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
정철(鄭澈)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아예 그걸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정여립의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컴백했어도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 동인의 역공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建儲, ‘儲’란 세자를 뜻한다) 문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다.
선조(宣祖)는 아들이 많으나 불행히도 ‘꼭 필요한 아들’이 없었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많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커녕 딸도 없는 것이다. 왕후는 이미 마흔에 가까운 나이니까 앞으로도 후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세자 책봉이 핫 이슈가 된다. 이미 국왕도 옹립한 바 있으니 세자 책봉에 사대부가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차피 후궁 소생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면 이를수록 좋다. 이렇게 판단한 정철은 다른 중신들과 논의한 끝에 선조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워낙 민감한 사안인지라 자칫하면 총대를 멘 자가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철은 그 점을 간과했고 더욱이 동인의 동태도 간과했다.
동인의 보스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정철을 제거하려는 모략을 꾸민다. 정철(鄭澈)은 내심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23)을 세자 후보로 낙점하고 있으나, 선조(宣祖)는 자신이 총애하는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信成君)을 염두에 두고 있다【조선은 ‘사대부(士大夫) 왕국’이라는 기묘한 이중적 체제이기에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도 사대부의 영향력과 국왕의 결정권이 조합되어 이루어진다(물론 공식적으로는 국왕의 권리다). 따라서 사대부와 국왕 간에, 또는 사대부들끼리 견해가 다를 경우에는 언제든 불화가 빚어질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세자 후보들인 광해군과 신성군이 모두 맏이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라는 점이다(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둘째이고 신성군은 인빈 김씨의 둘째다). 어차피 정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굳이 맏이를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이나 사대부나 쉽게 형제 서열을 무시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미약하다는 증거다】. 이건 이야기가 된다. 이산해(李山海)는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金公諒)이라는 자에게 접근해서, 장차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매듭지은 뒤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흘린다. 예상대로 이 말은 선조의 귀에 들어갔고, 선조는 사실 확인조차 하기 전에 정철에게 괘씸죄를 적용한다.
자신이 찍힌 사실을 전혀 모르는 정철은 1591년 마침내 중신들과 함께 경연 자리를 빌려 선조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한다. 영의정 이산해는 속으로 웃음을 짓고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눈치껏 침묵한다. 정철은 완벽하게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그건 선조(宣祖)도 마찬가지다. 격노한 선조는 정철을 삭탈 관직하는 것은 물론 다른 서인들마저 강등시키니, 동인의 손아귀에 완벽하게 놀아난 꼭두각시다. 이것으로 동인은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빚을 말끔히 갚는다. 다만 파이가 커지면 입도 늘어난다는 부패한 권력의 속성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발현된다. 서인들에 대한 숙청 정도를 놓고 동인이 두 파로 갈려 온건파인 유성룡은 남인(南人), 강경파인 이산해(李山海)는 북인(北人)이 된 것이다.
