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참상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인 것도 아니고, 한쪽은 엄연히 침략자요 다른 쪽은 분명한 피해자다. 그런데도 휴전 협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단 조선은 약자로서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한 것은 휴전 협상 테이블의 좌석 배치다. 정작 전란의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조선 대표의 자리는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했던 탓이다. 그래서 협상의 양 주체는 일본의 도요토미와 명나라의 심유경으로 정해졌는데, 여기서 또 다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도요토미가 제시한 강화의 조건이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개 조항 중에서 감합(勘合) 무역(오늘날의 무역 쿼터제에 해당한다)을 재개하라는 요구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천황비로 달라든가,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든가, 조선 왕족 열두 명을 인질로 달라는 요구는 도무지 휴전을 하자는 건지, 계속 싸우자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임진왜란(壬辰倭亂)은 여러 모로 20세기의 한국전쟁과 닮은 데가 많다. 우선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개전 직후 공격 측의 일방적인 공세, 그리고 반격과 소강 상태, 제3국(중국)의 참전으로 진행된 전쟁의 전개 과정이 그렇다. 게다가 휴전협상 과정은 더욱 닮았다. 한국전쟁에서 UN과 북한이 휴전 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조선은 협상에 끼이지 못하고 명나라의 일개 사신과 도요토미가 협상 주체다. 일본 측의 요구 중에는 조선의 국토와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조선은 발언권이 없다(더구나 명나라 측의 강화 요구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도요토미가 사과하는 정도였을 뿐 조선이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배려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명나라가 서로의 힘을 가늠해본 전쟁터만 제공해 주고 만 셈이다. 마치 한국전쟁을 통해 서방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서로의 힘을 시험했듯이】.
그런데 여기서 도요토미의 요구보다 더 터무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일본 측의 제안을 명 황실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심유경은 엉뚱하게도 도요토미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 주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본국에 보고한 것이다. 통역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허위 보고지만 중화 이념에 물들고 당쟁에 찌든 명나라 조정은 사리를 분간할 능력이 없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왜 굳이 침략 전쟁을 시작했을까 하는 의문만 품어봐도 진실을 알 수 있지만 아무도 심유경의 허위 보고를 의심하지 않는다.
정작으로 놀란 건 도요토미다. 군대를 철수하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1596년 명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한다. 는 칙서와 금인을 전하자 그는 격노한다. 사실 그의 요구도 터무니없었지만 그 요구를 수락하겠다는 칙서는 요구 내용과 전혀 무관할 뿐더러 그 자신이 신국(神國)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을 조선처럼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니 더욱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앞에서 보았듯이 13세기 몽골의 일본 정벌이 태풍으로 무산된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을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고 믿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인 1597년 1월 도요토미는 재차 원정군을 보내는데,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명나라의 사신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다시 한번 난리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처음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나라 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유혈의 파티가 끝난 뒤 일본과 중국은 그냥 손을 툭툭 털고 가버리면 되었지만 파티장을 제공한 조선은 얘기가 다르다. 우선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종군기’라 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더욱이 전쟁 전에 전국적으로 170만 결에 이르던 경지가 종전 후에는 불과 1/3로 줄어들었으니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적 피해뿐 아니라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사서들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없어지는 등 문화적 피해도 막심하다. 아울러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도공이나 인쇄공들도 있어 일본 문화의 창달에도 기여했으니 이런 것도 문화 전파라고 할 수 있을까【그러나 주목할 것은 강제로 잡혀간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따라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당시 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도 많았고, 조선의 지방 관리나 백성들 중 자발적으로 일본군 측에 협력한 부일배(附日輩)들은 더 많았다(주권국가 개념과 민족의식이 더 분명했던 20세기 초에도 자발적 친일파들이 많았으니, 400년 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종전 후인 1604년 사명당은 일본으로 가서 전후 일본의 실력자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포로 송환 문제를 협상하는데, 자기 발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으려 했으므로 불과 3500명의 조선군 포로와 백성들을 송환해 오는 데 그쳐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조짐이 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누가 어떤 이유로 도발하느냐는 따위의 명분을 찾기보다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거나, 최소한 전장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요구대로 중국 공격의 길을 내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고 현명했다. 물론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국익을 고려한다면 중국 측에 나름대로 변명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이를테면 조선에 현실적으로 일본의 대군을 막아낼 병력이 없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까). 일본군이 곱게 조선을 가로질러가지 않을 테니 나름대로 부작용은 발생하겠지만 적어도 조선이 두 열강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의 전장이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화세계에 속했다는 허황한 자부심과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경멸감으로 가득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와 백성들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할 만큼 무능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20세기 초 속절없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그런 무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 국난에 대처하는 방법 조선은 원래 군사권을 중국에 내주었으므로 왜구를 막기 위한 수군 이외에는 변변한 상비군조차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해전에서 성공한 반면 육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지도는 임진왜란 시기 의병, 승병, 관군의 활동 상황인데, 여기서 보듯이 관군의 활동은 미약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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