 진실만을 제안한다!”고 말하며 선택하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동섭쌤의 강의는 꼭 모피어스의 속삭임 같은 느낌이었다. “네가 일상과 당연의 노예란 사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상과 당연에 갇힌 감옥에서 태어났지”라고 내가 놓인 상황을 알려준다. 그 후에 역시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건빵 니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 강의를 들으면 일상이 무너진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명심해! 난 트위스트(일상적인 말을 하다가 지평을 달리하며 그 일상을 관조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을 말한다”는 말로 결단을 요구한다.
▲ 파란약이냐, 빨간약이냐? 강의를 듣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난 모든 게 이미 디자인된 세상에서 태어나 그 디자인대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했고, 그에 따라 일상적인 말들을 되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생각이 바뀔 만한 기회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동섭쌤의 강의를 들으며 일상이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니 여태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충격에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였으며, 극단적인 거부감까지 들기도 했다. 즉, 하나를 알았을 뿐인데, 그로 인해 지금껏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새로운 물음이 뒤따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섰다 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항상 조심하라!”라는 성경구절처럼 천리마인 줄만 알았던 나는 조랑말에 불과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처음의 강단 있는 태도, 심지어 돌마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것 같던 결기는 어느새 흐리멍덩해지고, 자신에 대한 한없는 자책에 빠져들었다.
▲ 5번의 강의 중 3번은 날씨가 흐렸다. 그래도 마지막 강의는 날씨가 맑으니 다행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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