다시 조선의 병이 발병했으나 어차피 그런 일이 다반사니까 아무래도 좋다.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모조리 파벌 이름으로 써먹는 작태까지도 이젠 익숙해져서 참을 만하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진흙탕의 개들처럼 못난 싸움을 벌이는 동안 조선 바깥에서는 엄청난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건저 문제의 회오리가 채 가시기도 전인 1592년 4월, 일본의 16만 대군(20만이라는 설도 있다)이 부산에 상륙한다. 바야흐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시작이다【임진왜란은 중국, 일본, 조선이 모두 얽힌 전란이기에 세 나라가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 간지로 따져서 1592년은 임진년이기에 조선의 사관들은 임진왜란이라고 불렀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명나라와 일본은 각자 자국의 연호를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당시 명나라 황제 신종의 연호는 만력(萬曆)이었으므로 중국 역사에서는 ‘만력의 역(役, 전쟁)’으로 기록되었고, 일본 천황 고요세이(後陽成)의 연호는 분로쿠(文祿)와 게이초(慶長)였으므로 일본 역사에서는 ‘분로쿠ㆍ게이초의 에키(役)’라고 불린다(게이초는 1596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합친 이름이다). 정작 전란의 피해 당사자면서도 독자적인 사건명조차 짓지 못하는 처지에, 일본이 그토록 싫어하는 ‘왜(倭)’라는 글자를 집어넣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심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뚜렷했다. 15세기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센고쿠(戰國) 시대는 100년 이상 지속되다 16세기 후반에 들면서 점차 하극상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이묘들 간의 서열이 정해졌다. 그 중에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2~82)는 라이벌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1568년 드디어 교토에 입성한다. 조선으로 치면 선조(宣祖)가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 무렵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연히 일본의 변화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을 때도, 또 그 다음에 최대의 라이벌인 다케타 세력을 쳐부수고 1580년에 드디어 사원 세력마저 정복해서 일본 열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나마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이가 죽기 전에 10만의 병력을 양성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582년 오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뜻하지 않게 죽은 것은 조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아마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조선 침략은 실제보다 몇 년 앞당겨졌을 터, 그러나 조선은 그 귀중한 몇 년을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쓸데없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탕진했다. 오다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는 본토만이 아니라 시코쿠와 규슈, 홋카이도까지 차례로 정복해서 1590년 드디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전 일본 열도의 통일을 이룬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대외 침략에 나설 필요성이 있다. 오랜 내전의 시대에 팽창할 대로 팽창한 군사력, 내전이 끝나면서 실업자가 된 센고쿠 다이묘들의 불만, 게다가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자부심, 나아가 중국마저 정벌해서 동북아를 통째로 경영하겠다는 망상 ―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을 공격하겠다는 발상 ― 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무사 집단이 시도하는 대외진출, ‘국제화’는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오랜만에 일본 정부의 서신을 받아본 조선 정부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신에는 명나라를 정벌해야겠으니 길을 내달라는 엄청난 내용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중화세계를 이루어 왔는데, 왜놈들 따위가 중국을 침략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부산 항구를 열어달라는 격이니 조선 조정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도요토미로서도 조선의 반응은 충분히 예견하던 바다. 그래서 그는 준비된 카드를 슬며시 꺼낸다. 안 되면 조선부터 침략하겠다는 위협을 넌지시 가해 온 것이다.
그제야 조선 정부는 처음으로 긴장한다. 1590년 실로 오랜만에 통신사(通信使)【이 통신사는 1510년 3포 왜란으로 단절된 이후 80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부터 조선과 일본의 바쿠후 정권은 정규 사절단을 주고받았는데, 조선 측에서 보낸 것을 통신사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양국의 자세다. 조선은 함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지위이므로 일본도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겼지만(그래서 ‘교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엄연히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불렀는데, 이는 쇼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일본국왕’도 천황이 아니라 쇼군을 가리킨다)】를 일본에 보낸 건 도요토미의 요구도 있었지만 과연 일본의 힘이 어느 정도기에 감히 중국을 침략하려 하는지 궁금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관인 것은 통신사의 보고 내용이다. 조정이 두 파로 나뉘어 있으니 국정의 모든 사안마다 양측을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보내는 통신사도 양측 사람으로 안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인 황윤길(黃允吉, 1536~?)은 서인이었고,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 1538~93)은 동인이었다. 비록 나라 안에서는 코를 깨물고 싸우더라도 나라 밖에서는 국익을 도모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는 게 정치인의 도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함대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아무리 같은 사실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달리 보게 마련이라지만 이런 정세 인식의 차이는 좀 심하다. 그러나 더 웃기는 건 조정의 태도다. 