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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1부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②: 봉건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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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1부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②: 봉건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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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사회가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영토를 나누어주고 지배권을 부여했다. 물론 철저한 감시가 따르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무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은나라 잔존 세력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의 기원이다중국식 봉건제는 중세 유럽의 서양식 봉건제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성격에서는 크게 다르다. 서양에서는 상급 군주가 하급 군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넘겨준 데 반해, 중국에서는 오로지 최고 지배자만이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적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천하의 단독 주인, 즉 황제만이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권자였다. 차이는 중앙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서양에서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강력한 중앙 권력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후대에 두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게 된다.

 

무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게 되는데, 그의 통치 시기에 주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형이 다스리던 시대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주공은 아예 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은나라는 존속 기간이 길었어도 수백 개의 씨족국가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한 나라였을 뿐 특별히 중심지라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평상시에 그들에게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의 군사를 동원할 뿐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주나라는 공식적으로 중원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주변의 나라들을 휘하에 거느리고자 했다.

 

흔히 서양 중세 영주들의 작위를 공작ㆍ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 등으로 구분하는데, 원래 이 5관등의 작위는 주나라 시대에 성립된 것이다. 주나라 왕실은 주변 제후국들에 다양한 작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자치에 맡겨두었지만,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나라 왕실을 방문해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공(朝貢)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공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주요한 외교(때로는 무역)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보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제법 합리적이고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제도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은나라가 망한 이유는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나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동쪽 변방에 있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갑골문에 나와 있는 은나라의 국가 행사들은 대부분이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은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은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주나라는 주변 약소국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했다. 그런데 드넓은 중원 일대를 주나라 혼자만의 힘으로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각 지역마다 일일이 주나라 군대를 파견하거나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였던 것이다.

 

 

▲ ‘중국형’ 인물도. 왼쪽부터 주나라 건국의 핵심 인물들인 문왕, 무왕, 주공의 초상이다. 보다시피 앞서 본 황제의 모습과 거의 닮은 얼굴이다. 이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초상도 대개 비슷하다. 중국인의 영원한 고향인 주나라는 인물에서도 중국인의 전형적인 표준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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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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