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윤회의 모순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당초에 과학적 검증 운운했지만, 이러한 영역은 영원히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도 정정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나의 이런 질문에 감춰져 있는 논리적 함정을 이미 간파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윤회를 사실로서 믿는 세계관에는 익숙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윤회를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교의 많은 교설들이 논리적으로 성립불가능해진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예 그것을 요청(postulation)으로 말해 버렸지만 달라이라마는 그것을 사실(fact)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역시 합리주의적 철학자였고, 달라이라마는 종교적 지도자임이 분명했다. 더 이상 쑤시고 들어가 봤자 나만 손해볼 게 분명했다. 나는 묘책을 하나 또 생각해냈다.
“원시불교, 대승불교를 막론하고 불교의 최고의 법인 중의 하나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것을 인정하시죠?”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제법무아라는 것은 모든 존재에 아트만(ātman)이 없다는 것입니다. 맞죠?”
“댓스 라이트, 오케이.”
나는 잔뜩 긴장하면서 그를 쑤시기 위해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였다. 그는 나의 긴장한 태도가 좀 의아스러운 듯하면서도 아주 코믹하게 ‘오케이’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결국 무아라고 한다면 실체로서의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해소되어 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윤회라는 세계관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윤회의 주체로서 자기동일성을 갖는 어떤 실체의 지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즉 윤회에는 아트만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법에는 아(我)가 없는데 윤회에는 아(我)가 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분명 붓다의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인데 어떻게 무아의 세계관과 아를 지속시켜야만 하는 윤회의 세계관이 동시에 가능한 것입니까? 무아와 윤회는 불교이론의 모순되는 두 측면이 아닙니까?”
나는 이제 달라이라마가 나의 공세에 디펜스가 좀 난처한 입장으로 몰렸다고 생각했다. 의기양양하게 질문을 마치자마자 달라이라마는 반갑게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댓스 굳 퀘스천!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불교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해를 잘하는 대목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애매한 상념에 빠져 불필요한 고민에 빠지거나 어려운 해결책을 시도하는 그러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붓다가 무아를 말했을 때의 아는 변하지 않고 상주하는 아며, 절대적이며 타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아며, 또 집적태로서의 분할이 불가능한 단일한 아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립적(自立的)이며 독립적(獨立的)이며 단일적(單一的)인 성질을 구비하는 존재를 우리는 스바브하바(svabhāva), 즉 실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무아론은 실체로서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체로서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론은 결코 윤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즉 무아의 세계관은 전혀 윤회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실체적 자아는 연기적 자아와 대립되는 개념이며, 실체적 자아가 없어져도 연기적인 자아는 분명히 있는 것이므로, 그 연기적인 자아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퍼커트를 살짝 멕일려다가 스트레이트를 된통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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