정사와 부사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데도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채근하지 않고 부사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벌어진 정철(鄭澈)의 건저(建儲) 문제로 동인이 우세해진 탓이었으니, 당시 조선 정부가 얼마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는지를 알 수 있다【이 점을 보여주는 그 시기 조정의 대화를 한 토막 살펴보자. 1591년 건저 문제를 앞두고 정철과 유성룡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지금 대옥(大獄, 정여립의 사건)이 끝났으니 앞으로 국사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세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을 때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선조(宣祖)는 중신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할 힘이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국운은 금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적 정여립이 늘 점치기를 경인년은 보통으로 길하고 임진년은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금년 국운은 불길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은 다른 죄가 아니라 명나라에 충절을 다하느라고 미친 왜적에게 노여움을 산 것이다.” 일본 침략을 코 앞에 두고서도 세자 책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 사대부(士大夫)들, 그리고 일본군이 침략해 온 상황에서 사대의 의무를 앞세우는 국왕, 이랬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조정의 그런 결정에 따라 황윤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에 들러 얻어 온 조총 두 자루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렸으며, 침략에 대비해서 쌓던 성들도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 엉뚱한 통신 당쟁으로 제 코가 석 자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남의 코를 볼 여유가 없다. 80년 만에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일본발 통신도 그 때문에 빚어진 코미디다. 그림은 조선통신사 행차 장면인데, 이처럼 폼잡고 갔어도 제 몫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영웅의 등장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대륙을 공격할 의도를 품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 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수입했다. 따라서 비록 실현 불가능한 꿈이기는 하나 도요토미가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그는 조선을 중국의 한 지방정권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조선을 정벌하는 데 그치려 했다면 16만의 대군을 편성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러니 비변사 이외에는 별다른 정규군 조직도 없었던 조선이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무나도 일찍 무너졌다는 점이다. 도요토미의 양대 심복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한다. 일찍이 왜구의 침략은 수도 없이 겪었으나 이처럼 대규모의 왜구는 처음 맞는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그래도 왜구쯤을 당하지 못할까? 조정에서는 당대의 명장이었던 신립(申砬, 1546~92)만을 애오라지 믿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저지는 해주리라. 그랬으니 신립이 충주 부근의 탄금대에서 병력의 절대 열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한 뒤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비보를 접한 조정 대신들이 얼마나 경악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호된 신고식 일본군이 첫 상륙지인 부산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화력과 병력에서 앞선 일본군은 조선이 설사 제 정신을 차렸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강적이었다. 게다가 조선에는 변변한 정부군마저 없었으니 백성들과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항전의 수단이 없었다. 더 불행한 일은 400년 뒤에도 이런 현상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비보를 들은 선조(宣祖)는 서둘러 식솔들과 일부 중신들만 데리고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와 멀리 압록강변 의주까지 한달음으로 도망친다【믿는 도끼였던 신립의 패전 소식은 조정만이 아니라 민심에도 큰 동요를 가져왔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宣祖)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국왕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지배자가 국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는 350년 뒤 그대로 재현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개전 사흘 만에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한강 인도교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한강을 건너던 무수한 국민들이 죽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밖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한국전쟁은 닮은 점이 많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그가 한 일이 있다면, 북도에서 아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보내 급한 대로 병력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과, 명나라에 급히 SOS를 타전한 것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두 왕자를 곧 사로잡아 버렸고, 개전 후 불과 두 달 만에 평양까지 북상해서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일본의 불운은 육지만 호령했을 뿐 바다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약점을 틈타 조선에는 불세출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군사를 조련하고 장비를 갖춰 오던 이순신(李舜臣, 1545~98)이 바로 그다(이이, 유성룡, 이순신 등 국난을 예감하고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현실의 역사보다 300년 일찍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육지에서 일본이 올린 화려한 연전연승 기록은 바다에서의 연전연패로 상쇄되기 시작한다. 신립이 무너짐으로써 믿는 도끼가 사라졌구나 싶을 때, 이순신은 5월 4일의 첫 출동에서 일본의 함선 37척을 부수면서 아군의 피해는 경상 1명에 그치는 믿지 못할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건 예고편에 불과하다. 7월에 전개된 한산대첩에서는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일본 군함 60여 척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 그가 원균(元均, 1540~97)과 파트너를 이루어 남해상을 장악하면서 일본은 해전 자체를 기피하게 될 정도였다.
