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7부 열매② -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혁명의 러시아
혁명의 러시아
1918년 4월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전후 연합국이 러시아에 거의 전범처럼 취급하고 특히 가혹하게 나온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그전까지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것은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고, 전선에서 철수한 것은 새로 생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니 이렇게 본다면 러시아는 ‘배신자’도 아닌 셈이었다.
국가의 위상으로 따진다면 러시아는 전쟁에서 연합국이 아니라 동맹국 측이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선진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서유럽 국가도 아닌, 후발 제국주의 국가에다 슬라브족의 전형적인 동유럽 국가였으니까(게다가 아프리카에 식민지도 없었다). 그랬기에 러시아는 그 이전까지 수백 년 동안 영국, 프랑스와 항상 거리를 두었고 더 가까운 독일, 오스트리아와 교류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협상으로 서유럽 세계와 동맹을 맺는 ‘부자연스런’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순전히 차르 정부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이미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1868~1918, 재위 1894~1917)는 전대로부터 이어지던 차리즘으로 국내 정치를 탄압했으나, 서구에서 탄생한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 오히려 더욱 성장했고, 1898년에는 정식 정당까지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이름은 사회민주 노동당이었지만 사실상 최초의 공산당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공산당 선언』이 나온 지 50년 만에 드디어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의 정당으로 탄생한 것이다. 차르 정부에 의해 곧 불법화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공산당은 계속 존속하면서 세력을 키웠으며, 유럽의 공산주의 조직들과 연계해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했다.
물론 니콜라이가 러시아의 문제를 몰랐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하루빨리 러시아를 명실상부한 열강의 반열에 올리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차리즘 전제에 의존해서라도 국내의 정치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내외의 상황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의 도전으로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 흔들리는 차리즘 차리즘이라는 혹독한 전제 체제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탓일까? 서유럽의 지식인들과 달리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자유주의를 넘어선 것을 원했다. 사진은 피의 일요일 사태 이후 황제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하고 나선 혁명적 민중의 모습이다(오른편에 한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니콜라이의 초상이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차르에게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니콜라이가 이 요구를 거부한 것은 제국을 유지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일본은 이미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만주에서 육군이 연패하고 황해에서 해군이 궤멸당하는 지경에까지 간 뒤에야 차르 정부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바로 그때 ‘피의 일요일’ 사태가 터졌다.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으로는 1월 9일)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5만 명의 수많은 군중이 차르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해 운집했다.
멀리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판에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그런 소요 사태를 차르 정부가 반가워할 리는 없었다. 친위대는 궁전으로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사망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이후 수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나라 밖보다 안이 급해진 니콜라이는 일본에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양도하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사실 일본의 승리는 아슬아슬했다. 전투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아직 토대가 취약한 일본의 국력으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감당할 수 없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러시아는 두드려 맞으면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일본은 거의 전 국민이 생업을 중단한 채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치고 전쟁 비용이 고갈되어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피의 일요일’은 결국 일본에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불행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한반도를 합병했다】 국민들에게는 의회의 창설을 약속해 간신히 사태를 무마했다.
그런데 위기를 넘기자 차르는 다시 반동으로 돌아섰다. 시대의 추세를 전혀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의회를 구성하고 농업 개혁을 하는 등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개혁 조치를 시행했으나, 문제는 혁명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차르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1912년의 당 대회에서는 볼셰비키 급진파가 확실히 당을 장악하면서 레닌(V. I. Lenin, 1870~1924)이라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를 탄생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차르 정부에 크나큰 고통이었다. 발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만 저지하면 될 줄 알았던 정부는 전쟁이 장기화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재정은 곤두박질쳤고, 전쟁 동원령으로 식량마저 부족해진 민중은 분노했다. 전쟁의 터널이 아직 끝을 보이지 않고 있던 1917년 2월에 마침내 그 분노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페트로그라드(제1차 세계대전 중에 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12년 전처럼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으나 이제는 군대마저도 한 몸이 아니었다. 군대의 발포는 오히려 다른 병사들의 분노를 불러 ‘무장한 시위대’를 만들어냈다.
불과 한 달 만에 시위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니콜라이는 제위를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미하일도 쥐약을 먹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결국 로마노프 왕조가 300년 만에 문을 닫았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이 사라지고 공화국이 새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1910년대는 ‘제국이 소멸하는 시대’였다. 1911년에는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청 제국이 무너졌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래 2000여 년에 달하는 중국의 제국사가 끝난 것이다. 러시아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의 세 제국도 제국의 명패를 내렸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제국 체제는 공교롭게도 모두 1910년 대에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도 서유럽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 늙은 공룡의 자만 10년 전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무릎 꿇린 일본이었지만 러일전쟁을 일으킬 당시 국제 여론은 일본이 이기기 힘든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탓에 유럽에서 ‘명예로운 고립’을 유지하면서 유일하게 아시아의 일본과 동맹(영일동맹)을 맺은 영국도 일본을 군사적으로 돕지는 않았다. 그림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일본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러시아 측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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