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1565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난다. 조카 명종(明宗)은 외삼촌이 섭섭하다 할 만큼 곧바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령을 내렸으며, 정치적 생명을 끝낸 윤원형은 얼마 안 가 유배지에서 생물학적인 생명도 끝냈다. 두 양아치가 죽자 그제서야 명종은 인재를 모으고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해 보려 애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와서 새삼 조선을 왕국으로 복원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그보다도 2년 뒤인 1567년에 서른셋의 한창 나이로 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것이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으면서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우선 그들이 할 일은 당연히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이미 1563년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비록 세자가 죽기 전 결혼은 했지만 열두 살짜리가 아이를 낳을 순 없었으니 이제 명종의 대는 끊긴 것이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저절로 입이 함지박처럼 커진다. 왕을 누구로 할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렸다. 예전 같으면 대비가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겠지만, 명종의 비 인순왕후는 친정이 죄인 집안이니 별로 힘을 쓸 수 없다. 따라서 사대부들은 중종(中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서 입맛에 맞는 떡을 고르면 된다. 그들이 선택한 후보는 중종의 손자인 이균(李釣)인데,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 1552~1609, 재위 1567~1608)다.
선조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의 계산이 얼마나 세심하고 치밀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인종(仁宗)과 명종(明宗), 봉성군이 죽었어도 아직 중종(中宗)의 아들은 최소한 일곱 명이 남아 있으며, 중종이 죽은 해가 1544년이므로 모두 최소한 스물은 넘긴 나이다. 즉 킹메이커가 선택할 후보는 쌔고쌌다. 예를 들어 금원군(錦原君)처럼 외가가 좋지 않은 후보를 제외해도(그는 골수 훈구파였던 홍경주의 외손자다) 후보는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후보를 사대부(士大夫)들이 선택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단 그들은 그런 인물로 덕흥군 이초(李岧, 1530~59)를 선택했다. 그러나 스물이 넘은 왕자를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은 자칫 불안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초의 아들, 그것도 맏이가 아닌 셋째 아들인 열다섯 살의 이균(李均)을 차기 왕으로 옹립한다(물론 절차상으로는 병들어 누운 명종이 다음 왕을 선택하는 식이었지만 사실상 사대부들이 낙점한 것이나 다름없다)【덕흥군 자신도 한창 젊은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새 직함이 필요할 터, 그래서 덕흥군은 나중에 죽은 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격상되었다. 이것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의 시작이다. 이후 조선 역사에서 대원군은 세 명이 더 나오게 되는데, 인조(仁祖)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哲宗)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그들이다(그 중 살아 있을 때 대원군으로 책봉받은 사람은 흥선대원군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뒤 추존되었다). 짐작할 수 있듯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은 모두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를 말해준다】.
이제 사대부들로서는 가장 바람직스런 시대를 맞았다. 국왕을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왕권이 강화될 우려는 없다. 그렇다고 중종(中宗)처럼 반정을 통해 왕이 교체된 게 아니니까 골치아픈 공신 세력도 없다. 바야흐로 그들이 꿈꿔온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유교 정치를 화려하게 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정치 이데올로기로서는 괜찮지만 철학적 수준에서는 보잘것없었던 성리학이 다소 업그레이드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이황(李滉, 1501~70)과 이이(李珥, 1536~84) 등 사림의 태두들이 등장했고, 『근사록(近思錄)』과 『소학』, 『삼강행실(三綱行實)』 등 후대에까지 성리학의 주요 교과서가 되는 서적들이 널리 권장되기 시작했다(조광조趙光祖가 영의정으로 추존되고, 남곤, 윤원형, 이기 등의 관직이 사후 박탈된 것도 이 시기다).
이렇게 해서 혼탁했던 ‘윗물’은 어느 정도 맑아졌다. 그럼 조선의 병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상처는 봉합되고 치료되었으나 문제는 바깥에 난 상처에 있지 않다. 권력을 잡은 사림파 사대부(士大夫)들은 그동안 조선사회를 얼룩지게 만든 혼란의 근원이 무질서에 있다고 판단했다. 무질서를 극복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내적 질서만 뜻하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는 입장, 따라서 근본적인 질서를 세우려면 명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에 제후들이 위치하며(여기에는 물론 조선의 국왕이 포함된다), 또 그 아래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리잡는 일사불란한 수직적 서열 구조를 확립해야만 한다. 이런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국정을 맡음으로써 이제부터 조선의 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라 불리는 사건이다. 1588년 3월 선조(宣祖)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 잡고 모화관(慕華館,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곳)【모화관이라는 이름부터가 중국(華)을 숭모(慕)한다는 뜻이니 철저하게 사대주의적이다. 게다가 모화관 앞에 있는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황제의 은총을 환영한다는 뜻이니까 모화관과 아주 잘 어울리는 짝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지배층은 그저 중국의 사신만 와도 엄청난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19세기 말에 모화관은 폐지되고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는 독립문을 세우는데, 천 년이 넘도록 한반도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 온 사대주의가 그런 제스처로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으로 나갔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나 중국에 다녀온 사신을 맞이하는 일은 보통 세자가 담당하지만, 이번 경우는 국왕이 직접 맡아야 할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사신 유홍(兪泓, 1524~94)이 개찬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대명회전』이라면 명나라의 법전인데, 그것을 받는 일에 그렇게 호들갑을 떤 이유는 뭘까?
