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셋째, 정신과 육체의 일치(통일) 문제, 혹은 윤리학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의 육체, 감정, 정념(passion), 이러한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자제할 줄도 모르고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안정되게 만들거나 억제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잘 되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남한테 맞았을 때, 그리하여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서 싸우려는 감정이 불끈 솟아날 때, 이성은 어디 있는지 꼬랑지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상태가 되지요. 즉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라는 문제로 제기되는 겁니다. 이걸 흔히 ‘가치론’ ‘윤리학’ ‘도덕론’ 등의 이름으로 부르지요.
데카르트가 최고의 학문으로 도덕학을 제기하는 맥락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학문을 커다란 나무에 비교합니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 ― ‘세계는 이렇다’고 밝혀주는 핵심적인 원리 ― 인데, 이 형이상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부터 나오는 철학적 원리들입니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의 뿌리 위에 줄기가 나오는데, 그 줄기는 물리학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에서 뻗어나오는 가지들에서 의학, 역학, 도덕학 이런 열매들이 맺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덕학이 이러한 것들 중 최고의 열매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작용을 미치고, 육체에서 파생하는 감정과 정념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려면 감정과 정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념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에게서 독립할 자격을 얻으려면 신이나 성직자가 없어도 인간(주체)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게도 인간의 육체나 감정은 제멋대로고 이성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제멋대로라면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떻게 육체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다루는 ‘도덕론’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도덕론이 서있는 기초입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하면 감정과 정념, 욕망과 육체적 활동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이성이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정신)이나 육체나 각자가 독립적인 실체임은 아까 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 정신은 대체 육체나 육체적 욕망, 정념에 대해 어떻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요컨대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이성에 따라) 일치될 수 있을까요?
이제 그에게는 정신과 육체가 만날, 그래서 육체가 정신의 말을 듣고 통제에 따라줄 그러한 장소가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 속에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들고, 동시에 육체로 하여금 사물을 향하게 하거나 피하게 만드는 어떤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데카르트는 ‘송과선’(松果腺)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만나거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양자가 일치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송과선은 뇌의 한복판에 있다고 하는데, 어떠한 해부학자도 아직 이것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문제가 다시 남는데, 그것은 이 송과선은 도대체 어떠한 ‘실체’인가 하는 것입니다. “송과선은 사유하는 실체인가, 연장을 가진 실체인가? 송과선은 정신인가 아니면 육체인가?”하는 문제가.
아무튼 데카르트는 송과선까지 발명하면서 이 정념론에 기초해 ‘잠정적인’ 도덕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우리의 욕망에는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욕망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합니다. 결국 가급적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상태를 위해서 제멋대로인 육체를 통제하고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이 그의 도덕론의 요체였던 것이고, 이는 사실 이성 혹은 영혼에 의해 세계가 파악되고 움직여질 수 있다는 그의 본래의 이상에 맞는 도덕론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라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 사드 이전의 사디즘?
사드는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서 하나의 문턱을 표시한다. 프랑스 혁명은 이제 포르노그라피로 하여금 정치적 성격을 가질 조건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1790년대 말 이후로 포르노그라피의 출간은 급속히 감소한다. 사드는 절대왕정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부도덕과 욕망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도덕 자체를 비난하고 도덕 너머에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지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그는 오히려 거기서 정해진 틀, 정해진 선을 넘쳐나는 욕망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먼 극한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성욕은 이제 성기 아닌 신체 자체를 겨냥하고, 신체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는 욕망으로 변환된다. 그것은 욕망으로 하여금 잔혹의 길로 가게 한다. 그리고 잔혹을 통해 욕망은 사유나 관념, 도덕의 모든 틀을 부수고 나간다. 그 잔혹과 파괴의 마지막 극한은 축음이다. 거기서 쾌락을 위해 쾌락의 대상인 육체를 제거하는 역설이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는 사드의 소설을 영화화함으로써, 파시즘의 광기와 사드적인 잔혹을, 죽음을 하나로 연결한다.
한편 위의 두 그림은 나중에 성인(聖人)이 된 두 여성에 대한 고문 장면을 그린 것인데, 위쪽이 「성 바바라의 고문」(St. Barbara Altar: Detail, the fire torture)이고, 아래쪽이 「성 마가렛의 고문」(St. Margaret, Maniera di Turino Vanni)이다. 손과 몸을 묶고 옷을 벗긴 신체에 회초리나 채찍, 불 등의 고문을 가하는 이런 장면은 사드의 작품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디스트라면 충분히 흥분할 수도 있을 법한 장면이다. 사드 이전의 사디즘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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