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
정철(鄭澈)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아예 그걸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정여립의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컴백했어도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 동인의 역공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建儲, ‘儲’란 세자를 뜻한다) 문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다.
선조(宣祖)는 아들이 많으나 불행히도 ‘꼭 필요한 아들’이 없었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많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커녕 딸도 없는 것이다. 왕후는 이미 마흔에 가까운 나이니까 앞으로도 후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세자 책봉이 핫 이슈가 된다. 이미 국왕도 옹립한 바 있으니 세자 책봉에 사대부가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차피 후궁 소생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면 이를수록 좋다. 이렇게 판단한 정철은 다른 중신들과 논의한 끝에 선조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워낙 민감한 사안인지라 자칫하면 총대를 멘 자가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철은 그 점을 간과했고 더욱이 동인의 동태도 간과했다.
동인의 보스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정철을 제거하려는 모략을 꾸민다. 정철(鄭澈)은 내심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23)을 세자 후보로 낙점하고 있으나, 선조(宣祖)는 자신이 총애하는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信成君)을 염두에 두고 있다【조선은 ‘사대부(士大夫) 왕국’이라는 기묘한 이중적 체제이기에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도 사대부의 영향력과 국왕의 결정권이 조합되어 이루어진다(물론 공식적으로는 국왕의 권리다). 따라서 사대부와 국왕 간에, 또는 사대부들끼리 견해가 다를 경우에는 언제든 불화가 빚어질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세자 후보들인 광해군과 신성군이 모두 맏이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라는 점이다(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둘째이고 신성군은 인빈 김씨의 둘째다). 어차피 정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굳이 맏이를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이나 사대부나 쉽게 형제 서열을 무시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미약하다는 증거다】. 이건 이야기가 된다. 이산해(李山海)는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金公諒)이라는 자에게 접근해서, 장차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매듭지은 뒤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흘린다. 예상대로 이 말은 선조의 귀에 들어갔고, 선조는 사실 확인조차 하기 전에 정철에게 괘씸죄를 적용한다.
자신이 찍힌 사실을 전혀 모르는 정철은 1591년 마침내 중신들과 함께 경연 자리를 빌려 선조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한다. 영의정 이산해는 속으로 웃음을 짓고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눈치껏 침묵한다. 정철은 완벽하게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그건 선조(宣祖)도 마찬가지다. 격노한 선조는 정철을 삭탈 관직하는 것은 물론 다른 서인들마저 강등시키니, 동인의 손아귀에 완벽하게 놀아난 꼭두각시다. 이것으로 동인은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빚을 말끔히 갚는다. 다만 파이가 커지면 입도 늘어난다는 부패한 권력의 속성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발현된다. 서인들에 대한 숙청 정도를 놓고 동인이 두 파로 갈려 온건파인 유성룡은 남인(南人), 강경파인 이산해(李山海)는 북인(北人)이 된 것이다.
다시 조선의 병이 발병했으나 어차피 그런 일이 다반사니까 아무래도 좋다.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모조리 파벌 이름으로 써먹는 작태까지도 이젠 익숙해져서 참을 만하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진흙탕의 개들처럼 못난 싸움을 벌이는 동안 조선 바깥에서는 엄청난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건저 문제의 회오리가 채 가시기도 전인 1592년 4월, 일본의 16만 대군(20만이라는 설도 있다)이 부산에 상륙한다. 바야흐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시작이다【임진왜란은 중국, 일본, 조선이 모두 얽힌 전란이기에 세 나라가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 간지로 따져서 1592년은 임진년이기에 조선의 사관들은 임진왜란이라고 불렀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명나라와 일본은 각자 자국의 연호를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당시 명나라 황제 신종의 연호는 만력(萬曆)이었으므로 중국 역사에서는 ‘만력의 역(役, 전쟁)’으로 기록되었고, 일본 천황 고요세이(後陽成)의 연호는 분로쿠(文祿)와 게이초(慶長)였으므로 일본 역사에서는 ‘분로쿠ㆍ게이초의 에키(役)’라고 불린다(게이초는 1596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합친 이름이다). 정작 전란의 피해 당사자면서도 독자적인 사건명조차 짓지 못하는 처지에, 일본이 그토록 싫어하는 ‘왜(倭)’라는 글자를 집어넣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심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뚜렷했다. 15세기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센고쿠(戰國) 시대는 100년 이상 지속되다 16세기 후반에 들면서 점차 하극상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이묘들 간의 서열이 정해졌다. 그 중에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2~82)는 라이벌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1568년 드디어 교토에 입성한다. 