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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자구책Ⅰ(양무운동,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무술변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자구책Ⅰ(양무운동,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무술변법)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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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구책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태평천국 세력은 청의 뒤를 이어 중국에 다시 한족 왕조를 세울 가능성이 컸다. 역대 왕조들의 흥망을 고려해볼 때에도 그게 순리(順理)’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역사의 순리를 간단히 거스른 서구 열강의 힘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태평천국군은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발언권을 얻게 된 증국번(曾國審, 1811~18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 유력 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편전쟁 때도 서구의 무력을 실감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의 입장이었으므로 바로 곁에서 똑똑히 본 터였다.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서양식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그 결과 상하이, 푸저우 등지에 조선소와 병기 공장이 세워지고 총포와 탄약, 기선 등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중국 최초로 근대적 중공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약 30년 동안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광산업과 조선업 등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와 군사 제도를 본받는 데서 더 나아가 유능한 인재를 서구에 보내 군사학과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는 등 다양한 자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긴박하게 돌아가는 19세기 후반의 국제 상황은 중국이 마냥 근대화와 자강에 몰두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러시아가 신장 지방을 침식해 들어왔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는 등 서구 열강에 밀려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또 아시아의 소국이었던 일본마저 1868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순식간에 국력을 키워 대만을 침략하고 조선에 진출했다. 게다가 양무운동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서구처럼 자본주의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산업을 국가 중심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 문제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명칭에 붙은 두 나라와 무관하게 한반도의 조선이 전장이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병기로 일어서자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난징에 세워진 병기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다. 양무운동은 최초로 서양의 것을 본받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주체인 이홍장, 증국번, 좌종당이 모두 한인 군벌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여기에도 청 조정을 불신하는 반청 의식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났다. 반란이라 해도 제 나라 백성들이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제 힘으로 무마할 수도, 진압할 수도 없었던 조선 정부는 상국인 청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청은 톈진조약(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과 달리 1885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묶여 있어 조선에 파병하려면 먼저 일본 측에 통보해야 했으나 이홍장은 통보를 생략하고 즉시 병력을 보냈다. 그렇잖아도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 그것은 군대를 보낼 좋은 구실이었다전통적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있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다기보다는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의 명성황후 정권도 마치 중앙 정부에 관군을 요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청에 군대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본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1897년 조선이 친러파의 책동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도 일본이 바라던 바였다. 조선을 차지하려면 먼저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떼어내야 하는데, 조선 정부가 앞장서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청과 조선 정부의 행동은 마치 일본을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것과 같았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맞부딪혔으니 서로 간의 전쟁을 꾀한 게 아니었다 해도 대결이 불가피했다. 마침 청으로서는 30년간 양무운동의 성과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고,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300년 만에 중국과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더구나 무대는 두 나라의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반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청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 심지어 일본 내에서조차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다. 비록 서구 열강 앞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청은 전통의 강국인 데다 30년간의 양무운동으로 힘이 붙지 않았던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속성 근대화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일본으로서는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일본은 이홍장이 직접 30년간 조련한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했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까지 진출해 중국 본토까지 노렸다. 놀란 청 조정은 급히 화의를 신청했다. 전쟁은 볼품없이 끝났고, 1895년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전패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 배상금만 모았어도 근대화의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편전쟁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나 이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도 졌다. 한없이 초라해진 중국을 서구 열강은 다시 거세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다 이번에는 독일도 열심히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열강은 중국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양무운동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던 중공업은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집 안 수공업으로 운영되던 전통의 공업도 서구 상품의 물결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을 물 능력이 없어 차관을 도입한 것은 서구 자본이 무차별적으로 영입되는 결과를 빚었다.

 

특히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 영토를 열강이 분할하자고 주장했다. 다행히 중국 민중이 반발하고 열강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나 중국인들은 이제 영토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젖었다독일은 중세 내내 신성 로마 제국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근대 국가로의 출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풍부한 식민지들이 다른 열강에 의해 분할된 이후에야 비로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분할하는 데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열강도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수천 년간의 강력한 역사와 문명을 꾸려온 데다 영토가 넓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중국은 거리상으로도 유럽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열강은 보수적이고 무능한 서태후 정권을 온존시키고 그 대신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내고자 했다.

 

 

침몰하는 청 제국 30년의 조련도 무색하게 청나라 해군은 개전 직후부터 몰락했다. 그림은 침몰하는 청 제국의 군함인데 영국에서 빌린 함선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양무운동과는 다른 뭔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군수 산업만 육성한다고 해서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둥 지방의 지식인이었던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는 하루빨리 변법(變法, 개혁)하지 않으면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주장은 양무운동과 같았으나 캉유웨이의 변법은 그와 달랐다. 그는 서양의 무기나 제도와 같은 게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를 도입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입이 아니라 중국적인 중심을 튼튼히 마련한 조건에서 서양의 것을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서양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공자(孔子)가 있다. 그는 공자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였다고 주장하면서 유교를 역동적인 사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캉유웨이의 주장은 마침내 젊은 황제 광서제(光緖帝, 1871~1908)를 움직였다. 황제의 적극 지원으로 캉유웨이는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다. 개혁 세력은 민간이 주도하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추진하는 한편, 정치제도, 과거제(科擧制), 관제와 법제, 군사 제도, 교육제도 등 거의 모든 제도를 뜯어고치고, 화폐를 통일하고, 철도를 부설하고, 특허제를 도입하는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의 역사에서도 기존의 지배층이 급진적인 개혁을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지배층 가운데 개혁의 지지자는 광서제 한 사람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는 실권자인 큰어머니 서태후(西太后, 1835~1908)에게 밀려 권력에서 소외된 상태였다. 특히 군사권이 없는 게 문제였다. 개혁이 실시된 지 100여 일 만에 서태후가 이끄는 보수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개혁파를 체포했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은 서로 초점은 달랐으나 둘 다 서양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실효가 없음이 입증되었고, 무술변법은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쳤음이 드러났다. 서양의 것을 본받으려는 두 가지 자구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자기 것을 지키는 길밖에 없었다.

 

 

황제가 지원한 개혁 양무운동이 군사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면 캉유웨이의 무술변법은 제도적인 측면의 개혁책이었다. 사진은 왼쪽부터 개혁의 후원자인 황제(광서제), 개혁의 대표 주자(유웨이), 보수의 우두머리(서태후). 개혁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서태후는 나중에 개혁을 시도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전쟁 아닌 전쟁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자구책

자구책

마지막 황제 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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