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2부, 1장 사건스케치

건방진방랑자 2021. 7. 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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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17921019일 정조는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과 대사성(大司成)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寶庫)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다. 중국판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 성인의 말씀과 역사에 대한 기념비적 기록들을 감히 누워서 보다니! 말하자면 이 경우에 내용이 아니라, ‘북 스타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두 케이스를 종합하면 정조의 문장관이 한눈에 집약된다. ‘클래식에 속하는 책을 엄숙한 자세로 읽으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그런 스타일의 글이 써질 것이라는 것. 독서와 문체란 이렇듯 신체의 규율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정조만이 아니라, 중세적 지식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전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정조가 꽤나 과격하게 보이는 정책을 공표한 이유는 그러한 배치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걸 뜻하는 셈인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정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명청(明淸) 이래의 문장은 험괴(險怪)하고 첨산(尖酸)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홍재전서161, 일득록1, 문학1

明淸以來, 文章多險怪尖酸, 予不欲觀. 今人好看明淸人文集, 不知何所味也. 豈亦有味, 而予不能味之耶?

 

 

1784년의 기록이다. 이 단순한 언급에는 절대 단순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명청의 문집은 험괴하고 첨산하다. 근데 그런 문집들이 유행하고 있다. 왜 그런 걸 재미있게 읽는 걸까? 이건 사실 단순한 지시형 의문문이 아니다. ‘지존의 위치에 있는 이가 재미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명령어. 하지만 혹 내가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일말의 의구심을 남겨둔 건 아직 공권력 차원의 검열까지는 유보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이후 정조와 명청문집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다소 엉뚱해 보이는 사건이 개입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된다. 1785년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 남인의 자제들이 중인(中人)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고 의식을 거행하다가 형조의 금리(禁吏)에게 적발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름하여 추조(형조) 적발 사건’, 서학이 학문이 아니라, 명백히 신앙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정조는 이 사건을 축소하여 덮어주는 대신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중국으로부터 서적이 유입되면서 사교가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화풀이를 엉뚱하게 명청문집에다 하다니. 사고는 남인(南人)이 쳤는데 불똥은 노론(老論) 문장가들에게 튄 셈이다.

 

사실 명청문집의 유행과 서학의 유포는 정조시대의 두 가지 뇌관이었다. 전자가 주로 연암그룹 및 노론 경화사족과 관련된 반면, 후자는 다산이 속한 남인 경화사족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정조는 일관되게 후자를 비호하는 한편, 전자에 대해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였다.

 

 

 

 

문체 전향서

 

 

그러던 중 급기야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신앙의 강도가 한층 고조된 것이다. 두 장본인을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불사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때문일까? 이번에도 명청문집을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회적인 엄포로 넘어가지 않았다. 1019일 서곡이 울린 이후 문체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권력의 한복판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이 시기를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반정의 총지휘자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정조실록161019

泮試試券, 若有一涉於稗官雜記者, 雖滿篇珠玉, 黜置下考, 仍坼其名而停擧, 無所容貸.

 

 

첫 번째 희생타로 이옥(李鈺)과 남공철이 먼저 걸려들었다. 심각한 국면이긴 하지만, 농담 한 마디. 이옥은 여성이 아니다. 문무자(文無子)라는 좀 썰렁한 호를 가진 어엿한 남성이다. 이름이 하도 아리따운 데다, 지명도가 낮아 가끔 황진이랑 비슷한 기생 출신이거나 조선 후기에 배출된 뛰어난 여성 문인인가보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어 하는 말이다. 하긴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 틀림없지만, 글을 보면 혹시 여자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성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여성보다 더 여성적 비련과 애수를 잘 드러낸, 아주 특이한 작가이다.

 

그러니 그의 글이 정조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옥의 감수성이야말로 정조를 분노하게 했던 난세번촉지성(亂世煩促之聲)’,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 그가 처음 받은 벌은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짓는 것. 매 맞는 거나 유배를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문인들에게 있어 체질에 맞지 않는 글을 대량으로 써야 하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도 없다. 이후 이옥의 궤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벌을 통해 문체를 완전히 고쳤음이 보증되어야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니,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전향서 비슷한 걸 요구했던 셈이다.