사실 일본이 준비했던 함대는 병력 수송선이었지 해전을 벌이기 위한 전선(戰船)이 아니었다【흔히들 일본은 섬나라니까 일찍부터 조선과 항해술이 발달했을 거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은 중국과 비견되는 ‘소천하(小天下)’의 역사를 전개해 왔으므로 대외 진출보다 일본 자체의 통일에 주력해 왔다(고대부터 해상에 진출한 왜구는 주로 쓰시마 등 해안 일대에 국한된다). 따라서 ‘예상 외로’ 그들의 해군력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거쳐가야 한다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주장한 것도 보잘것없는 해군력으로 중국에까지 병력을 실어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해상 전술이라고는 고작해야 배를 서로 붙여놓고 적의 배에 뛰어올라 자신들의 장기인 검술로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조선의 수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판옥선인 데다가 이순신은 거북선까지 만들어 적의 그런 전술을 원천 봉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해전으로만 진행된다면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이 처음부터 빛나는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적에게 그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 점을 파고든 것은 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말해준다.
▲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이다.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하면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한 것은 육지에서도 역전의 계기가 된다. 하지만 군대가 없는데 어떻게 싸웠을까? 유명무실한 관군의 몫을 대신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 즉 의병이다. 김천일(金千鎰, 1537~93), 고경명(高敬命, 1533~92),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헌(趙憲, 1544~92), 그리고 승려인 휴정(休靜, 1520~1604, 서산대사)과 유정(惟政, 1544~1610, 사명당) 등이 이끄는 조선의 의병들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적의 정예병들을 물리쳐 일본군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제자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당쟁의 근원을 만들었던 조식과 이황은 아마 지하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당시 의병장들 중에는 그들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 합치면 무려 60여 명이라고 하는데, 곽재우, 정인홍(鄭仁弘, 1535~1623), 김면(金沔, 1541~93)은 그들 중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정치적 행적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김면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병에 걸려 죽으면서 이순신보다 앞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기개가 높았으며, 곽재우는 종전 후 혼탁한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할 만큼 절개가 있었으나,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은 전쟁이 끝나고 북인의 보스가 되어 당쟁에 뛰어들었다】.
관군 장수들 중에서 제 몫을 다한 인물은 진주를 지켜낸 김시민(金時敏, 1554~92)과 행주산성 싸움의 주역인 권율(權慄, 1537~99) 정도다.
처음부터 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어야 할 명나라가 참전하는 건 이렇게 전황을 어느 정도 복구해 놓은 다음이다. 선조(宣祖)의 요청에 따라 명 나라에서는 파병 문제를 논의하는데, 마침 명의 조정에서도 당쟁이 만연해 있는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당시 중화세계의 지배층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당쟁뿐이었다).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하자 1592년 7월에 임시변통으로 겨우 5천의 지원군을 편성해서 파견했으나 그 정도로는 달걀로 바위치기다. 예상대로 원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명 황실에서는 항전이냐, 휴전이냐를 두고 5개월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둘 다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해 12월에 랴오둥 수비대장인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는 한편, 심유경(沈惟敬)이라는 자를 보내 일본 측과 화의를 꾀했던 것이다(사실 화의는 이미 유성룡과 성혼 같은 사람들이 주장했으나 명나라가 결정할 사항이므로 묵살된 바 있다. 오히려 두 사람은 그 때문에 종전 후에 탄핵을 받게 된다).
일단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한양을 수복하려다 벽제(碧蹄)에서 다시 브레이크가 걸린다. 개성으로 물러난 명군과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애초에 일본을 쉽게 봤던 명나라와 애초에 조선쯤은 쉽게 먹을 줄 알았던 일본, 양측의 전선이 교착되면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휴전으로 향한다.
▲ 구국의 영웅 조선의 육로를 통과해서 중국을 치겠다는 게 도요토미가 공개한 침략 의도였으나, 정작 그것을 막아낸 것은 조선의 육군도 중국군도 아닌 이순신이었다. 그림은 그의 전매특허인 학익진이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 그토록 굴욕적인 휴전협상이 진행될 줄 알았더라면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의 어깨도 늘어졌으리라.
