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무아의 아트만과 실체
자아! 이제 제3의 명제를 분석해봅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sarvadharma anātmānaḥ
여기 ‘제법’이라는 말 속에, ‘모든’의 뜻을 가지는 ‘제’ 이외로 ‘법(法)’이라는 말이 주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 ‘다르마(dharma)’라는 말처럼 불교세계에서 넓게 쓰이는 말도 없습니다. 다르마는 법칙, 정의, 규범의 뜻도 있고, 불타의 가르침을 총칭해서 쓸 때도 있고, 덕, 속성, 원인의 뜻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중국고전 중에서 법가에서 쓰이는 ‘법’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지만 기실 다르마는 법(法)보다는 도(道)라고 했어야 옳을 것 같아요. 그런데 4법인 제3명제에서 쓰인 ‘법’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냥 사물, 물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사물, 사태, 사건)은 무아(無我)다! 즉 아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我)’라는 의미로 쓰인 ‘아트만(ātman)’이라는 말을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한자가 ‘나 아我’기 때문에 그냥 ‘나, I, Ich’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산스크리트어와 동어근(同語根)의 말로서 독일어에 남아있는 재미있는 동사가 하나 있습니다. ‘아트먼(atmen)’이라는 동사인데, 그 뜻은 숨쉬다, 호흡한다는 뜻이지요. 영어로 ‘to breath’라는 뜻이지요.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도 ‘숨’ ‘호흡의 기식(氣息)’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의 ‘기(氣)’도 기실 ‘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트만은 숨에서 ‘생기(生氣)’, ‘본체(本體)’, ‘영혼’, ‘자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숨 쉬는 자아, 주체를 의미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불교적 맥락에서 이 아트만은 ‘자기동일체로서의 집착’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즉 숨 쉬는 자아는 그 자아가 영원불변한 자기동일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과연 오늘 숨 쉬고 있는 내가 내일 숨 쉬고 있는 나와 동일할까요? 이 나의 자기동일성은 우리가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불변의 본질, 본체(noumena), 실체(substance)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의 나, 내일의 나! 아까의 나, 지금의 나가 과연 같은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오늘 아침(2019년 6월 26일 수요일) 너무도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이 일을 당하기 전의 나(아트만)와 당한 후의 나는 정말 동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李仁秀)라는 분이 나를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는 기사를 오늘 새벽에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이승만학당 대표이사인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를 고소대리인으로 내세워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 그 소장을 중앙지검으로부터 건네받은 혜화경찰서로부터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당장이래도 가서 조서작성에 기꺼이 임하겠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고발내용을 엄청 많이 보강하여 자료를 보낸다고 하니, 그 후에나 만나면 좋겠다고 해서 7월 22일 혜화경찰서에 출두하기로 했습니다. 온 국민이 같이 본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논의된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매일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상가에게 그러한 정신적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 과연 이 시대의 지성들이 해야할 일일까요? 이미 역사화된(역사 속에서 죽은) 인물에 대한 사상가의 평론은 역사평론일 뿐 사자에 대한 개인적 명예훼손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평론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정당한 사회적 루트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한 페어게임을 포기하고 나를 개체적으로 괴롭힌다는 것이 과연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런 행위를 통하여 과연 이승만이라는 개인의 영예가 회복될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시인 김수영이 써내려간 싯귀 한 구절만이라도 읽어보시면, 이승만 치하의 민중의 애환이 얼마나 심했나 하는 것을 아실 수 있을 텐데요. 나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슬픕니다. 그 슬픔을 가슴에 품은 채 이 글을 계속 써나가겠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아는 서양철학언어를 빌리면 ‘실체(Substance)’에 해당됩니다.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 즉 자기동일적 분별태가 없다. 모든 사물은 본질이 없다. 실체(Substance)라는 것은 ‘아래에(sub-)’ ‘놓인 것(stance)’이라는 의미이니까,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 본체, 영원한 이데아를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그러한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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