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택적인 기억과 왜곡된 진보
기억은 선택적이다
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실제 내 삶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내게 유리한 것들로만 구성되는 기억의 게슈탈트다. (중략) 이러한 기억의 선택적 구성을 통해 자기 아이덴티티가 성립된다. 자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나’다. -『일본열광』, 105쪽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고 그걸 이야기 한다고 해보자. 과연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객관적일까? 얼마나 사실 그대로에 근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런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외부의 사건을 우리의 시신경을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느낌이 오는 건 아니다. 그걸 걸러내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뇌를 통해 어떤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들은 흐릿한 배경으로 처리되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데 반해, 어떤 사실은 나의 관념까지 덧씌워져 확실한 이미지로 남는다. 위에 인용해 놓은 구절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쩌면 사실에 접근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오류투성이인지도 모른다. 사실에 접근하려 하면 할수록 진실은 저 멀리 나를 비웃듯 멀어질 것이니까. 그런 꼬이고 꼬인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라생문羅生門’이 그것이다.
라생문(라쇼몽)이란 제목 자체가 생이 그물처럼 꼬이고 꼬였다는 걸 표현해 놓은 걸 거다. 그 생의 진실을 알려고 그 꼬인 것을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무라이와 아내가 길을 가다가 도둑의 침입을 받아 아내는 겁탈당하고 사무라이는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사건을 보고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빼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건을 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려할수록 꼬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사람 수만큼 진리는 존재한다.’ 이 말이 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라는 말이 제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진보’라는 말의 함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진리가 정말로 있는 줄 알았다. 어느 하나로 귀결되어 갈 수 있는 절대선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근대화를 이룬 지금 전근대화란 명칭으로 표현되는 조선 시대 이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진보하였으니, 그때를 비판하는 것을 옳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부터 살펴보았듯이 진보란 말은 어색하다. 그건 하나의 절대선이 있어 거기에 조금씩 다가간다는 것인데, 애초에 그런 절대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근접한 사물을 보는 능력을 발달시켜 현재와 같은 물질문명을 이뤘다 하더라도 그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만큼 자연과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으며 원거리의 사물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은 퇴화되었으니까. 진보와 퇴화, 고로 인간의 진보는 어느 한 면에서만 판단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들이대며 현재를 개선해야 한다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의 불행쯤은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속내를 의심해보아야 하는 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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