협상과 참상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인 것도 아니고, 한쪽은 엄연히 침략자요 다른 쪽은 분명한 피해자다. 그런데도 휴전 협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단 조선은 약자로서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한 것은 휴전 협상 테이블의 좌석 배치다. 정작 전란의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조선 대표의 자리는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했던 탓이다. 그래서 협상의 양 주체는 일본의 도요토미와 명나라의 심유경으로 정해졌는데, 여기서 또 다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도요토미가 제시한 강화의 조건이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개 조항 중에서 감합(勘合) 무역(오늘날의 무역 쿼터제에 해당한다)을 재개하라는 요구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천황비로 달라든가,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든가, 조선 왕족 열두 명을 인질로 달라는 요구는 도무지 휴전을 하자는 건지, 계속 싸우자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임진왜란(壬辰倭亂)은 여러 모로 20세기의 한국전쟁과 닮은 데가 많다. 우선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개전 직후 공격 측의 일방적인 공세, 그리고 반격과 소강 상태, 제3국(중국)의 참전으로 진행된 전쟁의 전개 과정이 그렇다. 게다가 휴전협상 과정은 더욱 닮았다. 한국전쟁에서 UN과 북한이 휴전 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조선은 협상에 끼이지 못하고 명나라의 일개 사신과 도요토미가 협상 주체다. 일본 측의 요구 중에는 조선의 국토와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조선은 발언권이 없다(더구나 명나라 측의 강화 요구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도요토미가 사과하는 정도였을 뿐 조선이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배려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명나라가 서로의 힘을 가늠해본 전쟁터만 제공해 주고 만 셈이다. 마치 한국전쟁을 통해 서방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서로의 힘을 시험했듯이】.
그런데 여기서 도요토미의 요구보다 더 터무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일본 측의 제안을 명 황실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심유경은 엉뚱하게도 도요토미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 주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본국에 보고한 것이다. 통역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허위 보고지만 중화 이념에 물들고 당쟁에 찌든 명나라 조정은 사리를 분간할 능력이 없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왜 굳이 침략 전쟁을 시작했을까 하는 의문만 품어봐도 진실을 알 수 있지만 아무도 심유경의 허위 보고를 의심하지 않는다.
정작으로 놀란 건 도요토미다. 군대를 철수하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1596년 명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한다. 는 칙서와 금인을 전하자 그는 격노한다. 사실 그의 요구도 터무니없었지만 그 요구를 수락하겠다는 칙서는 요구 내용과 전혀 무관할 뿐더러 그 자신이 신국(神國)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을 조선처럼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니 더욱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앞에서 보았듯이 13세기 몽골의 일본 정벌이 태풍으로 무산된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을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고 믿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인 1597년 1월 도요토미는 재차 원정군을 보내는데,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명나라의 사신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다시 한번 난리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처음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나라 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유혈의 파티가 끝난 뒤 일본과 중국은 그냥 손을 툭툭 털고 가버리면 되었지만 파티장을 제공한 조선은 얘기가 다르다. 우선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종군기’라 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더욱이 전쟁 전에 전국적으로 170만 결에 이르던 경지가 종전 후에는 불과 1/3로 줄어들었으니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적 피해뿐 아니라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사서들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없어지는 등 문화적 피해도 막심하다. 아울러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도공이나 인쇄공들도 있어 일본 문화의 창달에도 기여했으니 이런 것도 문화 전파라고 할 수 있을까【그러나 주목할 것은 강제로 잡혀간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따라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당시 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도 많았고, 조선의 지방 관리나 백성들 중 자발적으로 일본군 측에 협력한 부일배(附日輩)들은 더 많았다(주권국가 개념과 민족의식이 더 분명했던 20세기 초에도 자발적 친일파들이 많았으니, 400년 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종전 후인 1604년 사명당은 일본으로 가서 전후 일본의 실력자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포로 송환 문제를 협상하는데, 자기 발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으려 했으므로 불과 3500명의 조선군 포로와 백성들을 송환해 오는 데 그쳐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조짐이 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누가 어떤 이유로 도발하느냐는 따위의 명분을 찾기보다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거나, 최소한 전장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요구대로 중국 공격의 길을 내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고 현명했다. 물론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국익을 고려한다면 중국 측에 나름대로 변명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이를테면 조선에 현실적으로 일본의 대군을 막아낼 병력이 없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까). 일본군이 곱게 조선을 가로질러가지 않을 테니 나름대로 부작용은 발생하겠지만 적어도 조선이 두 열강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의 전장이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화세계에 속했다는 허황한 자부심과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경멸감으로 가득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와 백성들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할 만큼 무능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20세기 초 속절없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그런 무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 국난에 대처하는 방법 조선은 원래 군사권을 중국에 내주었으므로 왜구를 막기 위한 수군 이외에는 변변한 상비군조차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해전에서 성공한 반면 육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지도는 임진왜란 시기 의병, 승병, 관군의 활동 상황인데, 여기서 보듯이 관군의 활동은 미약했다.
