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국력을 키워 중원의 패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운신의 폭이 한결 자유로웠다. 진시황에게는 존주의 명분도, 양이의 의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속된 제후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중앙집권은 반드시 필요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주 왕실이라는 정신적ㆍ이념적 중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게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봉건 질서를 제도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 제도는 군현제(郡縣制)였다. 군현제는 통일 이전부터 진시황을 충실히 보좌해오던 법가 사상의 책략가인 이사(李斯,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08)의 건의로 시행되었다.
각 지방을 독립국처럼 다스리던 제후들이 사라졌으니 우선 그들의 통치를 대신할 행정 기구가 필요했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각각의 군을 군수(郡守), 군위(郡尉), 군감(郡監)이 관장하도록 했다. 또 중앙에는 승상(丞相, 국무총리 격), 태위(太尉, 국방장관 격), 어사대부(御史大夫, 검찰총장 격)의 3공(三公)과 오늘날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九卿)을 두었다. 이로써 황제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성립되었다【사실 군현제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국가 형태의 봉건시대를 거쳐 통일 국가가 수립되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군현제와 비슷한 관료 행정제도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낯익은 정부 부서의 편제는 물론 군수라는 직함도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행정 기구만 갖추었다고 통일 제국의 기틀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행정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측면에서도 통일되지 않으면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진시황(秦始皇)은 지역마다 달리 쓰던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도 예전부터 진이 사용하던 전서체(篆書體)만 사용하게 했다. 중국에서 한자가 생겨나고 쓰인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지역마다 서체가 달라져 거리가 먼 곳끼리는 같은 한자라도 서로 식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억지로 통일하려면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국의 교류가 활발해져 이미 통일의 기반이 숙성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간 도량형이나 문자가 서로 달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통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 시황릉(여산릉) 진시황은 ‘최초의 황제’답게 즉위 초부터 자신의 능을 짓기 시작했다. 산시의 여산에서 발굴된 시황릉은 무려 사방 500미터나 된다. 능의 동문 밖에서 발굴된 이 6000개의 병사 인형들은 시황릉을 수비하는 부대로, 실물 크기에 제각기 표정이 다르게 제작되었다. 시황릉의 공사에는 연인원 70만 명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현전하는 역사 유적은 대개 당대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요구했다.
앞서 말했듯이,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남쪽의 오랑캐(초나라)’는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에서 발흥한 진이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중원 서부 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화 세계로 들어왔다. 끝까지 ‘오랑캐’로 남은 것은 북방의 이민족들뿐이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중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 간에 벌어질 기나긴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만약 전국 7웅 중에서 북동부에 터를 잡은 연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북방 민족들도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사전 대비가 만리장성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의 중앙아시아까지 6000여 킬로미터나 길게 뻗은 만리장성을 전부 다 쌓은 것은 아니다. 원래 전국시대에는 성을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했던 탓에 각국은 방비를 위해 성을 많이 쌓았다. 그러나 중국이 통일되었으니 이제 성 따위는 별로 필요치 않았다. 북방을 방어하는 성벽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대부분의 성을 파괴한 다음, 북방에 자리 잡은 성들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만리장성이다(만리장성은 그 후에도 계속 연장되고 개축되어 처음보다 더욱 길어졌다).
진시황 자신은 변방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만리장성은 더 이상의 이민족을 중화 질서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단지 물리적 용도만이 아니라 중화 세계의 범위를 한정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만약 만리장성이 더 후대에 축조되었다면 만주와 한반도까지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유사 이래 최초로 탄생한 통일 국가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진시황의 열의는 대단했으나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우선 그의 통치는 너무 과격했다. 법가를 신봉하고 한비자(韓非子)를 존경한 그는 법가 이외의 사상을 일체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진기(秦紀, 진의 역사)와 농서, 의학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고 4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역사에 길이 남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켰다. 이런 진시황(秦始皇)의 혹독한 사상 탄압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낳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후대인들처럼 유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아직 각 지방에서 힘을 완전히 잃지 않은 옛 제후국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또한 대규모 건축 사업도 문제가 되었다. 만리장성은 용도라도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진시황이 시작한 각종 건설 사업, 예컨대 아방궁이나 여산릉의 축조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요역(徭役)의 부담을 안겼다. 가뜩이나 농민들은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맞아 꿈에 부풀어 있었기에 실망과 좌절이 더했다.
그래도 시황제의 생전에는 그와 같은 지식인과 농민 들의 반발심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210년 지방 순례 중에 그가 병으로 급사하자 그간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죽자마자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환관인 조고(趙高)였다. 그는 황제의 둘째 아들을 끼고 음모를 꾸며 실권을 장악했다. 욕은 좀 먹었어도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秦始皇)으로서는 죽 쒀서 개 준 격이었다. 그러나 조고는 권력을 차지했어도 최초의 황제가 누린 권위마저 갖지는 못했다.
▲ 책을 태우고 산 사람을 묻고 앞마당의 왼쪽에는 금서로 분류된 책들을 불사르는 분서(焚書)가, 오른쪽에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하는 갱유(坑儒)가 진행되고 있다. 누가 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관리들이 즉각 들이닥쳤다고 하니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사상 탄압보다 훨씬 혹독했던 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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