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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정조의 딜레마②: 문체반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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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정조의 딜레마②: 문체반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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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딜레마

 

 

대형사고를 면하고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을 대하는 정조(正祖)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그리스도교마저 용인할 수는 없다(사실 그리스도교야말로 서학 중의 서학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학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그의 개혁론은 처음부터 모순이었던 셈이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학 이념에 기초한 왕국이지 당시 유럽에 즐비한 서학 왕국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개혁의 대세였던 북학을 위축시키고 육경학을 권장하는 방법이다.

 

성리학은 왕권보다 신권을 강조하고, 서학은 국가의 정체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개혁의 목표인 올바른 유교왕국을 건설하려면 성리학과 서학을 모두 배척할 수밖에 없다. 마침 성리학은 야당으로 물러앉았으니 이제 서학만 다스리면 된다. 1794년에 정조(正祖)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얄궂은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그런 의도에서다. 문체반정이라면 문체를 바로잡자는 뜻일 텐데, 갑자기 무슨 학술 운동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북학의 분위기에서 당시 베스트셀러로서 널리 읽혔던 책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었다. 이 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지원(朴趾源)이 베이징에서 보고 접한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기행문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동감 있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어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북학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문체반정의 주요 타깃이 된 것은 바로 이 책이다. 단지 북학을 소개한다는 내용을 문제삼을 수는 없으므로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하다는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압력을 못 견딘 박지원은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고, 규장각(奎章閣)의 실세이자 개혁의 주체였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도 문체의 문제점이 적발되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는 저속한 문체를 쓰는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조정 대신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으면 승진을 시키지 않겠노라고 을러댔다. 나아가 그는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패관(稗官)류의 잡서들에 대해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말뜻 그대로 보면 패관이란 정식 관리(학자)가 아닌 자를 뜻하는데, 이 말은 중국 고대 한나라의 역사가인 반고(班固, 32 ~ 92)가 처음 쓴 용어다. 그는 정식 학자가 아닌 사람이 멋대로 글을 짓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를 경멸했다. 그는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패관이 지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전통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20세기 전반기까지도 시만이 문학으로 인정되고 소설은 언제나 잡글로 취급되었다. 패관문학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국문학자 김태준이 쓴 조선문학사에서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의 문집들, 이를테면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이나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등을 패관문학으로 꼽았다. 그렇게 보수적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김태준이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점은 의외다. 물론 진짜 의도는 더 이상 청나라의 북학 관련 문헌들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데 있다.

 

사실 그동안 북학이 용인되어 왔던 이유는 학문적으로 정조(正祖)의 성향이 노론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 먼 탓도 있었다. 하긴, 왕권을 강화해서 새 왕국을 건설하려는 왕이 중국의 천자 아래 모든 사대부(士大夫)들이 같은 지위라고 주장하는 성리학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성리학을 멀리 한다고 해서 유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조가 좋아할 만한 유학의 갈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유학, 즉 육경학인데, 이것은 왕권을 신권보다 우위에 두는 사상일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는 남인의 이데올로기다. 결국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꾀한 것은 육경학의 학풍으로 되돌아가고 남인을 끌어들여 노론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이는 노론의 준동을 예방한다는 장용영(壯勇營)의 취지와도 부합된다).

 

과연 북학파의 저속한 문체를 바로잡게 한 뒤 정조(正祖)는 순정고문(正古文), 즉 옛날의 순수한 한문체를 널리 확산시키라는 명을 규장각(奎章閣)에 내린다. 물론 단순한 문체의 보수화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실학을 포기하는 순간이며, 정치적으로는 개혁의 총기획자가 복고로 선회하는 순간이다.

 

 

 최초의 성서 1900년에 간행된 한반도 최초의 신약성서다. 그리스도교는 정조(正祖)의 시대에 처음 들어왔고 정약종 등에 의해 성서의 일부가 번역되었으나 당시까지는 4대 복음서밖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천주실의와 복음서만으로 새 종교가 뿌리를 내린 셈이니, 이미 조선에 기복신앙이 만연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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