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더 나은 후보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결격사유가 가장 크고 가장 권력욕에 찌든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조금만 더 역사 의식을 갖추었거나, 조금만 더 권력욕이 덜한 인물들이 집권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과 김일성이 대권후보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즉각 분단화 작업이 시작된다. 하기야, 혹시라도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그들의 권력은 보장받을 수 없을 테니 그들로서는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때마침 민족적인 과제로 부상한 남북협상을 그들이 내심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주둔군이 투입되고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이 부상하자 오히려 이를 먼저 걱정한 것은 UN이다. 물론 UN이 일개 약소 민족의 분단에 신경을 쓸 리는 없었으니, 그것은 단지 전후 세계 질서의 두 축이 될 미국과 소련의 두 강대국이 장차 한반도를 무대로 삼아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어느 측도 한반도를 포기할 의사는 전혀 없었으므로 UN의 우려는 정확했으나 쓸데없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던 UN은 1948년 1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해서 한반도에 파견한다. 이들의 목적은 갈라설 조짐을 보이는 남한과 북한에서 통일선거를 실시하여 분단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UN을 소련과 북한이 환영할 리 없다. 결국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입국 자체를 거부당함으로써 UN에 의한 분단 극복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북한이 먼저 통일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면 그 다음은 남한이다.
김일성의 속내도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이승만은 그보다 더 집요하게 통일을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정파와 단체들이 저마다 따로 놀던 상황을 이제 간신히 다잡아놓았는데 통일이 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식으로 집권할 기회도 자칫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 참에 북한이 UN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이승만에게 하늘이 준 절호의 찬스가 된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것을 빌미삼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구성하자고 부르짖는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아마 김일성은 이승만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에 마음 속으로 무척 반가워했음 직하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마음은 착잡하고 초조하다【그들과 답답한 심정을 함께 나눌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되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그는 1946년 초부터 김규식, 허헌 등과 함께 좌우 합작을 도모했으며, 여기서 성과를 얻어 미 군정청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아마 남북 분단도 극복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여운형은 평양에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났으나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이때 이미 김일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합작이 아니면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온건 좌파로 세력을 재편하고 계속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가 한지근이라는 자에게 암살당했는데, 범인은 이승만 계열의 똘마니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미 군정청까지 동의한 좌우 합작을 이승만과 김일성이 모두 거부함으로써 비극적인 죽음까지 맞았으니 여운형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원래 될성부른 떡잎은 늘 반대파에 의해 제거되는 게 우리 역사였으니 그의 죽음도 이제 낯설지 않다)】.
다급한 마음에 그들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보내지만 답장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다. 결국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추진한다는 결정이 표결로 통과되면서 남북 분단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북한이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 다음 달에 북한은 방송과 서신을 통해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연석회의를 갖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회의 개최 장소를 평양으로 일방적으로 정한 데다 초대장은 김구와 김규식 등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정파에게만 보내왔으니 속셈은 뻔하다. 그래도 4월에 열린 회의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1887~1958) 등 남한 지도자들이 참가했으나 정작으로 분단 극복에 관한 사항은 아무것도 논의되지 못했다(논의되었더라도 남한의 실세가 빠진 상태에서는 무의미했겠지만).
결국 남북협상은 오히려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집권의 기회만을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뿐이다. 이승만은 이미 단독 선거 방침을 확보했으니 남북협상파를 탄압할 구실을 얻었고, 김일성은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얻었다(이후에도 계속 통일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육군 장교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는데, 이것 역시 이승만 일파의 공작임이 분명하다).
▲ 합작의 좌절 비록 김일성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깔아놓은 멍석이라지만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던 김구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이다. 그러나 칠십 줄에 들어선 원로 정객의 소망과는 달리 합작은 좌절되었고, 더욱이 이듬해에 김구는 암살되고 말았다.
이제 거칠 게 아무것도 없어진 이승만과 김일성은 집권을 향한 탄탄대로에 들어선다. 이승만은 곧바로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해서 제헌국회를 구성했으며, 7월 17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발표했고, 8월 15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더 꿈에 그리던 대통령이 되었다【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이 된 셈인데, 아마 임시정부 시절은 그로서도 잊고 싶은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헌법 전문(前文)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 채택된 제1공화국의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전문의 내용을 보면,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라고 되어 있는데, 3ㆍ1운동과 대한민국 건립이 그냥 직결되고 임시정부는 살짝 빠져 있다. 하긴, 임시정부와의 악연을 생각하면, 아무리 ‘대통령병’이 심각했던 이승만도 임시정부의 대통령 기억만은 되살리고 싶지 않았을 게다】.
김일성의 작업은 몇 개월의 시차와 명칭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승만의 작업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행여 남한에 뒤질세라 그는 8월 25일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남한의 5ㆍ10총선거)를 실시하고, 9월 2일 최고인민회의(남한의 제헌국회)를 구성했으며, 9월 9일 드디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수상(남한의 대통령)이 되어 꿈을 이룬다. 남한과 북한의 지루하고 유치한 체제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두 체제는 곧이어 토지개혁을 놓고 경쟁을 벌이다 급기야 한반도 역사상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을 일으키면서 경쟁을 전쟁으로 전화시킨다).
다만 일찌감치 정적을 모두 제거한 이승만에 비해 김일성은 그럴 만한 계기가 없었던 탓에 북한에서는 독재 정권의 수립이 다소 늦어지게 된다. 1950년에 도발한 한국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그 책임을 구실 삼아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 세력을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처형했고, 전후에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파 세력이 자신의 독재권력에 반대하자 가차없이 숙청해 버렸던 것이다(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무정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에 명령 불이행죄로 숙청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때였다. 비록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주체적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한반도를 장악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국내 정치에 관해 처음부터 일관적인 방침이라 할 만한 게 없었으므로 국내의 정치 세력들이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분단으로 향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민족분단을 순전히 강대국 논리에 의한 강제적인 결과로만 보는 입장은 잘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이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분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전개 과정을 단순히 인물로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역시 리더가 중요하게 마련이다. 남한과 북한은 아무런 정통성도 없는, 게다가 자질에서도 문제가 많은 자들을 리더로 선택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파멸을 부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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