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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도요토미 히데요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도요토미 히데요시)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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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1.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이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82년에 노부나가는 출병을 앞두고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 머물다가 예기치 않게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배신으로 반란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혼노사에 간 이유는 모리(毛利) 가문을 공격하던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 측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즉각 강화를 제의하고, 군대를 돌려 미쓰히데의 반란군을 토벌했다.

 

절대 권력자가 비운에 죽는 일이 생기면 그 사건을 수습하는 자가 권력을 이어받는 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수순이다. 197910월 서울에서 일어난 사태는 400년 전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과 다를 게 없다. 노부나가의 유고(有故)’에 기민하게 대처해 사태를 진정시킨 당시의 합수부장히데요시는 즉각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노부나가의 두 아들을 포함해 기라성 같은 무장들이 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미 히데요시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였다. 히데요시는 국무총리,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모두 제치고 노부나가의 두 살짜리 손자를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

 

히데요시의 아버지는 기노시타(木下)였고, 도요토미라는 성은 권좌에 오른 뒤인 1586년에 히데요시가 천황에게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성은 최소한 세 개(기노시타, 하시바, 도요토미) 이상이 되는데, 이것만으로도 그의 복잡한 개인사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성이 없는 평민 출신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출세를 꿈꾸며 오다 가문의 휘하로 들어갔다. 히데요시 역시 소년 시절부터 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 마구간 일부터 시작했다.

 

12세기에 바쿠후 시대를 처음으로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전통의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 휘하의 무사 집안이었고, 노부나가도 역시 센고쿠 다이묘 출신이었다. 따라서 신분적으로 보면 히데요시는 문자 그대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심지어 그는 외모도 원숭이처럼 생겨 보잘것없었다고 전한다), 노부나가도 하극상의 시대에 힘입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지만, 하극상의 절정은 바로 히데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쿠데타는 아니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이 일약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는 집권 안정을 위해 하극상의 시대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노부나가가 눈앞에 두었던 전국 통일이 가장 먼저다. 그것은 또한 노부나가를 계승하는 길이므로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시코쿠와 규슈의 유력 가문들을 평정하고 마지막 남은 간토의 호조 가문마저 제압해, 1590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전국 통일을 달성했다. 3년 뒤에는 홋카이도마저 복속시켜 처음으로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영토를 조성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태도다. 20년 동안 노부나가를 보좌하면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에야스는 사실 어느 면으로 보나 히데요시에게 꿀릴 게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1584년 히데요시와 벌인 전투에서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서도 갑자기 강화를 맺었다. 그에게는 천하를 경략하겠다는 웅대한 꿈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아직 자신이 그럴 만한 세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후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가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지원했다. 나중에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천하의 새 주인으로 떠올라 영원한 2인자의 이미지를 불식하게 되지만 아직은 속에 품은 칼날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히데요시의 각오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우선 그는 전국의 백성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고 무장을 금지했다. 농민은 농기구만을 가지고 농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사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직업군인 제도가 정착되었으므로 설령 백성들에게 무장을 허용한다 해도 예전과 같은 민중 반란은 어려울 터였다(1593년 호조 세력이 무너진 것도 농번기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무사들을 무력의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토지에 완전히 속박되었으며, 직업의 자유를 빼앗긴 것은 물론 경작을 포기하거나 집을 함부로 옮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결국 하극상의 시대에 민중이 쟁취한 여러 가지 자유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셈이다(아니면 이후로 미루어졌거나). 하지만 이는 당시 일본의 역사적 추세인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센고쿠 시대에 민중의 목소리가 컸던 이유는 민중의식이 깨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센고쿠 시대라는 비정상적인 시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히데요시는 대대적인 토지조사에 착수했다. 앞서 중국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새로운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 세수 확대를 위해 토지조사는 반드시 뒤따르게 마련이다. 일찍이 노부나가도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검지령(檢地令)을 내려 소유한 토지를 신고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한 단계 더 높여 관리를 각지에 파견해 토지를 실제로 측량하게 했는데, 이것을 다이코 검지(太閣檢地, ‘太閣이란 은퇴한 간바쿠라는 뜻으로, 히데요시가 조카에게 간바쿠 자리를 넘긴 뒤 스스로를 가리켜 부른 용어다)라고 부른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오부나가의 돌연한 죽음을 잘 이용해 일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히데요시(왼쪽)는 왜소한 신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커다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통일을 앞두고 죽은 노부나가가 죽 쒀서 히데요시 준 격이라면, 히데요시는 죽 쒀서 이에야스 준 격이었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만년 2인자 노릇을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른쪽)는 결국에도 바쿠후를 열어 일본 통일과 하극상 시대의 최종적 수혜자가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하극상의 절정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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