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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영웅의 등장(신립, 이순신, 이여송)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영웅의 등장(신립, 이순신, 이여송)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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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의 등장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대륙을 공격할 의도를 품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 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수입했다. 따라서 비록 실현 불가능한 꿈이기는 하나 도요토미가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그는 조선을 중국의 한 지방정권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조선을 정벌하는 데 그치려 했다면 16만의 대군을 편성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러니 비변사 이외에는 별다른 정규군 조직도 없었던 조선이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무나도 일찍 무너졌다는 점이다. 도요토미의 양대 심복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한다. 일찍이 왜구의 침략은 수도 없이 겪었으나 이처럼 대규모의 왜구는 처음 맞는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그래도 왜구쯤을 당하지 못할까? 조정에서는 당대의 명장이었던 신립(申砬, 1546~92)만을 애오라지 믿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저지는 해주리라. 그랬으니 신립이 충주 부근의 탄금대에서 병력의 절대 열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한 뒤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비보를 접한 조정 대신들이 얼마나 경악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호된 신고식 일본군이 첫 상륙지인 부산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화력과 병력에서 앞선 일본군은 조선이 설사 제 정신을 차렸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강적이었다. 게다가 조선에는 변변한 정부군마저 없었으니 백성들과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항전의 수단이 없었다. 더 불행한 일은 400년 뒤에도 이런 현상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비보를 들은 선조(宣祖)는 서둘러 식솔들과 일부 중신들만 데리고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와 멀리 압록강변 의주까지 한달음으로 도망친다믿는 도끼였던 신립의 패전 소식은 조정만이 아니라 민심에도 큰 동요를 가져왔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宣祖)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국왕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지배자가 국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는 350년 뒤 그대로 재현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개전 사흘 만에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한강 인도교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한강을 건너던 무수한 국민들이 죽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밖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한국전쟁은 닮은 점이 많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그가 한 일이 있다면, 북도에서 아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보내 급한 대로 병력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과, 명나라에 급히 SOS를 타전한 것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두 왕자를 곧 사로잡아 버렸고, 개전 후 불과 두 달 만에 평양까지 북상해서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일본의 불운은 육지만 호령했을 뿐 바다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약점을 틈타 조선에는 불세출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군사를 조련하고 장비를 갖춰 오던 이순신(李舜臣, 1545~98)이 바로 그다(이이, 유성룡, 이순신 등 국난을 예감하고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현실의 역사보다 300년 일찍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육지에서 일본이 올린 화려한 연전연승 기록은 바다에서의 연전연패로 상쇄되기 시작한다. 신립이 무너짐으로써 믿는 도끼가 사라졌구나 싶을 때, 이순신은 54일의 첫 출동에서 일본의 함선 37척을 부수면서 아군의 피해는 경상 1명에 그치는 믿지 못할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건 예고편에 불과하다. 7월에 전개된 한산대첩에서는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일본 군함 60여 척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 그가 원균(元均, 1540~97)과 파트너를 이루어 남해상을 장악하면서 일본은 해전 자체를 기피하게 될 정도였다.

 

사실 일본이 준비했던 함대는 병력 수송선이었지 해전을 벌이기 위한 전선(戰船)이 아니었다흔히들 일본은 섬나라니까 일찍부터 조선과 항해술이 발달했을 거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은 중국과 비견되는 소천하(小天下)’의 역사를 전개해 왔으므로 대외 진출보다 일본 자체의 통일에 주력해 왔다(고대부터 해상에 진출한 왜구는 주로 쓰시마 등 해안 일대에 국한된다). 따라서 예상 외로그들의 해군력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거쳐가야 한다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주장한 것도 보잘것없는 해군력으로 중국에까지 병력을 실어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해상 전술이라고는 고작해야 배를 서로 붙여놓고 적의 배에 뛰어올라 자신들의 장기인 검술로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조선의 수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판옥선인 데다가 이순신은 거북선까지 만들어 적의 그런 전술을 원천 봉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해전으로만 진행된다면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이 처음부터 빛나는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적에게 그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 점을 파고든 것은 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말해준다.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이다.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하면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한 것은 육지에서도 역전의 계기가 된다. 하지만 군대가 없는데 어떻게 싸웠을까? 유명무실한 관군의 몫을 대신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 즉 의병이다. 김천일(金千鎰, 1537~93), 고경명(高敬命, 1533~92),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헌(趙憲, 1544~92), 그리고 승려인 휴정(休靜, 1520~1604, 서산대사)과 유정(惟政, 1544~1610, 사명당) 등이 이끄는 조선의 의병들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적의 정예병들을 물리쳐 일본군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제자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당쟁의 근원을 만들었던 조식과 이황은 아마 지하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당시 의병장들 중에는 그들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 합치면 무려 60여 명이라고 하는데, 곽재우, 정인홍(鄭仁弘, 1535~1623), 김면(金沔, 1541~93)은 그들 중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정치적 행적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김면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병에 걸려 죽으면서 이순신보다 앞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기개가 높았으며, 곽재우는 종전 후 혼탁한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할 만큼 절개가 있었으나,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은 전쟁이 끝나고 북인의 보스가 되어 당쟁에 뛰어들었다.

 

관군 장수들 중에서 제 몫을 다한 인물은 진주를 지켜낸 김시민(金時敏, 1554~92)과 행주산성 싸움의 주역인 권율(權慄, 1537~99) 정도다.

 

처음부터 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어야 할 명나라가 참전하는 건 이렇게 전황을 어느 정도 복구해 놓은 다음이다. 선조(宣祖)의 요청에 따라 명 나라에서는 파병 문제를 논의하는데, 마침 명의 조정에서도 당쟁이 만연해 있는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당시 중화세계의 지배층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당쟁뿐이었다).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하자 15927월에 임시변통으로 겨우 5천의 지원군을 편성해서 파견했으나 그 정도로는 달걀로 바위치기다. 예상대로 원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명 황실에서는 항전이냐, 휴전이냐를 두고 5개월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둘 다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해 12월에 랴오둥 수비대장인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는 한편, 심유경(沈惟敬)이라는 자를 보내 일본 측과 화의를 꾀했던 것이다(사실 화의는 이미 유성룡과 성혼 같은 사람들이 주장했으나 명나라가 결정할 사항이므로 묵살된 바 있다. 오히려 두 사람은 그 때문에 종전 후에 탄핵을 받게 된다).

 

일단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한양을 수복하려다 벽제(碧蹄)에서 다시 브레이크가 걸린다. 개성으로 물러난 명군과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애초에 일본을 쉽게 봤던 명나라와 애초에 조선쯤은 쉽게 먹을 줄 알았던 일본, 양측의 전선이 교착되면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휴전으로 향한다.

 

 

구국의 영웅 조선의 육로를 통과해서 중국을 치겠다는 게 도요토미가 공개한 침략 의도였으나, 정작 그것을 막아낸 것은 조선의 육군도 중국군도 아닌 이순신이었다. 그림은 그의 전매특허인 학익진이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 그토록 굴욕적인 휴전협상이 진행될 줄 알았더라면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의 어깨도 늘어졌으리라.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정세 인식의 차이

영웅의 등장

협상과 참상

낯부끄러운 공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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