때는 조선 건국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에 반대했던 윤이와 이초는 명 황실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신진사대부의 대표인 이성계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말도 되지 않는 보고였지만, 중국의 황실에서 한낱 제후국에 불과한 조선 왕실의 가계까지 일일이 확인할 리는 없다(설사 거짓인 줄 알았다 해도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사관은 주원장(朱元璋)의 치세를 기록한 『태조실록』에 이성계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올려 버린다.
가뜩이나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문제로 부심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때마침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에게 사실을 수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때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낸다. 하지만 명나라는 태조의 유훈이 실린 『대명회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약을 올린다. 심지어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왕 네 명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까지 알게 되자 조선 정부는 더욱 애가 탔지만 줄기차게 주청사를 보내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책이 없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려 200년 만인 선조(宣祖) 대에 해결되었다. 1584년 『대명회전』의 개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이성계의 가계가 바로잡힌 것이다. 책이 완성되자 선조는 즉각 유홍을 보내 『대명회전』을 가져오라고 명했고, 드디어 그가 돌아오는 날 참지 못하고 모화관으로 달려나갔다. 두 달 뒤인 1588년 5월 선조는 종묘에 나가 뿌듯한 마음으로 조상들에게 수정된 책을 바치며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하필이면 선조의 치세에 200년 묵은 숙제가 풀렸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뭘까?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선조의 시대였기에, 그리고 그런 조선의 변화를 중국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당시 선조는 벅찬 감격에 못 이겨 이렇게 말했다. “수백 년 마음 아팠던 응어리가 깨끗이 씻겨, 조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없다가 아버지가 있게 되었고, 임금이 없다가 임금이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 수천 리가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고 인륜을 되찾았다.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혈통을 바로잡아줌으로써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 임금다운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하긴 원래 인연에 없던 왕위를 차지한 선조로서는 마치 중국에서 자신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준 듯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같은 시대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572~1620)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균(釣)이라는 이름을 연(昖)으로 바꿀 정도로(신종의 이름은 익균이다) 사대주의에 충실한 국왕이었다】?
사실 선조(宣祖)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특히 신경을 쓴 데는 정상적인 세습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탓이 컸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임의로 선택한 임금이었기에 선조는 즉위하고 나서도 한동안 조선 국왕이 아닌 권지국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그 점은 반정을 통해 즉위한 중종中宗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설움을 겪었으니 『대명회전』을 받고 그가 그토록 감격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종계변무(宗系辨誣)에 사활을 건 것은 국왕만이 아니라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실질적 집권자인 사대부들은 동북아 전체가 중국의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동심원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를 갖추어야만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완전한 질서가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명나라와 올바른 사대 관계를 맺는 것을 중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묵은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꿈꾼 동북아의 성리학적 질서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화세계, 즉 명나라와 조선을 제외한 동북아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런 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화세계 내에서도 사대부(士大夫)들은 안정된 질서를 구축하지 못했다. 앞의 문제는 동북아 전체를 휩쓰는 전란의 회오리로 이어지게 되며, 뒤의 문제는 명나라와 조선에서 당쟁이라는 백해무익한 내분을 낳게 된다. 더욱이 이 두 가지 분쟁이 겹치면서 조선사회는 최악의 상태로 빠져든다.
▲ 독립문과 모화관 중종(中宗)에 이어 선조는 두 번째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낙점‘을 받아 즉위한 왕이었으니 자신의 대에 왕실의 숙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가 해결된 것에 더더욱 기뻐했을 법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이 고작 책 한 권을 받기 위해 모화관으로 뛰어나간 꼴은 어떨까? 사진의 한가운데 있는 건물이 모화관인데, 그 뒤에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독립문이 서 있으니 묘한 불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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