낯부끄러운 공신들
현대 사회라면 난리를 겪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든 없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도의 재앙이 있었다면 권력자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도 바뀌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왕조시대라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도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으니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온 백성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조선의 지배층은 깨끗이 반성하고 말끔히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변명할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권력 구조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임금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임금인 선조(宣祖)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도 못 되어 버선발로 도망쳤으면서도 책임을 면했다. 왜? 군주는 사대부들이 임명하는 거니까. 또 사대부들은 전쟁 직전에까지 자기들끼리 당쟁이나 일삼았고 전쟁 중에는 임금을 수행하느니,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느니, 심지어 이순신을 모함하느니 하면서 임무를 방기했지만 책임을 면했다. 왜? 조선은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니까【전란 중에도 실정의 책임을 묻는 반란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1593년 의병장 송유진(宋儒眞)은 충청도 일대에서 2천의 병력을 모아 의병대로 싸우다 한양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 날짜인 이듬해 정월 보름을 며칠 앞두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1596년 관군 장교였던 이몽학(李夢鶴)은 양민과 노비로 된 병력 수백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 홍산 관청을 점령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이몽학의 반란은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연좌에 걸린 대형 사건이었으나, 전란 중인 탓에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덕령(金德齡)이나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도 무고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대형 사고가 나도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이 책임지는 법이 없는 것은 이런 나쁜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만큼 지배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백성들도 없다.
그러니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도 조선의 지배 체제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사대부(士大夫)들에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삐걱거리면서도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하던 기존의 토지제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토지가 황폐해졌고 토지대장도 사라져 버렸으니 이제 공전이고 사전이고 가릴 것 없이 말뚝만 꽂으면 모두 내 땅이다. 그 말뚝은 물론 권력자만이 꽂을 수 있다. 대부분이 지주들인 사대부(士大夫)들은 마치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토지 겸병에 나선다. 몽골 지배기가 끝난 고려의 경우와 너무나도 흡사한 상황이다.
