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연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은 큰 창문을 마주보고 있고, 그 창문 밖에는 4각의 담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한구석에 있는 자그맣고 어여쁜 잔디밭이 있다. 우리는 이 잔디밭을 항상 ‘잔디밭’이라고 부른다. ‘나의 책상 앞에는 잔디밭이 있다’라는 명제는 항상 불변적으로 우리집을 기술하는 말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잔디밭은 그 실상을 들어가 보면, 그것은 흙과 여러 가지 풀의 종류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체들의 군집으로 형성되어 있다. 개미ㆍ지렁이ㆍ지네ㆍ모기ㆍ파리ㆍ나비ㆍ진드기ㆍ딱정벌레ㆍ풀강아지ㆍ바퀴벌레ㆍ송장벌레ㆍ톡토기ㆍ짚신벌레ㆍ개미살이ㆍ노래기ㆍ솔진드기ㆍ풍뎅이ㆍ애벌레ㆍ매미 애벌레……
이러한 식물과 동물의 군집형태를 우리가 막연히 ‘잔디밭’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의 잔디밭이라고 하는 추상개념에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자기동일적 모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잔디밭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요소들의 집적태에 불과하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잔디라고 부르는 풀의 종을 주종으로 유지하면서 타 종을 끊임없이 제거하고 또 잔디의 형태를 이ㆍ삼부가리 머리깎은 것처럼 계속 유지하지 않는다면, 즉 그러한 자기동일성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버린다면 잔디밭은 금방 잔디밭이 아닌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 잔디밭이 아닌 잡초밭이 되거나, 수목이 우거진 수풀이 되거나, 또는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황무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잔디밭이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아트만(ātman)’이라고 부른다. 잔디밭에 잔디밭이라고 하는 아(我)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잔디밭은 없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요소들의 집적태일 뿐이며 잔디밭은 하시고 잔디밭이 아닌 그 무엇의 상태로 변할 수 있으므로 잔디밭은 항구적인 자기동일성(identity)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곧 ‘무아론’이 되는 것이다. 즉 무아란 단순히 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요소들 간의 연기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무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잔디밭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 ‘내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내가 있어서 그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있어서 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는 무엇인가? 알고 보면 그 나는 약 6×10¹³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포는 각자 수없이 다양한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나’는 적어도 5만여 종 이상의 단백질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생화학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동일성(아트만)은 나에게 특유한 핵산과 단백질의 집합으로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물학 시간에 배우는 인체구조, 해부학 (형태론)이나 생리학 (기능론)에서 배우는 모든 인체에 관한 지식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요소들의 연기관계를 아는 지혜인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요소들의 연기관계 속에 있을 뿐이지, ‘내’가 있어서 그 요소들의 연기관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물시간에 배우고 있는 정보는 곧 무아론적인 연기의 지혜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부학에서 말하는 형태나, 생리학에서 말하는 기능이 해체되어 버리면, 즉 일부라도 전체에 영향을 주는 손상이나 급격한 변화가 오게 되면 나는 순식간에 해체되어 버리고 말 것이며, 내가 아트만이라고 믿어온 나의 동일성은 온데간데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연기론에 기반을 둔 무아론은 모든 실체의 존립근거를 무너뜨리고, 따라서 모든 형이상학의 존립근거를 무너뜨린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근본불교로부터 오늘날의 대승이나 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반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성장ㆍ발전하여 왔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신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변치않는 우주의 근원이라든가, 인간의 의지가 표상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 이러한 것들을 시공간 속에서 유전하는 현상계를 초월하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본체계의 존재들로서 상정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20세기 이전까지 모든 서양철학사의 주류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에 의하여 지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시공간을 초월한 어떠한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은 곧 불교가 아니다. 싯달타라는 인도의 청년에게, 동종의 육신을 보유한 한 인간으로서 나 도올이 존경의 염을 갖는 이유는, 그의 사상의 결백성과 철저성이다. 싯달타는 연기를 깨닫는 순간부터 모든 종교와 철학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을 거부했던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본체계라는 것은 싯달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싯달타에게는 이 세계에 궁극적으로 불변하는 어떤 물질의 단위가 존재한다는 신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고뇌를 인식하고 발버둥치고 수양을 쌓아 그것을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이 시공간내에서 즉 철저히 현상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는 현상론(phenomenalism: 훗설이 말하는 현상론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이다. 불교의 본체론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실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은 곧 현상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두 밀레니엄동안 서양철학이 본질적으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불교는 헤겔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초에 이르러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나긴 불교의 동면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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