조선으로 치면 선조(宣祖)가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 무렵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연히 일본의 변화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을 때도, 또 그 다음에 최대의 라이벌인 다케타 세력을 쳐부수고 1580년에 드디어 사원 세력마저 정복해서 일본 열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나마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이가 죽기 전에 10만의 병력을 양성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582년 오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뜻하지 않게 죽은 것은 조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아마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조선 침략은 실제보다 몇 년 앞당겨졌을 터, 그러나 조선은 그 귀중한 몇 년을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쓸데없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탕진했다. 오다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는 본토만이 아니라 시코쿠와 규슈, 홋카이도까지 차례로 정복해서 1590년 드디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전 일본 열도의 통일을 이룬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대외 침략에 나설 필요성이 있다. 오랜 내전의 시대에 팽창할 대로 팽창한 군사력, 내전이 끝나면서 실업자가 된 센고쿠 다이묘들의 불만, 게다가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자부심, 나아가 중국마저 정벌해서 동북아를 통째로 경영하겠다는 망상 ―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을 공격하겠다는 발상 ― 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무사 집단이 시도하는 대외진출, ‘국제화’는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오랜만에 일본 정부의 서신을 받아본 조선 정부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신에는 명나라를 정벌해야겠으니 길을 내달라는 엄청난 내용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중화세계를 이루어 왔는데, 왜놈들 따위가 중국을 침략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부산 항구를 열어달라는 격이니 조선 조정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도요토미로서도 조선의 반응은 충분히 예견하던 바다. 그래서 그는 준비된 카드를 슬며시 꺼낸다. 안 되면 조선부터 침략하겠다는 위협을 넌지시 가해 온 것이다.
그제야 조선 정부는 처음으로 긴장한다. 1590년 실로 오랜만에 통신사(通信使)【이 통신사는 1510년 3포 왜란으로 단절된 이후 80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부터 조선과 일본의 바쿠후 정권은 정규 사절단을 주고받았는데, 조선 측에서 보낸 것을 통신사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양국의 자세다. 조선은 함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지위이므로 일본도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겼지만(그래서 ‘교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엄연히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불렀는데, 이는 쇼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일본국왕’도 천황이 아니라 쇼군을 가리킨다)】를 일본에 보낸 건 도요토미의 요구도 있었지만 과연 일본의 힘이 어느 정도기에 감히 중국을 침략하려 하는지 궁금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관인 것은 통신사의 보고 내용이다. 조정이 두 파로 나뉘어 있으니 국정의 모든 사안마다 양측을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보내는 통신사도 양측 사람으로 안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인 황윤길(黃允吉, 1536~?)은 서인이었고,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 1538~93)은 동인이었다. 비록 나라 안에서는 코를 깨물고 싸우더라도 나라 밖에서는 국익을 도모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는 게 정치인의 도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함대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아무리 같은 사실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달리 보게 마련이라지만 이런 정세 인식의 차이는 좀 심하다. 그러나 더 웃기는 건 조정의 태도다. 정사와 부사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데도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채근하지 않고 부사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벌어진 정철(鄭澈)의 건저(建儲) 문제로 동인이 우세해진 탓이었으니, 당시 조선 정부가 얼마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는지를 알 수 있다【이 점을 보여주는 그 시기 조정의 대화를 한 토막 살펴보자. 1591년 건저 문제를 앞두고 정철과 유성룡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지금 대옥(大獄, 정여립의 사건)이 끝났으니 앞으로 국사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세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을 때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선조(宣祖)는 중신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할 힘이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국운은 금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적 정여립이 늘 점치기를 경인년은 보통으로 길하고 임진년은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금년 국운은 불길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은 다른 죄가 아니라 명나라에 충절을 다하느라고 미친 왜적에게 노여움을 산 것이다.” 일본 침략을 코 앞에 두고서도 세자 책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 사대부(士大夫)들, 그리고 일본군이 침략해 온 상황에서 사대의 의무를 앞세우는 국왕, 이랬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조정의 그런 결정에 따라 황윤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에 들러 얻어 온 조총 두 자루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렸으며, 침략에 대비해서 쌓던 성들도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 엉뚱한 통신 당쟁으로 제 코가 석 자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남의 코를 볼 여유가 없다. 80년 만에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일본발 통신도 그 때문에 빚어진 코미디다. 그림은 조선통신사 행차 장면인데, 이처럼 폼잡고 갔어도 제 몫은 전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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