어쨌든 우선 임금이 사는 집(왕궁)부터 불타 없어졌으므로 나름대로 전후 복구는 필요하다. 선조(宣祖)는 급한 대로 정릉의 행궁(行宮)에 거처를 마련했으나 평소에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으니 생활하기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임금의 직무가 떠오른 걸까? 그는 궁궐의 신축을 권하는 명나라 장수의 의견을 거부하고 일본에 복수하기 전까지는 궁궐을 짓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내보인다(그래서 경복궁이 중건되는 건 3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논공 행상을 빼놓지 않는 것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전란이라는 대사건이 있었으니 논공행상도 필요하겠지만 이순신, 원균(元均)【원균에 관해서는 충신과 간신의 이분법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최소한 그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과 이순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원균은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긴 이순신에 비해 문장력이 부족했고 자식이 없어 후대에 오명과 오해를 불렀다고도 한다】, 권율 등 진짜 알짜배기 공신들과 수많은 의병장들은 대부분 죽은 뒤였으니 과연 진정한 공신이 남아 있었을까? 더구나 사대부들이 선정하는 공신이라면 제대로 된 논공행상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과연 1604년 7월에 발표된 공신 명단을 보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난리를 겪고서도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최고 수훈갑에 해당하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은 터무니없게도 적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하는 데 노력한 자들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정곤수(鄭崑壽, 1538~1602), 윤두수(尹斗壽, 1533~1601) 등 조정의 문신들과 내시들까지 포함해서 무기 한 번 잡아보지 못한 86명이 이 상을 받았다(그나마 유성룡은 종군기라도 썼으니 공신 자격이 있는 편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직접 참전한 사람들과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사람들이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선정된다. 이순신, 김시민 등 주로 전사한 무신들과 의병장들이 임명되었는데, 수는 겨우 18명이다. 마지막으로 청란공신(淸亂功臣)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 가운데 5명이 책봉되었다. 북으로 도망치는 선조(宣祖)의 시중을 들고 발을 닦아준 내시는 호성공신이 되었고 장렬하게 전사한 많은 의병장들은 공신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으니,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이런 불공정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하기야 당시 조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왔을 정도라면 그런 공신 명단도 지극히 당연하다.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한 공로는 모두 성상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어 중국 조정에서 곡진하게 구제해준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조금 수고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또한 직분 내의 일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공로가 뭐 있겠습니까?” 결국 왜란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정작 전쟁에서는 체면치레만 해놓고 엉터리 휴전협상을 진행한 명나라 정부이고, 그 다음 유공자는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선조라는 이야기다. 이 정도라면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 사용해 온 ‘사대부 국가’라는 표현도 과분하다 하겠다】.
당시 호성공신들 중에 낯부끄러워한 인물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명단의 작성 과정에서도 사대부(士大夫)들의 당파가 배려되었음은 확실하다. 당쟁으로 전쟁 전의 기본적인 사태 파악조차도 날려 버린 그들이지만, 전쟁이 끝나자 언제 전쟁이 있었더냐는 듯싶게 다시 본업인 당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실 논공행상이 있기도 전에 당쟁은 재개되었다. 물러간 일본군 캠프의 모닥불이 채 꺼지기도 전인 1598년 명나라 장수가 본국에 올린 허무맹랑한 보고에 놀아난 게 그것이다. 조선이 일본과 동맹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려 했다는 그 망언에 대응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그 시나리오는 전쟁 전에 일본이 정략적 의도를 담고 제의한 것에 불과했으니 명백한 허위 보고가 아닌가? 그런데도 어떻게든 집권 세력인 남인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북인들은 영의정 유성룡이 중국에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며 탄핵한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당쟁의 논리에서는 훌륭한 구실이다. 결국 유성룡은 정계에서 은퇴해 버렸고 2년 뒤 복직이 허용되었을 때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재야에 있는 상태에서 공신 책봉을 받은 셈이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를 놓고 다시 북인이 둘로 핵분열된 것이다. 유성룡의 탄핵을 주도한 남이공(南以恭, 1565~1640)은 오히려 홍여순(洪汝淳, 1547~1609)이 대사헌으로 승진하자 발끈한다. 임명은 국왕이 했지만 그것은 물론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북인이라는 같은 집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남이공은 살림을 차려 나가는데, 그의 새 집은 소북(小北)이 되었고 홍여순의 옛 집은 대북(大北)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당쟁에 신물이 난 선조(宣祖)는 홍여순을 유배보내 사태를 무마하려 했으나 당쟁은 가라앉기는커녕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곧이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겐 제법 비중있는 다툼거리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다.
▲ 선조(宣祖)의 안식처 모화관에 버선발로 뛰어간 국왕, 전란을 맞아 가장 먼저 내뺀 국왕(이런 전례는 고려의 강화도 정부에서도 본 바 있다), 그나마 선조가 사후 처리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정상참작’은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자들에게 공신 직함을 남발해서 다시 실망을 안겨준다. 사진은 그의 무덤인데, 전란으로 제 집을 잃었으니 이곳이 사실상 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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