 

이옥(李鈺)은 한낱 새파란 유생이었던 데 비해, 남공철은 정조의 스승 남유용의 아들이자 고위관료였다. 그에게는 반성하기 전에는 경연(經筵)에 나오지 말라는 조처가 내려졌다.

 

그 다음에 걸려든 인물이 이상황(李相璜)과 김조순(金祖淳)인데, 이들의 경우는 약간 코믹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인 1787, 두 사람은 예문관에서 숙직하면서 당송시대의 소설을 보다가 발각되어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소설에 빠진 인물들로 분류된 것이다. 실제로 이상황은 밥 먹을 때에도, 측간에 가서도 소설을 손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소설광이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마니아인 셈이다. 그런 처지니 마침내 근무를 하면서도 소설을 보다 국왕에게 들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소설은 이미 그 이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금수령(禁輸令)이 내려진 바 있다. 하지만 금기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몸은 더 달아오르는 법. 소설은 사라지기는 커녕, 이렇게 고위관료들에게까지 퍼저 나갔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춰내 죄를 묻는 건 이런 말폐가 여전히 차단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 다 반성문을 써올리라는 조처가 내려졌다.

 

이러한 조치와 함께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전교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선비들이 모이는 곳에 죄과를 쓴 판자를 매달아 둘 것,

심한 자는 북을 치며 성토하게 할 것,

더 심한 자는 매를 치고 사실을 기록하여 괄목할 만한 실효가 있도록 할 것

 

을 지시하고,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대과(大科) 및 소과(小科)의 과거 규정에 기록해둘 것을 예조에 명령했다. 아예 과거에 입문하기 전 유생 시절부터 단단히 길들이겠다고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의 이런 공세적 조처에 대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가 올려졌다. 소론 출신인 그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남인의 서학까지 문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과 이가환(李家煥)을 겨냥하면서, 남인들의 학문 또한 대부분 이단사설이고 문장 역시 패사소품을 숭상할 뿐이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정조는 이가환이 초아의 신세로 불쌍하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감싸주면서 이동직의 상소를 기각했다.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다.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등 소품의 명인들도 당연히 이 그물망에 걸려들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서얼이다. 다시 말해 권부(權府)의 수뇌들이 아닌 것이다.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는 정도로 그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정조시대의 첨예한 쟁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는 프리즘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희생양은 뭐니뭐니해도 이옥(李鈺)이다(이옥에 대해서는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를 참조할 것), 이옥은 사대부에 속하긴 하나, 당파도 정확히 분류되지 않을 정도로 가문이 미미했다. 당연히 과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비빌 언덕이 없는 처지였다. 벌을 받은 이후에도 거듭 트라이를 해보았지만, 계속 문체가 불온하다고 찍힌다. 성적은 우수하나 불량끼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기어이 충군(充軍), 즉 군복무에 처해지는 벌을 받아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제 버릇 남 못 줘서영영 과거에 입문하지 못한다.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인해 그야말로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는 반성문을 쓰거나 문체적 전향(?)을 표명한 덕분에, 대부분 영달(榮達)의 코스를 밟는다. 정조가 개전(改悛)의 정이 뚜렷한 인물들에게는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는 노회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변절자들이 한술 더 뜬다고 문체반정 때 요주의 대상이었던 인물들이 이후에는 소품이나 소설에 대해 맹공을 퍼붓는 장면이 속출하기도 한다.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렇듯 문체반정이 피 튀기는 정쟁은 아니었으나, 그 파장은 가혹했다. 정조시대 이후 새로운 문체적 실험이 완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지성사적 측면에선 암흑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황랑하기 그지없다. 피를 흘리지도, 경제적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건만 지식인들은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를 길들여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연암은 이 사건의 어디쯤에 있었던가? 그는 당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지도 않았고, 이후에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핵심배후로 지목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미스터리에 접근하기 전에 체크해야 할 사항 두서너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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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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